노자 <도덕경>, 장자 <장자> (고전 12강)



도가와 도교란?

   일반적으로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도교(道敎, Taoism)'라고 통칭한다. 하지만 엄격하게 따지면 도교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도가(道家) 사상이요, 다른 하나는 도교(道敎) 신앙이다.

   도가 사상은 인간이 정신적으로 누릴 수 있는 초월과 생명력 넘치는 삶과 절대 자유를 추구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도교 신앙은 인간이 육체적으로 불로장생하는 것을 기본 목적으로 한다. 도가 사상은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 체계이기 때문에 한() 대 말에 와서는 노장사상이라 한데 묶어 부르기도 했다. 도교 신앙은 2세기 동한 사람 장도릉이 노자의 이름을 걸고 세운 종교 집단을 일컫는다. 여기서는 도교 신앙이 아니라 도가 사상을 살펴본다.

 

노자와 도덕경

   노자는 기원전 570년에 태어났다고 본다. 어머니가 별똥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임신한 후 82년이 지나 태어낫다고 한다. 배 속에서 그렇게 오래 있었기에 태어났을 때 머리가 이미 늙은이처럼 하얗게 되어 있었고, 이 때문에 노자, 늙은 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 있다. <사기>에 의하면 노자가 서쪽으로 가다가 함곡관이라는 재를 넘게 되었다가 그 곳의 재를 지키던 윤희라는 사람으로부터 간청을 받아 사흘간 머물면서 간단한 글을 남긴 것이 <도덕경>‘5000라고 한다. 물론 현대 학자들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글의 성격이나 구성, 나타난 사상 등으로 보아 어느 한 사람이 한자리에 앉아서 쓴 글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도덕경>은 본래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를 위한 지침서였지만, 그 가르침의 보편성과 깊이 때문에 통치 지도자들뿐 아니라 다른 많은 이들에게도 널리 사랑받았다. 어느 면에서 현실적인 면을 강조하는 공자의 유가 사상이 양()응 대표한다면, 형이상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는 노자의 사상은 음()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 이 둘이 동양인의 정신세계에 양대 축을 형성하며 조화를 이루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도덕경>1788년 라틴 말로 번역된 이후 여러 말로 번역된 것을 헤겔, 하이데거, 톨스토이 등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읽고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 서양 대학에서도 도가 사상에 매료되는 학생들이 많을 뿐 아니라, 환경 문제나 여성 문제 등에 관련된 사람들도 <도덕경>에 나타난 세계관이나 자연관, 여성관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도와 덕

   ‘도덕이나 윤리를 가르치는 책이라고 오해하기 쉽지만 사실은 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1장 첫 문장은 “‘라고 할 수 있는 는 영원한 가 아니라.”라고 한다. 그것이 이름이 아니라 그렇게 불러 보는 자()일 뿐이라고 한다. 이름으로 규정하거나 정의되거나 논의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분화되지 않은 완전한 무엇, 하늘과 땅보다 먼저 있었다.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고, 무엇에 의존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고 두루 편만하여 게속 움직이나 없어질 위험이 없다. 가히 세상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분화되지 않은 무엇(the undifferentiated)이다. ‘미발상태의 무엇, 혹은 그 안에 모든 것을 잠재적으로 포괄하고 있는 포괄자(the All-embracing)’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개물(個物)들이 존재하기 이전의 근본 자리이기에 물론 소리도, 형체도 있을 수 없고 변하지도 않는다. 중세 철학에서 쓰던 아세이타스(aseitas)’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도는 만물의 근원, 존재의 근거,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이 그러하도록 하는 근본 원리, 흔히 쓰는 말로 하면 궁극 실재(Ultimate Reality)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와는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라고밖에 할 수 없다. 보통 존재(being)‘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비존재(non-being)'라고 밖에 할 수 없고, 보통 사물(thing)'과 너무도 다르므로 무물(no-thing, nothing)'이라 할 수밖에 없다. 궁극적으로 도의 본질에 관한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논의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56장에 언명한 대로 도에 대해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그러면 덕이란 무엇인가? 덕은 일차적으로 도에서 나오는 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도에 대해 사변적으로 왈가왈부하는 대신 그 작용을 살피고 거기에 맞추어 살면서 얻을 수 있는 힘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인간에 있어서 이상적인 삶이란 결국 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 도와 함께 흐르고, 도와 함께 춤추는 것,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도의 원리

(1)함이 없음(무위, 無爲)

   아무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함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발적이고 은은하여 보통의 과 너무도 다른 ’, 그래서 함이라고 할 수도 없는 함이다. “인위적 행위, 과장된 행위, 계산된 행위, 억지로 하는 행위, 남의 일에 간섭하는 행위, 함부로 하는 행위 등 일체의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행위를 버리고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살아가는 것이 득이요 덕이다.

   <도덕경>에서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그 존재 정도만 알려진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칭찬하는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 가장 좋지 못한 것은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지도자라고 한다. 가장 훌륭한 지도자인 무위의 지도자는 산과 들을 풍요하게 하는 이슬처럼 가랑비처럼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어 백성들이 일이 잘 될 때 이 모두가 우리에게 저절로 된 것이라.”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한다는 뜻이다.


(2)되돌아감(, , , , , )

    만물을 보라. 달도 차면 기울고, 밀물도 어느 때 썰물이 되고,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된다. 아주 더운 여름이 되면 다시 추운 겨울로 이동하고, 심지어 온 우주도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를 인간사에 적용하면 하라고 생각되는 데서 복이 나오고, 복이라고 생각되는 데 화가 숨어 있다.”라는 사실을 알라고 한다. 전화위복이다. 올바름이 변하여 이상스러운 것이 되고, 선한 것이 변하여 사악한 것이 되므로”, 사물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데서 벗어나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처럼 만사 새옹지마이니 삶의 오르막길 내리막길에서 느긋한 마음, 의연한 태도로 대하는 것이 득이요 덕이다.


(3)다듬지 않은 통나무(, )

   도가 아무런 꾸밈이나 장식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통나무인 것처럼 우리도 물들이지 않은 명주의 순박함을 드러내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의 질박함을 품는 것, ‘중심의 생각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이는 것”, 이런 것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길이라는 것이다. 행복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과 비례해서 증대하는 것 같지만, 욕망을 충족시켜 봐야 욕망이 더 커질 뿐이다. 오히려 욕망 자체를 줄이는 것이 효과적인 길이다. 무욕은 무위와 무지와 함께 <도덕경>에서 강조하는 이상적 삶의 방식 중 하나다.


(4)하루하루 없애 감(일손, 日損)

   어떻게 도의 길을 갈 수 있는가?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 가는 것,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가는 것, 없애고 또 없애,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십시오.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라고 한다. 우리가 사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선입견이나 지식을 버리면 도와 하나 됨의 경지에 이르고, 이렇게 될 때 모든 인위적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게 된다고 한다.


(5)지식을 없앰(무지, 無知)

   마치 우민 정책을 권장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전체를 두고 보면 여기서 말하는 무지란 우리의 간지(간사한 지혜, 奸智), 꼼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잔꾀 같은 것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라고 보아도 좋고, 더욱 근본적으로는 도에 대한 우리의 분별지(分別智)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도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나 편견을 없애라는 말이다.

 

장자

   <장자>는 이래라저래라 하는 교훈적인 가르침이 거의 없다. 거의 전부가 이야기나 우화로 꾸려져 있어 읽는 이가 거기서 자기 나름대로 자기에게 필요한 깨우침을 얻도록 되어 있다. 사실 <장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적이고 통속적인 고정 관념, 이분법적 사고방식, 거기에 기초한 인습적 세계관이나 종교관의 내적 모순을 우리 스스로 살펴보고 스스로 타파하여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도와줄 뿐이다. 우리의 얼굴을 씻겨 주고 단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거울을 들어 주는 셈이다. 좀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면 한 가지 체계적인 인식 내용(cognitive contents)’을 제공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깨움(evocativeness)’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책이라 할 수 있다.

 

<장자>의 구체적 주제

(1)

   <장자>의 도는 <도덕경>의 도의 개념과 기본적으로 같다고 볼 수 있다. <도덕경>이 도를 주로 만물의 생성 변화의 근원으로 파악하고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할 대상이나 결국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궁극적 귀착점으로 강조한 데 반하여, <장자>는 도를 무궁한 생성 변화 그 자체로 파악하고, 그 근원으로 돌아가기보다는 그냥 그 변화에 몸을 맡겨 그대로 흘러가는 삶을 더욱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도덕경>은 주로 도의 ()’하는 측면을 말하고 있는데, <장자>는 도의 ()’하는 기능을 부각한다.


(2)초월과 자유

   제1편에는 물고기가 큰 봉새가 되고 하늘길에 올라 남쪽 깊은 바다로 날아간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여기서 봉새는 엄청난 변화의 가능성을 실현한 사람을, 그리고 그 거침없는 비상은 이런 변화나 변혁을 이룬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초월을 상징한다. 이것은 인간이 생래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실존의 한계에서 벗어나 얻을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이 어떠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어느 면에서는 인간 해방과 거기에 따르는 자유를 선언한 책이라 할 수 있다.


(3)다양한 시각

   장자는 우리가 어느 면에서 모두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한다.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우리가 가진 조그만 구멍을 통해서, 한정된 시각을 통해서, 왜곡되게 인식하고 있을 뿐이라는 뜻이다. 조삼모사의 원숭이와 같이, 사물을 양쪽에서 볼 수 있는 양행(兩行)’의 길을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사물을 인습적 시각에서 일면만을 보고 그것을 절대화하므로 쓸데없는 것을 가지고 일희일비하거나 거기에 목숨을 건다. ‘나비의 꿈이라는 장자의 이야기에서처럼 나비와 장자 사이에 거침이 없이 넘나드는 유동적 변화의 장이다. 다각적 시각에서 사물의 진실을 더욱 깊이 볼 때 그만큼 더욱 자유스러워진다는 이야기이다.


(4)자연적 본성을 따름

   장자에게 있어서 행복은 주어진 천성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학의 다리가 길면 거기 맞추어 긴 대로 살고, 오리의 다리가 짧으면 거기 맞추어 짧은 대로 사는 것이 행복하다. 장자는 모든 정치 제도나 법률, 윤리 같은 것도 기본적으로 모두 인위적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고 배격했다. 일종의 자연주의자 혹은 좋은 의미의 아나키스트적 입장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5)의식의 변화

-오상아(吾喪我)

   어떻게 하여야 사물을 더 깊이, 그리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가? 결국은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상식적이고 인습적인 이분법적 의식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2편의 제물론에서 자기라는 사람이 책상에 기대앉아 하늘을 쳐다보면서 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의 제자가 스승의 이런 모습을 보고 어찌 된 일입니까? 몸도 이렇게 마른 나무 같아질 수 있고, 마음도 죽은 재 같아질 수 있습니까? 지금 책상에 기대앉아 계신 분은 이전에 이 책상에 기댕낮아 계시던 그분이 아니십니다.”라고 하자. 자기는 언아, 참 잘 보았구나. 지금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오상아)”라고 했다. 여기서 오상아는 <장자>의 핵심 개념 중 하나다. 내가 이전의 나, 일상적 의식의 나, 이분법적 의식의 나를 여의고 새로운 나, 진정한 나로 태어났다는 뜻이다. 이어서 자기는 제자에게 사람이 부는 퉁소 소리, 땅이 부는 퉁소 소리,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를 이야기하며, 오로지 오상아의 경지에 들어간 사람만이 하늘의 퉁소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말해 준다. 꽉 막힌 자의식에서 확 트인 우주의식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이다.


-포정해우(庖丁解牛)

   제3편에는 포정이라는 사람이 소 각 뜨는 이야기가 나온다. 포정이 완벽한 몸짓과 손놀림으로 소의 각을 뜨는 것을 본 문혜군이 참 훌륭하도다.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하고 감탄했다. 이에 포정은 칼을 내려놓고 제가 귀히 여기는 것은 도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고, 3년이 지나자 통째인 소가 보이지 않고, 그러다가 결국 신()으로 대할 뿐, 눈으로 보지 않고 소를 잡는다는 것이다. 포정은 감각기관은 쉬고, 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보통 의식을 넘어서서 내면에서 나오는 초월적 힘에 따라 일을 처리한느 경지를 이른다.


-좌망(坐忘)

   제6편에 나오는 공자와 안회의 대화다. 안회가 공자에게 자기는 뭔가를 이룬 것 같다고 보고했다. 공자가 그것이 무슨 말인가 묻자 자기가 인이나 의니 하는 것을 잊었다고 했다. 공자는 그래도 아직 멀었다고 말해 준다. 안회는 계속해서 예나 악 같은 것도 잊었다고 했다. 그래도 공자는 아직 멀었다고 했다. 얼마 지나 안회가 다시 공자에게 가서 저는 좌망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했다. 드디어 공자는 깜짝 놀라 물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손발이나 몸을 잊어버리고, 귀와 눈의 작용을 쉬게 합니다. 몸을 떠나고 앎을 몰아내는 것, 그리하여 큰 트임과 하나 됨, 이것이 제가 말씀드리는 좌망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공자는 말했다. “너야말로 과연 어진 사람이다. 청컨대 나도 네 뒤를 따르게 해다오.”

   의식의 변화를 얻어 도에 깊이 이르는 길은 우선 인의나 에악 같은 주지주의나 윤리지상주의 같은 의식 구조를 잊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외부적인 것만 잊는 것으로는 모자란다. 이런 외부적인 것을 잊어버림을 망외, 망물이라고 한다. 내부적인 것, 그리고 나 자신을 잊는 것을 망내, 망기라 할 수 있는데, 이 둘째 잊음까지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좌망이다.


-여우(女偶)득도 단계

   제6편에서 도를 터득한 사람으로 등장하는 여우라는 이가 득도의 일곱 단계를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사물이 지나자 그는 세상을 잊었습니다. 세상을 잊었기에 다시 잘 지켜보았더니 이레가 지나자 사물을 잊습디다. 사물을 잊었기에 다시 잘 지켜보았더니 아흐레가 지나자 삶을 잊게 되었습니다. 삶을 잊게 되자 그는 아침 햇살 같은 밝음을 얻었습니다. 아침 햇살 같은 밝음을 얻자 그는 하나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를 보게 되자 과거와 현재가 없어졌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없어지자 죽음도 없고 삶도 없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6)심재(心齋)

   이런 의식의 변화는 사회 참여 내지 정치 참여에도 관련이 있다. 장자가 사회나 정치에 상관없이 현실 도피나 은둔주의의 삶을 살 것을 강요하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무조건 사회를 등지라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변화가 있기 전에 사회를 위해 일한다고 설치지 말라는 것이다. 4편에서 안회가 공자에게 위나라 백성들이 독재자의 폭정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도우려 하니 그곳에 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공자는 안 된다고 했다. 안회가 학식과 예의와 용기 등 모든 것을 갖추어 인격적으로 훌륭하지만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는 것이다. 유가에서 말하는 수기치인, 곧 자기 수양을 했으면 사람을 다스릴 수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는 셈이다. 안회는 도대체 무엇을 더 갖추어야 하는가 물었는데 공자는 마음을 굶겨야 한다고 일러 준다. 심재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공자는 스스로 심재가 무엇인지 말한다. “먼저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다음엔 마음으로 듣지 말고, ()로 들어라.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고작 사물을 인식할 뿐이지만 기는 텅 비어서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려 기다린다. 도는 오로지 빈 곳에만 있는 것, 이렇게 비움이 곧 심재니라.” 이어서 심재를 실천하면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고 한다. 엣날의 내가 죽고 새로운 내가 태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의식의 변화가 이루어져 이런 마음가짐이 갖추어진 사람이라야 사회를 위해 일을 하더라도 진정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유교 경전 <대학>에도 정치에 참여하여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이상으로 나와 있는데, 이런 이상을 실천하기 전에 갖추어야 할 요건으로 사물을 궁구하고(격물), 앎을 극대화하고(치지), 뜻을 성실히 하고(성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정심), 인격을 도야하고(수신), 가정을 잘 꾸리고(제가), 결국 나라를 다스리고(치국),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평천하)고 가르쳤다는 사실이다. [격물치지성의정심, 수신제가치국평천하]


(7)죽음마저도

   이렇게 의식의 변화가 있게 되면 죽음과 삶마저도 초월하게 된다. 죽음은 사계절의 바뀜과 같아 철이 바뀐다고 울어 봐야 공연한 일이며 사물의 실재를 직관함으로써 죽음과 삶이 두 가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물의 두 면일 뿐임을 알게 됐기에 슬픔을 극복하게 됐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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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선

경제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만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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