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문명의 'Venture': 몽골의 충격과 그 이후 (5강)




이슬람은 이미 선행종교들이 공고한 이후에 발생했기 때문에 퍼지기가 어려웠지만, 다른 선행종교들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었다. 솔로몬, 다윗, 모세 모두 성경의 스토리들이 쿠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독교적인 유사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부족한 점을 수정하면서 자기나름의 새로운 버전을 제시한 것이다.


무함마드를 추종했던 사람들 중에서 장로들이 후계자를 뽑았는데 그 사람을 '할리파(Khalīfah)' 라고 불렀다. 대리인이라는 뜻인데 알라가 아닌 무함마드의 대리인을 의미한다.


올바르게 인도된 칼리프의 시대가 끝날 때 즈음엔 북방으로는 그 당시 페르시아 제국, 비잔틴을 압박하고 서쪽으로는 아프리카를 압박하는 엄청난 팽창을 이루었다. 정쟁이 격해지면서 칼리프가 피살되는데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ʿAlī ibn Abī Ṭālib)'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의심을 받고 싸움이 더욱 심해졌다. 그 당시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총독으로 있었던 '무아위야' 라는 사람이 알리를 누르고 정권을 잡는다. 무아위야가 수도를 메카에서 다마스쿠스로 옮기고 칼리프를 자기 자식에게 넘겨주는 세습으로 바꾸었다. 그 때부터 우마이야 왕조가 시작되었다. 권력을 잃었던 '알리'를 추종하는 파가 소위 '시아파(Shi'ite)' 라고 부르는 종파다. 그러므로 수니파는 우마이야 왕조다. 우마이야 왕조도 굉장한 시기였다. 동쪽으로는 이란을 거쳐서 중앙아시아까지 들어가고,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를 거쳐서 스페인까지 들어간다. 750년 경이 되면 아바스 왕조로 가문이 바뀐다. 아바스 체제의 성립과 함께 기존의 아랍 헤게모니가 무너지고, 이란적인 요소가 엄청 들어오게 된다. 이를 혁명적인 변화로 본다. 문화가 아주 풍부해지고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수도로 옮긴다. 아바스 제2대 칼리프인 만수르가 그곳을 정할 때는조그만 마을이었으나 계획도시를 세운 것이다. 


이슬람은 전체적으로 성공의 역사다. 박해와 순교의 역사인 기독교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이런 것이 종교의 차이를 보이지 않을까? 애초에 세속적인 권력을 가졌던 이슬람의 초기를 생각해보면 이들은 세속적인 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기독교는 세속적인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종교적인 것만을 신성시하고 세속적인 것을 멸시했던 것이 아닐까.


(할리파+아미르)=(같은사람)=(종교적 지도자+세속적 통치자)

=성속이 일치하는 구조


'샤리아'는 인간의 모든 행위,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사회에서 생활하는 모든 것들을 규제하는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하나의 규범이다.

1. 샤하다(شحادة)=신앙고백(알라 이외에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다)

[이점이 많다. 이교도의 세금(인두세)을 안 내도 된다. 사회적 진출의 가능성이 열리고, 노예도 해방시켜준다. 나중엔 세금이 줄어드는 재정적인 문제가 생겨서 테스트가 생겨난다]

2. 살라트(صلاة)=하루에 5번씩 기도

3. 자카트(زكاة)=헌금(세금하고 달리 종교적인 구휼의 목적)

4. 사움(صوم‎)=라마단이라는 금식

5. 하지(حج)=성지순례(메카순례를 해야 함) 여러가지 편법도 있음 대신 누구를 보내거나 근처에 성스러운 곳을 정해서 거기 3번 갔다오면 메카 1번 갔다오는 거 퉁 친다던가.



몽골이 남긴 충격은 대단했다. 

"왔다 부수었다 태웠다 죽이고 약탈하고 떠나갔다" 

당시 생존자가 이렇게 말했었다.

엄청난 인명의 학살, 도시의 파괴 못지않게 무슬림들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칼리프 체제의 붕괴다.

정통 칼리프, 우마이야, 아바스를 거치면서 이 모든 것들은 이슬람세계를 수호하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시아파가 여러 정권들을 세우기도 하고 하면서 위상이 많이 떨어지긴 했었지만 여전히 이슬람권 전체의 통합을 상징하는 리더로서의 위상은 갖고 있었다. 지방정권이 들어서서 태수가 독립을 하더라도 그 사람은 칼리프한테 인정을 받아야 했다.

칭기즈칸의 손자인 훌레구(Hulegu, 일 칸국의 초대 칸)가 침입을 했었는데 무스타심이라는 마지막 칼리프가 '여태까지 수없이 많은 정권들이 리 아바스 가문에 위협을 가하고 굴복을 요구했지만어떻게됐느냐? 그들은 다 사라지고 없어졌지만 아바스 가문만은 살아남았다" 라고 편지를 썼다. 

그러나 역사는 반대로 흘러갔다. 바그다드는 함락되었고 마지막 칼리프는 처형당했다. 600년 가까운 시기의 상징적인 존재가 사라진 것이다. 무슬림들은 도살할 때 목을 딴다. 그 다음에 피를 다 땅바닥에 흘리게 한다. '할랄'이라고 해서 적법하다고 본다. 그런데 몽골인들은 양의 심장밑을 잘라서 염통을 들어가는 핏줄을 잡아버린다. 순간적으로 죽인다. 몽골인들은 동물을 자기 가족처럼 아끼기 떄문에 가장 고통없이 죽이는 법을 쓰는 것. 그렇기 때문에 몽골인들은 귀족을 죽일 때도 고통없이 죽인다. 땅의 정려을 노하면 안된다고. 그래서 칼리프를 죽일 때도 칼리프를 카펫에 말아서 그위에 말을 달리게 해서 뼈가 부스러져서 죽이게 했다. 나름 몽골인의 배려...


칼리프 시스템이 무너지자, 성속일치의 시스템이 무너지고 새로운 체계가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사회는 계속해서 성속일치의 시스템을 유지시켰다. 하나는 샤리아라는 율법 체제의 강고함, 강력함 때문이었고, 두 번 째는 몽골인들의 본속주의 때문이다. 

샤리야는 4개의 학파로 지역마다 나뉘어진다. 그래서 지역의 토속법까지 함께 융화되어서 포기하기 어려워졌다. '울람마'라는 학자단이 있다. 샤리야를 공부하고 법전과 연결시켜서 연구하는.. 나중에 법관이 되기도 했다. 기존의 법률을 연구해서 4개의 학파가 나왔는데 나중엔 해석의 문을 닫는다. 더이상 새로운 해석을 닫고 기존의 체계를 유지하려 했다. 그래서 그 학자들이 그것 그대로 운영하게 된다. 종교 언어는 모두 아랍어로 되어있다. 어느 지역이든 아랍어로 배운다. 이슬람을 믿는 지역에서는 아랍어가 Lingua franca다. 엄청난 거리로 떨어져잇어도 공유되는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그 먼 거리에 가서도 울람마가 대법관을 할 수 있었다. 이슬람권이 굉장히 다양한 지역에 퍼져있고 통일성과 유연성을 통해서 자기의 샤리야 체제를 유지했다. 세속과 종교의 세계가 파열음을 내지 않고 나름대로 붙어있게 된 것이다.

몽골인들은 전 세계를 지배하면서 티벳종교를 믿는 일부 제외하곤 전부다 이슬람을 믿는다. 몽골인들은 자기들이 믿는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세계제국을 유지했고 통치했던 특징 중 하나는 자기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이것을 본속주의라고 부른다. 본래의 풍속을 유지하는 것. 고려가 몽골의 지배를 받았을 때 자신의 풍속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국왕이 몽골 딸과 결혼하고 자기가 좋아서 했다.


몽골인들이 종교적으로 관용을 한 것은 아니다. 그 당시 몽골인들은 기독교도는 기독교족으로 판단한다. 종교가 그 종족으로 판단했다. 기독교와 유태교는 경전을 가지고 있으니 그 종교를 믿도록 유지하게 했었다. 그런데 불교는 용인하지 않는다. 불교도는 우상숭배자기 때문에 싫어한다. 우상숭배는 그냥 싫어한다. 탈레반들이 불교유산 파괴하는 것 비슷한 심리. 몽골인도 하나의 독자적인 공동체로 본다. 무슬림들은 자기들의 본속을 유지할 수 있도록 허용해준다.


버나드 루이스라는 이슬람권 연구하는 학자가 있는데 What went wrong? 이라는 문제적인 책을 냈다. 이슬람에 대해서 뭐가 잘못됐다고 한다. 루이스는 반(反)이슬람의 느낌을 받는 글들을 썼다. 격한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이 사람의 논지는 그거다. 일반적으로 이슬람의 실패를 몽골 때문이다 라고 하는 것 처럼 자기들의 문제를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냐 라고 생각을 해버린다. 책임의 소재를 바꿔버리는 것이 문제다. 너희들이 문제인 것을 바꾸려고 해야 한다라는 논지다.. 굉장히 어조가 격하지만 이슬람권에 대한 권위 높은 연구자이기에..



소감

이슬람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어서 이 강의는 넘기려고 했었다. 하지만 현재 '중동문화와 비즈니스'라는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기에 단순한 호기심에 들었다. 수업에서 들은 것과 크게 차이는 없었지만 예수와 쿠란을 동등하게 두는 것은 강의와 달랐던 것 같았다.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메신저로서 무슬림들은 이해하지 않을까라고 배웠는데. 예수의 신성함을 그대로 인정해서 말씀해주시니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그들의 성속일치를 당시 환경과 연결해서 설명하는 것은 여러모로 현대에 어떤 사건을 이해하는 방법론이 이제는 상황론에 많이 가까워졌음을 또 한 번 느끼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자주 일컫는 '사바사', '케바케'. 이러한 상황을 두고 이해하는 방법론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면서 절대론의 붕괴가 가져올 다양한 문화 창조와 혼란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고민되었다.

다시 이슬람 문화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그들을 호전적인 문화로 생각하는 우리의 선입견이 많이 깨어지고 있다.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쿠란이라는 말은 사실 어떤 서적에도 없다고 한다. 우리의 교과서에만 유일하게 쓰여져 있다는데.. 우리나라도 다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다양한 문화권을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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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선

경제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만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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