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사상의 흐름: 현대 철학사를 보는 몇 가지 관점 (6강)



헤겔-하이데거의 역사도식은 정신을 태양에 비유했다. 철학은 동양에서 떠올라서 서양에서 완성되었다.


2000년 그동안의 역사는 낮의 세계이다. 이제는 밤의 세계가 우세한 시대가 오고 있다. 여성성이 중요해지고, 강한것보다는 부드러운 것,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 부드러운 동양적 사유가 서양적 사유보다 더 우선시되는 시대. 현대철학의 시작은 헤겔에서 시작된다. 플라톤의 것은 끝났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이 '끝났다'라는 종언의 의미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플라톤의 로고스의 나무가 열매를 맺어 많은 산출물을 보였지만 더 이상 새로운 것은 나오지 않는다' 라는 의미이다. 나무는 여전히 살아있으나 전혀 새로운 사유의 씨앗을 뿌려보려는 움직임이 이 시대 종언의 주제의 시작과 같은 것이다. 데리다의 해체론은 이를 잘 설명한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철학자들은 너무 과거에 매달려서 눈물이나 흘리고 묵시록적인 엄숙한 자세는 좀 끝내고 내일을 위해 다시 시작해보자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철학의 재개에 대한 목소리. 이런 것의 선두에 있는 사람이 말년의 들뢰즈와 지금 살아있는 바디우다.


철학계의 분위기를 바꿔보자는 움직임. 헤겔-하이데거적인 역사 도식을 깨려는 전략이 있었다. 그것의 배후가 사건의 개념이다. 들뢰즈는 3층위의 수직으로 나누어지지만 바디우는 수평적이다. 헤겔-하이데거는 역사와 체계를 동일하게 보았다. 인과는 모두 운명적인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와 바디우는 역사 안에서 생기는 인과적 필연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역사 속에서 어떤 하나가 선택되고 전개되는 것 그리고 다른 것이 배제되는 것은 우발성을 띠기 때문에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우발성을 조장한 환경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리스의 경우 해상무역이라는 환경이 그런  철학의 탄생의 배경이 된 것이다. 어떤 관념들이 하나의 위계 질서에 고착되지 않고 수평적인 구도에서 다시 배치 될 수 있는 가능성이 극대화된 것이다. 유럽에서 철학이 시작된 배경은 자본주의로 본다. 들뢰즈는 그리스철학이 어떤 매개를 통해 유럽철학으로 연계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철학의 시작이 가능한 어떤 환경은 있다, 없어졌다 하는 우연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으로 본다. 자본은 모든 사물을 원래 있던 문맥에서 이탈시켜 새로운 문맥 속에 삽입시키는 (들뢰즈가 말하는) 탈영토화, 탈코드화가 나타나면서 문맥, 정체성, 위계를 바꾸게 되었고 마침내 자유로운 개념 창조로 나아가는 사고방식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고 본다. 들뢰즈는 영, 독, 불이 세 나라에서 하나의 스타일, 분위기, 일관된 형식을 통해서 계속 철학이라는 개념 창조가 성립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우연이라고 본다. 자본주의와 그에 맞물린 민주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사고를 해방하여 철학을 하게 하는 분위기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우리를 사로잡고 구속하고 노예로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자본은 열린 사고로 내모는 동시에 예속, 구속하는 특성을 지닌다. 바디우는 우리가 자본에 지배되지 않기 위해서 철학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를 들뢰즈는 상대적 탈영토화에서 절대적 탈영토화라고 표현했다. 절대적 탈영토화로 전도시킬 때 우리는 자본의 구속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바디우가 과거의 철학사를 분류하고 재구성하는데 처음에는 '봉합'의 개념을 가지고 시작한다. 철학은 언제나 진리의 철학이어야 한다. 문제는 철학은 진리를 직접 생산하지 못한다. 철학이 하는 일은 이 4가지 영역을 공가능하게 하는 것. 즉, 서로 일관되게 조화롭게 엮는 것. 일관된 체계를 이루는 장소가 철학이고 여기에서 비로소 대문자 진리가 탄생하는 것이다. 자기 이전의 철학, 특히 20세기의 철학을 세 종류의 봉합으로 설명한다. 봉합이라는 것은 4가지 조건의 어떤 하나가 배타적으로 철학을 지배하게 되고 그래서 철학이 하나의 조건에 배타적으로 묶이는 바람에 다른 조건들하고 관계하지 못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일례로 철학이 과학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있고 봉합이 되어서 다른 종류의 조건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것을 바디우가 볼 때는 영미 분석철학 즉, 과학철학의 전통이다. 또 너무 정치에 함몰되어 있어서 다른 것은 배제했던 전통이 마르크스주의이다. 예술이나 시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는 철학을 후기 하이데거 혹은 니체와 하이데거에 영향을 받은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이다. 이런 데에는 프랑스의 블랑쇼라는 걸출한 문학이론가가 있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철학이 너무 시적인 언어에 밀착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제는 다들 해체, 탈구축을 이야기 하는데 우리 그런 것들 그만두고 우리 철학을 어떤 하나의 배타적인 조건에 묶여있는 상태에서 해방하자는 모습이다. 이것을 탈-구축에서 탈-봉합으로 가자는 것이 바디우의 주장이었다.

들뢰즈는 지리학을 이용하여 체계를 정리했다. 어떤 철학자들은 자연의 심층으로 향하는 철학자가 있고, 어떤 철학자들은 표면에 있으려고 하고, 어떤 철학자들은 높은 곳을 향한다. 높은 곳을 향하려는 철학자는 플라톤. 깊이로 자연의 심층으로 내려가는 철학자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 플라톤 이후의 스토아 철학자들은 새로운 차원을 발견했다. 그것이 높이와 깊이를 나누면서 잇는 평면의 차원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들뢰즈에게서 표면, 평면은 초월론적인 차원이다. 칸트적인 의미의 초월론적 차원을 이야기하는데 칸트에게선 그냥 설정으로 이루어지지만, 들뢰즈에게서는 깊이 속에서 생성의 과정을 거쳐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경험의 세계가 구축되는 것이다. 들뢰즈 철학은 언제나 높이의 철학에 반대한다. 들뢰즈의 철학은 표면과 깊이의 철학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지구상에 철학을 체계적으로 생산하는 나라는 세 나라다. 세 나라가 황금기가 조금씩 다른데 프랑스는 17세기에 영국은 18세기에 독일은 19세기에 각각 맞았다. 말하자면 이 시대에 전통이, 철학 생산의 기반시설이 확립되었다. 20세기는 또 다시 프랑스 철학의 황금기가 돌아온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똑같은 서양철학인데 국가별로 특징이 있다. 그 특징은 어디서 나오는 거냐. 철학적인 개념의 창조가 들뢰즈는 세 가지 조건에 의존한다고 생각한다. 바디우는 과학, 시, 정치, 사랑이라는 네 가지 조건을 말했는데. 들뢰즈는 유사하게 3가지 조건이다. 어떤 개념의 창조를 과거, 미래, 현재로 구성된다. 과거는 그리스다. 그리스 철학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하고, 미래 즉, 미래의 민중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하며, 현재의 조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와 같은 정치경제학적 환경이 국가별로 다르다. 이에 따라 국가별 성격이 다른 것이다.

  프랑스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로 대변되는 것처럼 명증한 투병한 의식, 합리적인 질서를 추구하는 것이 프랑스적 사유의 특징이다. 독일은 대지의 사유, 대륙적 사유, 도시를 건설하는 수준이 아니고 그 바탕, 대지, 이런걸 문제 삼는 거대한 스케일의 철학이다. 뭔가 근거, 토대를 놓고 수립하는 낭만주의적 충동이 가득한 것이 독일 전통의 특징이다. 문제는 이런 대지의 무한성을 철학적 사유의 내면에 귀속시킨다. 봉합시키기 때문에 철학적 사유가 절대화된다. 영국은 독일과 대비된다. 해양적 사유다. 모든 게 유동적이고 영원한 개념이니 법척이니 체계니 이런 것 묻지 않는다. 


  바디우도 이런 데 영감을 받아서 철학의 3대 조율, 흐름을 설명했다. 먼저 해석학적인 전통, 하이데거, 가다머까지 쭉 내려오는데 그 기원은 낭만주의 시대의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에 있다. 바디우 철학에서 신학과 해석학은 동전의 양면이다. 신의 말에 들어있는 오묘한 의미를 찾아내는  게 신학인데 그게 바로 해석학이라는 것이다. 이런 숨겨진 언어의 의미, 닫힌 텍스트를 여는 작업을 의미한다.

  영미 분석철학은 비트겐슈타인과 카르납에서 시작되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오스트라이 출신이다. 그런데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이 영미권 대학, 제도권 철학을 석권하게 된다. 해석학이 언어의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면 분석철학은 언어의 규칙을 찾는거다. 일단 규칙을 찾으면 올바른 말과 틀린 말, 할 수 있는 말과 없는 말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석철학은 언어의 규칙을 찾는데 초점을 맞춘다.

  그 다음에 바디우는 자기 선배 프랑스 철학자들을 탈근대 철학자 즉, 차이의 철학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언어의 복수성, 의미의 다양성을 강조한다. 푸코, 데리다, 리오타르 다 속한다. 거대 서사 거부하고 미시 담론, 언어의 복수성과 의미의 다양성을 강조한다.

  모두 다 공통적으로 언어와 씨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현대철학의 공통점을 바디우는 그걸 두 가지로 요약하고 이를 공리라고 표현한다. 첫째, 형이상학적 진리를 부정한다. 하이데거, 형이상학의 시대는 끝났다. 카르납, 형이상학적 명제는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닌 의미 없는 senseless한 명제다. 그래서 문학에 속한다. 형이상학적 언어를 문학적 언어와 동일시한다. 프랑스 철학에서도 거대 담론의 종언이니 데리다의 해체론, 이게 다 형이상학적 진리가 끝났다는 이야기다. 고전적인 형이상학적 진리는 배제된다. 두 번째는 철학의 문제를 언어의 문제로 환원하는 게 현대 철학의 공통된 흐름이다. 이른바 '언어적인 전회'인데 최근에는 또 다른 새로운 전회가 일어나고 있는데 '윤리적인 전회'이다. 

  바디우가 끊어내고 싶은 게 언어적인 봉합이다. 너무 언어에 함몰해서 철학의 진보가 없어졌다. 이것이 바디우의 기본관점이다. 언어를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언어들이 달라지고 언어가 다른 만큼 세계관이 다른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의미를 분서하고 해석하다 보면 의미가 복수화되고 다양화되면 자꾸 다원주의, 문화적 상대주의에 빠지게 된다. 바디우는 보편주의자인데 오늘 날의 상대주의를 싫어한다. 이런 것이 다 언어에 함몰돼 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반대로 특정 언어를 너무 배타적으로 특권화하는 경우가 있다. 영미 철학을 보면 과학적인 언어 자체가 언어 자체가 나머지는 다 무의미하다. 프랑스 철학은 지나치게 시적인 언어를 특권화하고, 하이데거는 민족 언어를 특권화 시킨다 '존재는 그리스어로 말한다' 이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그리스어와 독일어를 모르면 철학을 할 수 없다는 하나의 언어를 특권화하는 주장을 하게 된다. 바디우가 가리키는 궁극의 문제는 언어의 의미, 이것은 존재의 영역에 속하는데 그 다음에 사건의 영역에서의 진리 사이의 대립이다. 이제까지 언어에 묶여있다보니 의미, 의미 하다가 진리를 놓쳐버렸다. 의미 편향적인 철학 관두고, 진리 편향적인, 진리로 향도된 철학으로 나가자는 것이 바디우의 주장이다.

지금까지 90년대의 바디우의 철학이었고 70대 중후반에도 계속 논쟁적인 저서를 내는데 최근의 저작에서는 철학사를 다른 식으로 분류한다. 이를 '극장의 도식' 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설명하겠다.


  바디우에 따르면 철학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형제, 쌍둥이들이 있다. 소피스트 담론과 반-철학이다. 그 원어는 공통적으로 sophia를 어간으로 한다. sophia를 공동의 원천으로 세 가지 줄기가 뻗어나간 것이다. 

  소피스트 담론이란 언어에 함몰되어 있는 철학 전체를 바디우는 소피스트라고 말한다. 대개 소피스트는 상대주의자를 일컫는데 바디우가 얘기하는 소피스트는 모든 철학의 문제를 언어로 환원해도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언어의 거울에 우리의 시선이 고착되면 우리는 소피스트가 되는 것이다. 언어의 문제에 함몰되면 당연히 상대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다. 후기 비트겐슈타인 언어 놀이 이론을 얘기한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현대의 고르기아스다 라는 애기를 한다. 이런 소피스트 담론은 서양의 회의주의 전통과 이어져 있다. 상대주의다 보니 아무래도~

  그렇다면 반철학은 무엇이냐.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세게에 대한 논리적인 그림을 그린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이론과 같은.. 여기에 머물면 철학인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반-철학이 된다. 그림에 오점을 하나 더한다. 맹점을 공백, 어떤 잔여, 얼룩 이런 것에 시선을 고착하고 거기서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에 함몰해가는 것이 반-철학이다. 어떤 순수한 정관. 여긴 설명이 안ㄷ 되고 단지 가리키고 볼 수 밖에 없는 그런 세계. 순수 정관, 순수 계시의 세계다. 소피스트 담론이 회의주의 전통으로 이어진다면 반-철학은 신비주의, 종교 특히 기독교적 전통과 깊은 관련성이 있다. 반철학은 세계의 논리적인 그림에서 그 그림의 그물망으 빠져나가는 잔여를 실천적 파악의 대상으로 제시하기 위해 구출할 뿐이다. 


  화룡정점은 눈동자를 찍는게 완성이다. 눈동자의 관점에서 그동안의 논리적인 시선으로는 보이지 않는 어떤 초월적인 차원의 세계, 언어 초월적인 세계, 침묵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인데 문제는 이 잔여가 논리적인 세계상 안에 갇혀 있는 사람한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표현할 수도 없다. 똑바로 보면 똑바로 볼수록 안 보이게 되는데. 지젝이 삐딱하게 보면 된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셰익스피어라든가 라캉의 시선 이론을 이용해서 세계적인 호응을 얻었다. 반-철학은 두 세계의 이론이다. 아주 합리적인 세계가 있다. 기독교적인 괁머에서는 차안, 칸트는 현상계 라캉은 상징계, 구조주의자는 구조라고 얘기한다. 그 다음에 그 잔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 피안, 물자체, 실재계, 구조의 바깥이 있다. 현대의 철학적인 담론이 거의 대부분이 이 잔여를 중심으로 회오리 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교수님의 개인적인 생각)

  비트겐슈타인의 말할수 없는 것. 라캉이 말하는 대상, 실재의 파편, 불가능한 것. 데리다가 말하는 흔적, 유령, 선물, 메시아적인 것, 구조의 배꼽=구조가 탄생한 마지막 비밀이 숨겨져 있는 곳. 레비나스의 얼굴, 푸코가 말하는 엥퐁세(비-사유), 리오타르가 말하는 대문자 형태, 들뢰즈의 우발점, 추상적인 선 다 이런게 문제의 잔여에 해당하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 마지막에 나오는 아주 유명한 말이 있다. '우리가 지식의 세계를 이제까지 탐구했는데 그것은 다 신앙, 믿음의 세계에 자리를 내주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믿음, 실천의 세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바디우적인 의미의 협소한 철학에 머물면 안 되고 그것을 넘어서는 차원에 있고 그것의 입구에 해당하는 잔여에까지 가야 된다. 라는 맥락의 이야기이다. 

  20세기 중반기까지는 서양 현대 철학이 전부 언어의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언어적 전회. 2000년 전후로 해서는 언어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 이제는 윤리의 문제가 중요하다. 대부분 서양 철학 사조들이 윤리 문제와 싸우고 있다. 윤리적 전회라고 볼 수 있다. 20세기에 있었다 몇 가지 전회를 정리하자면

레비나스가 윤리학을 제일 철학이라고 주장했는데 바디우는 윤리의 문제로 현대 철학 사조가 집중되는 것을 윤리의 인플레이션이라고 표현한다. 최근 인간의 수명을 제외하고 다른 것들은 자꾸 가속화되고 있다. 기술 술환의 속도, 정보, 지식, 자본 모두 가속화 되고 있따. 장기적인 시간이라는 게 점점 기대하기 없는, 장기적인 안정성이라는 게 세계화가 심화되면서 사라지게 되고 어제로써 내일을 예측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자본의 쏠림 현상 때문에 일어나는 것. 자본이 급작스레 집중되었다가 갑자기 다른 데로 또 옮겼다가. 역사의 방향을 예측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 철학에 있어서 정향의 문제. 오리엔테이션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럴수록 윤리에 대한 성찰의 요구가 증가할 수 밖에 없다. 20세기 미국 대학에서 윤리학 논쟁이 아주 성공적이었다. 세 가지로 정리하자면 첫 번째로 의무의 윤리학과 덕의 윤리학이다. 삶에 대한 신념이나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있을 수록 어떻게 살아가느냐 어떤 것이 가장 이상적인 인간이냐 이런 것을 합의하기가 어렵다. 차라리 서로 훈계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냥 우리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 지켜야 될 최소의 의무, 규칙을 정하고 한 번 정해진 규칙이나 의무는 무조건 예외없이 지켜야 한다. 최소의 규칙을 지켜서 무조건 지키자 즉 의무주의다. 근대에서나 어울리던 것인데 요새 이런 것들이 많이 하다보니 요새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덕성에 대한 것 이런 것들을 잊어버리게 된다. 여기에 반발해서 아리스토텔레스로 돌아가자~ 우리나라에서 요즘 공자에 대한 관심도 이런 것과 맥이 닿아 있는진 모르겠으나 이런 것들이 덕의 윤리학이다. 의무의 윤리학과 개인주의 윤리학은 아주 밀접하다. 전체를 구속하는 규범을 따지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공동체 윤리 즉, 헤겔 철학을 부활시키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의무의 윤리학은 보편주의다. 최소주의, 개인주의, 의무의 윤리학 다 비슷한 건데 전부 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모델로 한 것이다. 현대 윤리학의 논쟁은 다 칸트 윤리학에 대한 도전이다. 


바디우는 이 두 개의 윤리학을 모두 추상적이라고 비판한다. 차이의 윤리학이 말하는 타인은 상황과 유리된 추상적인 차이다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것을 샤르트르적인 상황의 윤리학이라든가 라캉의 정신분석의 윤리학의 틀에 맞춰 여과시키고 그러면서 자기의 길을 간다. 바디우의 주장은 '대문자 윤리학'이란 있을 수 없다. 보편주의 윤리학을 추구하되 아까 말한 철학의 4가지 조건과 그것에 결부된 네 가지 상황 속에서 정해져야 한다. 


  박동환 선생은 동양적, 중국적 사유의 전통이다. 중국적 사유의 전통을 집체부쟁이라고 했다. 어떤 유파에 속하든 유불선과 같이, 갈등, 싸움을 배제하고 전체의 조화를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서양은 정체쟁의이다. 언제나 쟁의의 상황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것이 서양적 사유이다. 

  성학십도의 퇴계의 경 개념과 유사한 게 칸트의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심인데 재미있는 세 가지 논평을 붙인다. 첫째, 존경심은 도덕의 원동력이다. 둘째, 이 존경심이 유일한 선험적 정서다. 신체의 제약 속에서, 감각적인 경험 속에서 정서가 성립하는데 이 도덕적 감정은 우리가 신체 없이 일어나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초월적인 관점에서. 그러니까 현상계에서만 감정이 성립하는데 이건 본체계에서 성립하는 감정이다. 이 감정 속에서 현상, 물자체의 이분법이 무력해진다. 도덕법칙은 경험의 세계가 아닌 선험의 세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된다. 공자의 인도 그러하다. 마지막으로 이 감정을 논증을 초과하는 무조건 우리가 받아들여야하는 이성의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합리적인 이유 대문에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조건, 정언명법의 보편성, 무제약적인 구속력은 합리적인 이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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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선

경제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만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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