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평: 사랑과 권태 혹은 인생과 일상 (★★★★☆)
읽기 전에, 프랑수아즈 사강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검색했었다. 어린 나이에 문단에 등단해 주목받았고, 마약과 도박에 빠져 자신의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헤엄쳤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세상 사람들이 사회의 안정을 위해 공공연하게 정해놓은 규칙들을 그녀는 하나 하나 파괴했다. 작품 속 폴이 사회적 시선을 신경쓰는데 그것과는 달리 현실에서의 작가는 그러한 시선을 무시? 혹은 맞서싸웠다. 아마도 24살의 나이에 쓰여진 작품이기에 당시 작가는 폴처럼 정도와 일탈의 경계에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계 자체가 인생이라고 작품은 결론내렸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규정했는가? 사실 나는 항상 일탈을 선호한다고 생각한다. 남과 같은 길은 내겐 사형 선고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친한 경찰이 없는 것을 보면 나도 정도와 일탈의 경계에 서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사람들은 자신의 일탈은 보장받길 원하고 타인은 정도를 걷길 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런 공개적인 공간에 나의 솔직한 견해가 나를 사회적으로 격리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솔직하게 내 생각들을 남겨도 나는 별로 두려움이 없다. 이것이 나 자체이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이러한 '나'가 모두 있기 때문이다. 단언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솔직하고 남들이 힘들게 산다고 하는 지금의 나의 상태가 좋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사강은 반드시 ?가 아니라 ...으로 맺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책을 보면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고 묻기에 뭐야 ...이 아닌데? 라고 생각했었는데 책을 보면서 그 부분이 해소되었다.
시몽에게서 온 편지였다. 폴은 미소를 지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구절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중략]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P.56
작가는 아마도 폴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제목으로 썼을 것이다. 연인이 있음에도 꾸준한 사랑을 받지 못해 생기를 잃어버린 그녀 자신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되짚으면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되뇌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것인지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인지처럼 사랑에 대해 의심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작가의 말이 또 한번 이 고민의 방향을 해소시켜준다. 사랑을 믿느냐는 질문에 "농담하세요? 제가 믿는 건 열정이에요. 그 이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사랑은 2년 이상 안갑니다. 좋아요, 3년이라고 해두죠." 이런 작가의 사랑관이 입혀진 폴은 자신의 사랑을 의심했고 결국 자신은 로제를 사랑한다고 여기고 있다고 판단한다. 사랑의 유한성을 떠올리면 세상은 정말 지옥이라고 느끼게 된다. 사랑은 유한한데,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차길 바란다. 이것 자체가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모순이다.
책임과 자유
로제의 사랑관에 대해서도 나온다. 개인적으론 굉장히 지저분하다고 느끼는 사랑관이다.
그는 숨겨진 젊은 애인이라는 이런 역할, 특히 상대 남자가 자신과 같은 연배인 경우의 이런 역할에 상당한 만족감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중략]
그는 차를 출발시켰다. "난 자유로운 남자야."라는 자신의 마지막 말이 그를 좀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그것은 '책임에서 자유로운 남자'라는 뜻이엇다. 그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가능한 한 빨리 폴을 만나고 싶었다. 그녀만이 그를 안심시킬 수 있었고 그녀는 그렇게 해 줄 것이었다.
P.68
로제는 책임에서 자유롭고자 하지만 그것의 위태함을 견뎌낼 강단은 없다. 그래서 자신을 보살펴 주는 폴이 꼭 필요한 사람이다.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나도 이런 것을 좋아하지는 않을까? 남자의 정복 욕구라는 원초적인 본능을 생각해보면 이런 행동들이 당연하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책임이라는 단어가 주는 메리트를 너무나도 크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혼자여도 별로 외롭지 않다. 그것이 로제와의 차별점이 되어서 나를 안심시켜주기도 했다. 내가 저러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다행이다. 경찰이랑 친해질 이유가 하나 더 줄어들었다.
반숙
시몽은 달달하다. 너무나도 달달해서 비현실적인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마치 TV속 아이돌처럼...
"그리고 당신,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이 죽음의 이름으로,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시몽이 폴에게 하는 중2병 돋는 명어구,,,P.43
읽자마자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여자들은 이런 부분을 보면서 좋아할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시몽이 25살이라고 했는데... 자기 다 컸다고 계속 찡찡대기도 했는데... 참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이런 부분이지 않을까. 아버지의 원수를 복수하겠다고 큰 아버지에게 연극을 준비해서 보여줬던 햄릿이 어리다고 느꼈던 것과 느낌이 비슷하다. 나는 이런 치기어린 행동들을 불편해하는 것 같다. 그것이 내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요즘 어린 것들은 안돼' 와 같은 것이 아니다. 난 7살 때부터 버스 줄을 새치기하는 교복 입은 형아들을 보고도 어리다고 했으니까...물론 시몽이 정직함과 동떨어진 인물은 아니다. 온전히 나의 불편 메커니즘이 작동한 동기가 치기어림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다. 시몽은 사랑을 하지 않아서 고독형을 선고하지만, 나는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 고독형을 선고한다. 그만큼 무뎌진다는 것이 괴로운 일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무기력증
그는 줄곧 손에 들고 있던 재떨이를 놓쳐 버렸다. 재떨이는 바닥에 나동그라졌지만 깨지지 않았다. 재떨이가 깨져 그를 이 무기력으로부터 끌어내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사방으로 유리 조각이 튀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재떨이는 깨지지 않았다.
[중략]
그가 물건을 깰 때마다 폴은 언제나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깨뜨린 것은, 위스키를 담으면 독특하게도 금빛 도는 적갈색으로 보이는, 매혹적인 크리스털 잔이었다. 그녀의 아파트에서는 모든 게 그런 식이었다. 그는 그 아파트의 신이자 주인이었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었고, 애정으로 가득했고, 조용했다. 그럼에도 그는 밤중에 그곳에서 나올 때면 해방감을 느끼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제는 자기 집에서 깨지지 않은 재떨이를 상대로 혼자 쓸모없는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다시 몸을 구부려 담배를 끄고, 잠 속으로 빠져들기 직전 자신은 지금 불행하다고 중얼거렸다.
P.144
폴이 로제와의 사랑에서 권태감을 느껴 괴로워했다면 로제는 그 권태감은 등한시하고 자신의 고독에 대해서만 괴로워했다. 이 작품에선 로제는 끝까지 자신의 못된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사랑은 변하는데 사람은 변하지 않는 걸까. 자신의 삶의 활력소로써 사랑을 이용해선 안된다는 것을 한 번 더 느끼게 되었다. 내 삶은 오롯이 나의 힘으로 꾸며야 한다. 사람들이 은연중에 생각하는 사랑은 너무나도 위대한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부차적인 것이다. 좋은 표현을 사강이 한 번 해주었더라. 두 번째 남편과 이혼하면서 한 인터뷰에서 “결혼이란 아스파라거스에 비니그레트 소스냐 네덜란드식 소스냐를 곁들이는 취향의 문제”라는 말을 남겼다. 내 인생 자체가 맛있고 먹고싶어야 그 소스를 뿌린 음식도 맛있을 것이다.
혼돈의 18장
모든 사람들이 그랬을테지만 이 책의 18장은 정말 충격이었다. 통속소설과 구분되는 내용은 여기에서부터였다.
폴은 시선을 들어 시몽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다음 로제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로제를 사랑하고 있었다. 식당 문 앞에서, 특유의 고집스러운 태도를 지닌 그를 보자마자, 그녀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익한 긴 잠에서 빠져나온 참이었다.
p.146
그녀는 좀 더 울고 싶기도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싶기도 했다. 익숙한 그의 체취와 담배 냄새를 들이마시자 구원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울러 길을 잃은 기분도.
p.149
그는 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중간쯤에서 몸을 휘청하더니 그녀를 향해 일그러진 얼굴을 돌렸다. 그녀는 한 번 더 그를 품에 안고 그의 슬픔을 받쳐 주었다. 이제까지 그의 행복을 받쳐 주었던 것 처럼. 그녀는 자신은 결코 느낄 수 없을 듯한 아름다운 고통, 아름다운 슬픔, 그토록 격렬한 슬픔을 느끼는 그가 부러웠다. 그는 갑자기 그녀에게서 몸을 빼더니 짐을 놓아 둔 채 나가 버렸다. 그녀는 그를 따라 나가 난간 너머로 몸을 굽히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시몽, 시몽." 그런 다음 그녀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이렇게 덧붙였다. "시몽, 이제 난 늙었더. 늙은 것 같아......."
[중략]
저녁8시,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그녀는 로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미안해. 일 때문에 저녁 식사를 해야 해. 좀 늦을 것 같은데......."
p.150
사실 18장을 펼치기 전까진 전형적인 통속소설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시몽이랑 만나든 로제에게 돌아가든 해피엔딩이겠네 라는 느낌이 좀 있었다. 하지만 결말은 통속소설과는 다른, 현실을 그대로 옮겨온듯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논리적이었다. 왜 그렇게 결말이 나야하는지 수긍이 되고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다. 가끔 나는 현실에 살면서 이상을 꿈꾸는데 그런 나의 이상을 즈려밟는 느낌이다. 항상 이상을 꿈꾸며 살겠지만 이런 팩트폭행은 너무나도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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