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_구병모

반응형


   이 책은 구병모 작가님의 8개의 단편을 엮은 단편선이다. 이 중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 '관통貫通' 이라는 두 개의 단편을 읽었다. 우선 오랜만에 현대소설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준 열정적인 친구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한다. 그 친구의 열정이 아니었다면 나는 사회과학을 탐구하는 것과 현실의 이해관계에 빠져서 문학과 토론의 즐거움을 놓치고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직접 언어를 이용해 감사 표명을 전달하지는 못했지만 글로써 나의 감사한 마음을 남긴다.


토론 전 생각

   처음 이 책에 대한 나의 의견은 굉장히 부정적이어서 경멸에 이르렀다. 작가의 이름을 듣고서 연세가 지긋한 수염있는 할아버지를 상상하였으나, 책 표지를 넘기자 그보다는 훨씬 앳되어 보이는 사람이 작가소개 칸을 꾸며주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편견을 이용해서 책의 질적 수준이 낮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구병모 작가님은 76년생으로 내 생각을 뛰어넘는 연세를 가지고 있고, 나의 이런 편견은 무의식 중에 나타나며 이를 자각하고나선 그 편견을 깰 수 있는지 가능성을 시험하고 고정관념을 바꾸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두 단편을 2~3시간 정도 걸려서 완독했다. 읽고나서 작품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비관적이었다. '기연가미연가', '로진백', '트롱프뢰유', '링반데룽' 과 같은 알기 어려운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지적허영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내용을 설명할 때 1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 묘사가 굉장히 길게 기술되는 만연체도 종종 보였다. '이 작가는 너무나도 어리기 때문에 자신의 얄팍한 지식을 세련되게 꾸미고 싶은 욕구가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작가에 대한 나의 몰상식하고 가벼운 편견이 작품 전체의 내용을 비관적으로 뒤덮은 것이다. 이런 나의 생각은 토론을 하면서 변했다.


토론

   독서토론을 진행할 때 항상 가장 먼저 소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른 친구들은 즐겁게 읽은 반면 나의 소감은 비관적이었기 때문에 이목이 쏠렸고 이에 대한 의견을 중심으로 토론이 진행되었다. 우선 전문적이어서 어려울 수 있는 단어의 선택은 대중들에게 익숙한 일본의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단어를 들었을 때 이색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책의 내용에 몰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소설을 가볍게 읽는 것에서 탈피할 수 있는 경험이 특별했다는 의견도 있었다. 윤경희 평론가의 책에 대한 평을 확인해보면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백과사전을 함께 두고 읽으면서 단어 하나하나를 찾아보는 것이 특별한 즐거움으로 다가왔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처럼 단어의 선택에 대한 나의 생각 하나가 깨어졌다. 만연체는 그림을 그리는 듯한 문체가 마음에 드는 친구들은 즐거이 읽었다는 것이다. 작품에 미술과 관련된 언어들이 많이 쓰이는데 이는 작가가 과거에 미술을 배웠지 않을까 하는 추측과 함께 만연체의 이유를 추측해보는 논리도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나의 생각들이 하나씩 깨어지면서 토론은 열기를 띄기 시작했다.

   두 개의 단편선에선 일반적, 정상인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첫 번째 작품에서의 '하이' 와 두 번째 작품에서의 '미온' 이다. '하이' 는 유년시절에서의 아픔을 겪고 벽을 짚고 오르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 이상한 범주의 사람이다. '미온' 은 어리숙한 남편과 아이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다. 둘 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 이상행동을 하고 있다. 이를 '을들의 넝쿨' 이라는 표현으로 빗댄 친구가 있었다.(책에 있던 표현인지 기억이 나지 않음) 이 을들의 넝쿨은 분명 우리 주변에 존재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혹은 보려고 하지 않는 것들이다. 같은 것이어도 우리가 아는 대상이 된다면 오지랖을 떨기라도 한다지만, 모른다면 철저히 그들은 무시된다. 존재하는데 사회적으로 연결고리가 끊어져 고립된 사람들. 이 사람들에 대한 고민을 나누면서 아픔의 정서를 공유하였지만 우리는 사회가 그리고 우리가 이들을 어떻게 보호해줘야 할 지에 대해선 구체적인 방법론을 나누지는 못하였다. 그만큼 이윤이 되지 않는 봉사를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활성화 시키는 행위는 어려웠다.

   이러한 비정상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하였다. 우리 모두 일상을 살아간다. 그것의 반복은 어쩌면 죄악이다. 이를 탈출하는 주인공들이라는 것이다. 하이는 발음 그대로 영어로 표기하면 hi 또는 high가 떠오르지만 우리는 'high' 로 생각했다. 그녀는 끝이 없는 높은 곳을 향해 오른다. 이는 상승의 욕구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인위적으로 세워놓은 건축물들을 정복함으로써 하이를 자연상태로의 회귀로 바라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미온은 그림을 보다가 사라진다. 일상이라는 구속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관념체계이다. 이를 탈피하여 새로운 관념. 즉,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정말 새로운 관념으로 넘어가는 것을 미온의 사라짐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책의 표지를 자세히 보면 '루초 폰타나' 의 작품과 비슷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미온이 이러한 틈으로 사라졌다는 것인데. 우리는 이 그림에 대해서도 굉장히 신비롭게 느끼고 다가갔다. 평형세계에서 그림을 통해 입체적인 공간개념을 창출하고 이 안으로 사라지는 미온을 바라보며 우리도 비슷하게 현상계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을 누구나 갖지 않는가? (공간에 대한 철학적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지만 그 당시 토론에 빠져들어 필기를 남기지 않아 어떠한 내용을 하였는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마지막에 우리는 내용을 종합하여 결국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거리를 어떻게 하는 것이 이상적인가? 하는 고민을 하였다. 이러한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배척하기엔 인류애적 측면에서 죄를 짓는 기분이고, 가까운 사람에게 그렇다고 멀게 대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결국 호감과 서로를 안다는 사실에 따라 우리는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지 않냐는 현실적인 대답으로 우리의 인류애적 고민은 쓰잘데기 없는 감상으로 결론을 내려버렸다. (오랜 토론으로 배가 많이 고파서 자리를 뜨고 싶었나보다...무항산무항심:( )


반성

현실에서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우리 주변의 재난 같은 삶을 외면한다. 그들에게 우리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인류애적이며 이상적인 말을 나는 이제는 내뱉을 수가 없게 되었다.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이제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인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혹은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 사회에서 배척되지 않도록 사회적 안전망과 균등한 부의 분배체계를 고민해야 한다' 라고 조금 더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대책을 고민하게 되었다. 내가 직접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돕진 못하더라도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기회를 작게나마 참여하고, 미래에 그들을 위한 관심을 잊지 않고 계속 행동하는 내가 되길 바란다. 사실 내 주변 사람들이 이런 반성을 듣는다면 '내게 물리적 혹은 정서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더 신경써라' 라는 말을 할 것 같다. 정말 쉬우면서도 내겐 어려운 행동인데. 내가 대체 왜 그러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다. 혼자만의 생각으론 현실적인 제약이 나의 고민을 제한한다. (물론 이것만이 아닐텐데 어떠한 것이 더 문제가 되는 것인지 찾지를 못하고 있다.) 이 고민에 대해선 학교 내의 상담센터에서 상담을 받아보고 싶다.



반응형

씨선

경제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만학도

    이미지 맵

    Book 다른 글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