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논어> (11강)




*강사가 정치학 박사임을 고려하여 이해하는 것이 주요하다.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

   ‘춘추시대’, 전쟁의 역사를 뚫고 평화와 질서를 염원한 공자의 삶과 생각을 통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어떻게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우리 인간은 하늘이 부여한 고유한 권리를 가질 만한 고매한 인격체인가?

어떤 측면에서 보면, 사람은 짐승보다 못한 동물이다. 짐승은 싸우나, 전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서로 싸울 뿐만 아니라 전쟁을 치른다. 사람은 전쟁을 치르는 동물(Homo Furens)’이다.

 

(): 사람다움, 또는 사람

   제자 안연이 인에 대해 묻자,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 단독자로서의 나를 이겨 내고 상대방과 더불어 함께하는 순간 인이 되지. 단 하루라도 극기복례할 수 있다면 온 세상이 문득 인으로 바뀔 게야. 그 변화는 나로부터인 게지, 상대방으로부터가 아님이랴!”

   극기복례를 낱풀이로 보자면,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오다를 말한다. 여기서 기는 ego 덩어리이며, 예는 경직된 의례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극기복례는 ego 덩어리를 부수어 상대방에게 손을 내밀고, 나와 상대방의 경계를 터뜨려 우리로 승화시키고자 함을 의미한다.

추가로 복례가 지향하는 세상은 위하지 않는곳이다. 너를 위하여 나를 소모하지도 않고 나를 위하여 너를 수단화하지 않는 세계다. ‘위하여논리의 무서움은 지배·복종의 권력 세계로 너와 나를 끌어가 끝내 우리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공자는 친구가 준 선물이 비록 값비싼 말과 수레일지라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에 친구의 선물은 위하여논리 속으로 빠져들고 그 인사 한마디로부터 내 마음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마음속의 그림자는 부담감으로 또 미안함으로 변질되다가 끝내 친구 사이가 상하 관계로 변질될 씨앗이 피어나게 된다. 그러니까 위하지 않을수록 사람답고 또 가까운 사이인 것이요, 위할수록 거리가 멀어지고 또 상대를 소외시키는 짓이 된다. 이 벌어진 틈새에 권력이 끼어드는 것이다. 이로부터 내가 너의 도구가 되거나, 네가 나의 수단이 되는 지배·복종 관계의 문이 열린다.

   인이란 곧 함께 더불어 하기. ‘그대가 있기에 내가 존재한다.’라는 생각으로의 전환에서 비롯된다. 여태 만이 존재하던 세계, 혹은 내가 있음으로 네가 있다.’라는 오만한 생각으로부터 당신, 곧 부모, 형제, 농부, 친구가 있기에 겨우 내가 존재할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바꾸는 순간 함께하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충서(忠恕)

  인을 기르는 방법은 충과 서라는 두 개념으로 표상된다. 소통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충이란 대화에 나서기에 앞서 발화자 스스로를 점검하는 성찰 과정을 뜻한다. 아렌트가 묘사한 아이히만의 ‘thoughtlessness’란 유교식으로 보자면 충의 불능, 즉 자기를 객관화하지 못하는 정신병적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서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과정을 뜻한다. 상대방을 용서한다가 아니라 상대의 입장을 나의 것으로 접어서 생각함이다.

   즉 소통을 이루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대한 객관적 성찰()’상대의 처지를 입장 바꿔 이해하기()’라는 두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곧 인이란 어마어마한 대중 구제가 아니라 고작 내 주변의 구체적 삶 속에서 이웃과 함께 더불어 우애롭게 사는 것일 따름이다. ‘가 있고 난 다음 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있음으로써야 비로소 가 있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따름이다. 관계 속에 참된 가 있다는 각성, 남과의 접속과 소통 그리고 그 사이에 느끼는 부끄러움. 여기에서 피어나는 감수성과 공감의 능력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로 펼쳐져 나아가는 것이다. 나의 부끄러움에서 발아된 감수성을 측은함과 공분으로 확장해 나가기(추기급인, 推己及人), 이것이 공자의 정치다. 공자의 이상인 이란 주변에서, 즉 집안과 사회 그리고 국가에서 말과 의견이 원활하게 소통하는 상태를 뜻한다. ‘말이 서로 소통하는 문명사회인 것이다.

 

평천하의 동력: ()

   덕이란 단순히 인격의 후덕함을 뜻하지 않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미스터리한 힘의 명칭이다. 공자는 폭력과 폭행의 시대에 맞서서 힘의 종류와 작동 원리를 깊이 연구하였던 사람이다. 그는 인간 세상의 힘에는 폭력만이 아닌 또 다른 힘, 즉 타인의 몸과 마음을 끌어들이는 신비한 힘이 있음을 발견하고, 여기에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덕으로써 정치를 행함은, ‘비유컨대북극성이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데도 주변의 많은 별들이 그를 향하는 것과 같다(衆星共之).”

   도가의 창시자인 노자 역시 덕의 정체에 관해 한 소식을 얻었던 사상가였다. “큰 덕을 갖춘 사람은 자신의 덕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정말로 덕이 있는 사람이 된다. 반면 박덕한 자는 덕을 의식하고 집착하기에 덕이 없다.” 따라서 최상의 덕은 억지로 하지 않는데도 되지 않는 일이 없다.”

   공자는 덕은 고독하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이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확언은 덕의 현상적 특징을 보여 준다. 여기서 배병삼 교수(강사)는 진공청소기와 태풍의 원리를 통해 덕을 설명하고자 한다. 진공청소기의 진공이 강할수록 힘이 강하다는 사실. 태풍의 눈이 없다면, 단순한 열대성 폭풍에 불과하다는 사실. 태풍은 태풍의 눈의 기압이 낮을수록 큰 힘을 발휘한다. 강한 힘은 자기를 낮출수록, 또한 중심을 텅 비우고 고요하게 유지할 적에야 터져 나온다는 힘의 역설을 태풍으로부터 배우고자 한다.

 

유교의 가치

   서구 근대의 개인주의는 결국 인간의 부재와, 가치와 당위의 부재를 초래했는데, 이것은 서구 근대의 존재론과 인식론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며, 공동체와 도덕, 종교와 가족을 희생시키면서 절대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시도의 논리적 결과엿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각종 병폐들(극단적인 인간 소외와 사물화의 세태) 앞에서, 서구에 대한 서구의 반성, 이를테면 여성주의, 생태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를 또 수입하여 고독한 개인의 문제를 치유하는 방안도 있겠지만, 유교의 가족에 대한 재성찰을 통해 새 길을 모색하는 방법도 있을 법하다.

   우리 역사로 볼 때에 조선 후기의 가족주의는 개인들에게는 질곡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의외로 유교 경전들 속에서는 가족주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가족주의로 이름 붙일 만한 증거는 남아 있다. 공자의 제자 진강이 공자의 아들 백어에게 그대는 혹시 아버님께 달리 배운게 있으신지?”라고 물엇다. 그러자 백어는 없습니다. 일찍이 아버지께서 뜰에 홀로 서 계시기에, 종종걸음으로 그 곁을 지나가고 있었지요. 말씀하시길, 시를 배웟느냐라고 하시기에, 아닙니다 라고 대답했더니 아버지께선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고 하시더이다. 저는 물러나서 시를 배웠지요. 어느 날 또 홀로 서 계시기에 저는 총총히 지나가고 있었지요. 말씀하시길, 예를 배웠느냐 하시기에 아직 배우지 못 했습니다 라고 답햇지요. 그러자 예를 배우지 않으면 설 방도가 없다고 하시더이다. 전 물러나 예를 배웠습니다. 이 두 가지를 들었지요.” 진강이 물러나 흐뭇해하며 말하였다. “하나를 물어서 셋을 얻었구나. 시를 들었고 예를 들었고, 또 군자는 그 자식을 멀리함을 배웠노라.”

   마지막 구절, “군자는 그 자식을 멀리함을 배웠노라라는 말은 진강이 아버지 공자의 공평무사를 지적하여 찬탄한 발언이다. 자기 자식이라고 하여 사사로이 아끼지 않는다는 뜻이니, 제 가족에게조차 공적으로 대한다는, 아니 도리어 제 자식을 남의 자식보다 뒷줄에 세우는 싸늘함을 견지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유교에 대한 끈질긴 오해, 즉 공공의 업무를 혈연의 사사로움으로 망가뜨린다는, 이른바 가족 중심주의 또는 연고주의를 유교의 탓으로 돌리는 주장들은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논어 속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노릇이다. 혹은 조선 말기의 유교는 올바른 유교가 아니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이상은 폭력이나 강제를 통해 전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권력적 야망이 아니라, 내 몸을 낳아 준 부모에 대한 원초적 사랑을 닦고 가다듬어, 문지방을 넘고 학연과 지연의 언덕을 넘어, 또 국가와 민족의 한계조차 넘어서 온 세상에 퍼뜨리려는 사랑의 확산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추상적인 어느 신으로부터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살과 살이 서로 닿는 가족 내에서 빚어진다는 점을 발견하고 이를 기르고자 한 것, 이것이 유교의 현실주의적 관점이다. 유교에서 가족은 단순히 경제적 곤궁을 돕고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개인을 방어하는 안전망으로서만이 아니라, 사람다움(사랑)을 배양하고 보존하며, 끝내 세상을 화목하게 만드는 풀무인 것이다. 이제쯤 우리는 유교의 가족주의, 가정의 본래 가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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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선

경제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만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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