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_빅터 프랭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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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빅터 프랭클 박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이은 정신요법 비엔나 제3학파인 로고테라피 학파의 창시자이다.

이 책의 원제는 'From Death-camp to Existentialism' 죽음의 수용소에서 실존주의로이며, 59년 영문판이다. 

책은 3부로 나뉘어져있는데, 1부에서는 수용소에 있었던 경험을 위주로 시간의 흐름을 따라 조각조각 서술되어 있다.

2부는 독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로고테라피에 대한 간단한 기본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3부는 읽지 않았다.

난이도는 이 분야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도 충분히 쉽게 읽을 수 있는 가벼운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로고테라피 부분보다는 1부를 가벼이 읽고 넘어가도 좋을 것 같다. 우리가 수용소에서의 삶을 간접체험하기 좋은 책이기 때문이다.


비정상적인 상황에 비정상적인 반응

아우슈비츠에 도착하고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사람들은 혐오감을 느낀다. 이를 저자는 1단계라고 지칭했다. 그러나 곧이어 2단계 반응이 나타난다.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해 비정상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정상적인 행위이다.

(중략)

이때 열두 살 난 소년이 옮겨지는 것을 그는 냉담하게 서서 바라보았다. 

소년은 그의 발에 맞는 신발이 수용소 안에 없었기 때문에 

맨발로 눈이 온 땅 위에서 몇 시간씩이나 차렷자세로 서있거나 바깥에서 하는 노동을 강요당했던 것이리라. 

소년의 발가락은 동상에 걸렸고, 담당의사는 집게로 시커멓게 썩은 부분을 하나씩 집어냈다. 

이를 구경하는 우리들은 혐오, 전율, 동정과 같은 감정들을 진정으로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이미 수용소에 온 지 몇주일이 지난 그에게는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 그런가 하면 죽어있는 사람들의 모습 등은 너무나 흔해빠진 광경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그와 같은 것들에게서 감정의 파동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일으킬 수 없었다.

P.48


서두에 있는 말처럼 그 상황이 닥친다면 인간은 그것에 적응한다. 생존에 대한 욕구는 대개 어느 무엇보다도 강력한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익숙해지면 이것이 비정상임을 알기 어려워진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시각을 빌리기도 하고, 물리적으로 먼 사례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


나는 죄수들이 음식과 좋아하는 기호품에 관한 생각을 피할 수 없다는 것, 

잠시라도 여유가 있으면 그와 같은 생각이 그들의 의식 속으로 파고들게 된다는 점을 위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들 가운데 가장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맛좋은 음식을 다시 먹을 수 있게 되는 때를 동경했다. 

이는 맛좋은 음식 그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먹을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인간 이하의 생존이 끝내는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런 점은 아마도 독자들이 이해하리라 믿는다.

P.61


문득 군대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오른다. 많은 남성들은 공감할 것이다. 군대에서의 일상은 매우 단조롭고 따분하다. 그 시간을 어떻게 해서든 처리하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다. 최대한 잠을 자면서 시간을 맹목적으로 보내거나, 운동이나 독서를 하면서 버려질 수 있는 시간을 가능한 생산적으로 바꾼다던가, 주변에 있는 선후임들과 여러 활동을 하면서 보낸다. 이런 행동들은 사람에 따라 나뉘어지지만, 절대적으로 공통적인 것이 있다. 바로 음식에 관한 생각이다. 모두들 휴가를 정하면 나갈 기회에 최대한 많은 것들을 먹어보고자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그 계획을 하루이틀만 세우는 것이 아니다. 휴가가 한 달 전에 정해졌다면 한 달 동안. 두 달 전에 정해졌다면 두 달 동안. 끊임없이 그 계획만 짜고 또 짜고 반복한다. 나 또한 그런 경험이 있기에 그것의 기쁨을 알고 있다. 내가 아직 이곳에 갇혀있지만 바깥에서의 활동을 계획하는 것은 내가 이미 바깥에 나와있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곳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는 충동이 그런 비정상적인 행동을 가능케 한다. 수용소를 군대에 빗댄 것은 그분들에게 모욕이 될 수 있으나, 나가고 싶다는 마음만은 모두 같았다는 것을 그들도 이해하리라 믿는다.


고통과 죽음은 삶을 완성시킨다


한 인간이 운명을 받아들이고 운명에 따르는 모든 고통을 참고 견디는 방법, 

자기 십자가를 떠메고 나아갈 방법이 그의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덧붙이게 될 충분한 기회를 그에게 주게 된다. 

깊은 의미는 용감하고 위엄이 있으며, 비이기적인 삶에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기의 보존을 위한 무자비한 싸움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 버린다면 짐승보다도 못한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P. 114


저자가 말하는 내용은 뒤에 계속 반복되는데, 결국 고통과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게 되고, 이를 지향하는 삶을 구축하는 것이 삶을 완성시키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이제 실존주의에 엮어서 자신이 실존하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자라고 하는 것이다. 본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다보니 격렬하게 이를 진리라고 믿는 것 같았다. 고통을 내가 예상할 수 있을까? 그 고통이 정말 내가 견딜 수 있는 정도라고 발생하기 전에 우리가 알 수 있을까? 니체는 참을 수 있는 고통은 우리를 성장시켜준다고 했다. 그런데 고통을 승화시키는 사람보다는 고통으로 인해 반감을 갖는 사람들을 더 자주 볼 수 있는 것 같다. 혹은 그 고통으로 삶의 의미는 커녕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모든 사람들에게 실존철학을 추천하기엔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은 천차만별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고통과 죽음은 삶을 완성시킨다는 저자의 말을 내 삶으로는 깊이 절감하고 있으나, 남들에게 섣불리 말 할 자신은 없다. 고통을 겪어야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만 본다면 얼마나 비인도적인가.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기 쉽다


우리는 그토록 엄청난 정신적 억압을 오랫동안 받아왔던 사람이 석방 후 쉽게 어떤 위험에 빠진다는 것, 

특히 압박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풀렸기 때문에 더욱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고려하여야 한다. 

(중략) 

이러한 심리적 단계에서 원초적 본능을 지닌 사람들은 수용소 생활에서 보고 배운 야만적 행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관찰하였다. 이제 자유의 몸이 되자 그들은 그들의 자유를 전매특허인양 마구 휘두르고 잔인하게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중략)

어느날 나는 친구와 수용소를 향해 걷고 있었다. 

인근 읍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우리는 들판에 난 길을 가로질러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우리들은 푸르름이 싱싱한 곡식이 될 식문들이 반쯤 자란 밭 앞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밭을 피해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친구는 손을 뻗어 나의 팔을 잡더니 나를 끌고 밭으로 들어 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더듬거리며 얼마 자라지 않은 곡식을 짓밟지 말자는 뜻으로 말을 하였다. 

그러자 "시끄러워!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빼앗기지 않았던가? 내 아내와 아이는 가스 처형실에서 죽었단 말일세. 

이제와서 모든 일들을 다시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그런데도 자네는 내가 몇 포기의 귀리를 밟는 것을 막는단 말인가!" 


자신이 아무리 부당한 짓을 당했다고 해서 그 자신이 남에게 부당한 짓을 저지를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오로지 참을성 있게 깨우쳐 주어야만 그들을 성공적으로 진리로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P.153


고통을 받으며 살았던 그들이 쉽게 바깥 세상에서의 규율을 따를 수 있겠는가. 그 오랜 시간동안 도덕과 정당한 규율이 없는 세상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해방되자마자 바로 바깥 세상에 적응할 수 있겠는가. 밑줄친 마지막 문장을 보면 나는 빅터 프랭클 교수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존철학에 빠져 그들에게 로고테라피를 통해 삶을 잘 살 수 있게 인도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있지. 그들의 아픔의 크기가 자신과 다르다는 생각은 전혀 글에서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이런 경우가 있기에 누군가의 삶을 나의 잣대로 거대한 지침을 내려주는 것이 너무나도 불편하고 두렵다.


테헤란에서의 죽음


한 돈 많고 권력 있는 페르시아 사람이 어느 날 하인과 함께 자기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하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방금 죽음의 신을 보았다고 했다. 죽음의 신이 자기를 데러가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하인은 주인이게 말 중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말을 빌려달라고 애원했다. 그 말을 타고 오늘 밤 안으로 갈 수 있는 테헤란으로 도망을 치겠다는 것이었다. 주인은 승낙을 했다. 

하인이 허겁지겁 말을 타고 떠났다. 주인이 발길을 돌려 자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죽음의 신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자 주인이 죽음의 신에게 물었다. 

“왜 그대는 내 하인을 겁주고 위협했는가?”

그러자 죽음의 신이 대답했다.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늘밤 그를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그가 아직 여기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을 뿐이지요.”


어느 선택이 옳은 선택인가. 이 설화를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하길 간곡히 바란다...


눈물


한 사람이 자기가 겪어야 할 운명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는 그의 고통을 자기의 과업으로, 유일하고 독특한 과제로 반드시 받아 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는 괴로운 상황에 놓여 있을 때라도 이 우주에서 오직 유일한 그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 누구도 그를 그의 고통 속에서 구할 수 없을 뿐더러 그의 위치에서 그의 고통을 대신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에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는 바로 그가 무거운 짐을 떠메고 나아갈 길에 놓여있는 것이다. 

(중략)

릴케가 말하는 '헤쳐나가야 할 고통' 이야말로 다른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완수해야 할 작업' 과 같은 것이리라. 

정 우리가 극복해 나가야 할 고통은 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약해지려는 순간을 극복하고 흘러 내리려는 눈물을 씹어삼키며 

잔뜩 도사리고 있는 고통과 맞설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눈물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눈물은 한 사람이 가장 위대한 용기,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용기가 있음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20대 초반까지 나의 눈물은 항상 인도주의적 차원에서의 아픔이었다. 대체 공동체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국가나 가족과 관련된 아픔을 보게 되면 눈물을 쏟기 일쑤였다. 그러나 지금의 눈물은 어떠한가. 이제는 보다 더 상황을 예측하기 용이해졌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내게 일어날 일들이 어떠한지 이미 다 비슷하게 경험해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상황을 예측할 수 있지만 눈물은 흐른다. 다가올 위험이 내게 너무나도 막대한 두려움을 야기하기 때문인가? 그 전과 같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의 아픔인가? 물론 어떤 감정의 발현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지금은 글에서와 같은 눈물에 가까울 것이다. 실존철학이 내 청년기에 많은 영향을 끼쳤기에 이 또한 무의식중에 의지로써 표출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이제 해야할 것은 그 눈물의 무게를 가벼이 만들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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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선

경제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만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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