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굴뚝청소부_이진경 정리노트 (제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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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지배적인 사상 때문에 오히려 보이지 않고 사고되지 않게 된 것을 찾아내고 확보하는 투쟁이 바로 철학인 셈이다."


문제설정: 문제를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결론이 다르며, 나올 수 있는 화제도 달라진다.


1장. 철학의 근대, 근대의 철학(데카르트, 스피노자)


데카르트: 근대 철학의 출발점


중세

범신론: 신과 자연(우주)를 하나로 보는 입장

유명론: 일반적인 개념은 단지 사람들이 붙인 이름일 뿐


교부철학(플라톤): 인간의 인식은 그림장니 감각세계에서 이데아의 세계로 상승하는 것

스콜라철학(아리스토 텔레스): 이해하려면 믿어라. 믿음을 위한 요구를 확립하는 것이 바로 이성의 의무.


(감각에 대한)회의론자 등장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주장.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확실한 것-코기토, 수학적 진리, 도덕적 지혜 등등-은 그것이 개인 아닌 다른 확실한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진리는 초인간적인 것, 인간을 넘어서는 어떤 근원에서 나온다. 그는 이것을 인간의 내면적 교사인 그리스도라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코기토'는 이처럼 신의 존재를 확증하고 증명하는 출발점이었다.


근대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라는 존재를 신의 피조물로 본 중세적인 관점과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것.

데카르트에게 '확실한 지식'은 매우 중요.

방법적 회의: 확실한 것에 이르기 위해 의심, 회의라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


문제설정이 다르다. 신에 대한 인식을 목표로 믿음을 공고히 하고자 했던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데카르트는 '코기토'를 통해서 신이 아니라 확실한 지식에 이르고자 했다.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 이 능력이 인간 자신에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 즉 '타고난 관념', '본유관념'(innate idea)가 있다.

이성은 자연을 비추어 주는 빛이 되는 것.

나 혼자만의 힘으로 확실한 지식에 이를 수 있게 해주는 출발점. 과학의 기초를 마련해 줌.

'나'라는 주체는 신이 없어도 내장되어 있는 본유관념 때문에 확실하게 사고할 수 있고, 확실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존재. 따라서 신으로부터 독립된 '주체'


리바이어던. 세상은 철학을 만들고, 그 철학은 또 다시 세상을 만든다. 데카르트의 철학에 감명을 받은 홉스.

'주체'를 출발점으로 삼은 '주체철학'

주체라는 말에는 언제나 '객체'혹은 '대상'이 따라온다. 다른 피조물인 자연세계(대상)로부터 인간이 분리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럼으로써 다른 자연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이론이 나타남. 이것이 나중에 인문과학으로 발전.

인간이 대상과 분리되고 주체가 대상으로부터 떨어졌을 때, (인식하는) 주체가 (인식되는) 대상과 일치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주체가 대상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의 문제가 대두된다. 만약 대상에 일치하는 지식, 즉 올바른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면, 이는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말. 즉, 주체가 진리에 이를 능력이 없다는 것.

주체는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요, 진리는 그 목표점이다.


데카르트는 두 개의 실체가 있다고 가정한다. '연장'과 '사유'. 아무리 모습이 바뀌고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변함없는 불변적인 본질(특징)이 바로 '실체'다. 이는 다른 변화를 만들어내지만, 다른 것에 의존하지는 않는 영원한 특징. 연장은 물질·물체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공간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의미. 사유는 한마디로 생각하는 성질. 데카르트의 철학은 두 개의 실체를 가정하고 있다는 뜻에서 '이원론'이라고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데카르트에게는 생각(사유)이 존재(연장)보다 우선한다. 따라서 주체란 생각하는 나, 곧 정신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 정신이 육체나 물질보다 우선한다는 뜻에서 데카르트의 철학은 관념론이다.


주체와 대상, 정신과 육체가 일치하는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본다.

첫째, 이성의 타고난 완전성이란 테제이다. 이성의 타고난 능력(본유관념)은 완전한 것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 우리가 볼 수 있는 거라곤 모두 불완전한 것들 뿐인데도, 우리는 완전한 원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 다시 말해 사물이나 감각경험이 불완전하지만 인간의 이성은 완전한 것을 인식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 이런 맥락에서 수학이야말로 확실하고 완전한 지식, 즉 진리의 모델이라고 생각했다.

둘째, 이성이란 주체의 완전성과는 다른 차원에서, 대상세계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가? 데카르트는 그렇다고 말한다. 과학의 발전을 통해 대상적 진리, 즉 객관적인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경험적 지식의 불명료함을 씻고 분명하고 뚜렷한 판단(clare et distincte)- 이 말을 흔히 '명석판단한 판단'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우리말의 '명석하다', '판명되다' 와 전혀 무관하다. 데카르트 자신도 수학적 작업에 무척 많은 시간을 쏟았다. 직관에 의존하고 있던 기하학을 좀더 분명하고 뚜렷한 대수학으로 재구성하려 한다. x축과 y축 등으로 이루어지는 '데카르트 평면'이란 좌표평면 상으로 기하학을 옮겨 놓는다. 이런 방식으로 철학이 과학의 근거를 확실하게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대에는 어떤 지식도 자신이 과학적임을 입증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존재할 권리를 얻게 된다. 이런 사고방식을 한마디로 말해 '과학주의' 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정신과 육체의 일치(통일) 문제, 혹은 윤리학의 문제. 인간의 육체, 감정, 정념, 이러한 것들은 이성과 달리 절제할 줄도 자제할 줄도 모르고 굉장히 불안하다. 사람들의 삶과 직결된 문제가 바로 정신과 육체의 일치, 이성과 감정의 일치라는 문제로 제기된다. 이걸 흔히 '가치론', 윤리학', '도덕론'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데카르트는 학문을 커다란 나무에 비교한다. 그 뿌리는 형이상학(철학적 원리)이다. 그리고 줄기는 물리학이다. 줄기에서 뻗어나오는 가지들에서 의학, 역학, 도덕학 이런 열매들이 맺힌다고 한다. 그리고 도덕학이 이러한 것들 중 최고의 열매라고 한다. 데카르트는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알아야 하듯, 육체에서 파생하는 감정과 정념을 규제하고 그 힘을 조절하려면 감정과 정념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정념론』이라는 책을 쓴다. 어떻게 육체를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다루는 '도덕론'을 중요하게 여김. 감정과 정념, 욕망과 육체적 활동을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완전한 능력을 가진 이성이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이 도덕론이다. 영혼 속에 정념을 불러일으키고, 무언가를 욕망하게 만들고, 동시에 육체로 하여금 사물을 향하게 하거나 피하게 만드는 어떤 장소를 데카르트는 '송과선' 이라고 한다. 욕망에는 도달할 수 없는 것도 있으니 가급적 이성에 의해 통제되는 상태를 위해서 제멋대로인 육체를 통제하고 욕망을 억제하라는 것이 도덕론의 요체이다. 대중의 무지를 일깨우고 이성에 따라 행동하도록 하라는 윤리학적 계몽주의의 선구자였던 셈이다.


근대철학의 딜레마

두 사람(인식주체/대상)만으로는 내 얼굴이 어떻다는 판단과 실제 내 얼굴의 상태가 일치하는지 아닌지 호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난쏘공의 굴뚝청소부 이야기] 독립된 '나'라는 존재가 어떠한 존재인지 새로이 대답해야 한다. 이것이 '존재론' 이라는 철학의 분과를 만들어낸다. 예전에는 신의 게시에 의해 보증되었던 주체와 객체의 일치가, 신으로부터 독립함과 동시에 불확실하고 알 수 없는 게 되었다. 그리고 삶의 유일한 잣대였던 신의 계시 대신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재는 잣대가 필요하게 된다. 이것이 '가치론' 혹은 '윤리학'('도덕론')이다. 이리하여 데카르트 이래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이라는 근대철학의 세 가지 분과가 성립하게 된다. 또 하나의 딜레마로 '유아론의 딜레마' 가 있다.  유아론은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이 진리이고 진리는 주관적이다' 라는 견해로 나가기도 한다. 


스피노자: 근대 너머의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나름의 근본적인 비판을 수행했다. 우선, 존재론을 비판한다. 데카르트가 '주체' 라고 할 때, 그것은 적극적·능동적인 것이고, 자연의 다른 생물과는 다르게 사고하는 힘이 있으며, 그걸 이용해 자연세계를 지배하는 힘을 갖고 있다. 반면 '대상' 인 자연세계는 조용히 주체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 정적이고 수동적인 것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반자연주의' 다. 스피노자는 자연 자체가 수동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능동적이고 활기있는 것임을 주장했다. 둘째로 주체와 분리된 대상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두 개의 실체를 가정하는 데카르트를 비판하고, 실체는 오직 하나만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개념이나 지식은 실제 대상과 전적으로 다른 것이어서, 양자가 일치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셋째는 윤리학에 관한 것이다. 당시 '윤리학' 이란 말은 우리가 사용하는 것보다 그 범위가 훨씬 넓다. 단지 도덕에 대한 사고만이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이론을 포함하고 있다. 데카르트에게는 인간에게 자연적인 요소(육체)가 남아있다. 스피노자는 감정이나 욕망, 정념 등을 이성에 의해 억제하고 억압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옳은 것도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스피노자는 인간이 자연과 다른 어떠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임을 분명히 한다.


스피노자의 '자연주의'

스피노자는 무한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을 '변용' (modification ; 변형) 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변화된 모습 각각을 일컬어 '양태' 라고 한다. 양태는 다른 것(타자)에 의존한다. 스피노자는 자연 혹은 우주를 변화하는 존재로 생각한다. 이 우주 전체를 포괄하고 있으며, 그것의 변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바로 실체이다. 자기 자신이 바로 자기 자신의 원인인 것이다. 이것을 자기 원인이라고 부르고 '신' 이라고도 부른다. 스피노자의 '신' 이란 개념은 종교적인 절대자가 아니라 바로 자연 안에 있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요인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이것을 '범신론' 이라고 한다. "실체는 양태로 '표현'된다". 즉 "실체는 양태로서 존재한다"는 뜻이다. "개체의 본질은 양태다". 이 점은 라이프니츠와 상반된다. 라이프니츠는 "개체의 본질은 실체" 라고 한다. 모든 개체 각각이 그 내부에 고유한 힘을 가지며, 개체 각각이 실체라는 것이다. 개체 각각에 존재하는 실체를 라이프니츠는 '단자' (monad) 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라이프니츠의 경우에는 모든 개체가 곧 실체인 데 반해, 스피노자의 경우에는 개체란 실체의 변형된 모습이고 양태다. 실체는 이 양태의 근저에서 이 모든 양태들을 모두 싸안는 것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하나임에 반해 라이프니츠에게는 모든 것이 다 실체이기에, 실체는 무한히 많이 있는 것이다. 자연 안의 생산적인 힘, 그것이 바로 실체이다. 자연은 이 생산적인 힘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자연은 그 외부에 있는 어떤 무엇에 의해 창조된 게 아니라 자연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는 자연을 '산출하는 자연' (natura naturata ; '소산적 자연') 이라고 한다.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자연이라는 뜻이다. 자연이란 능동적인 힘과 수동적인 힘의 결합체이다. 자연에 공존하는 이 두 가지 상반되는 힘을 통해 스피노자는 자연을 '생성' 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인간은 이런 자연의 일부이다. 근대적인 '반자연주의' 에 반대하는 것이며, 오히려 들뢰즈가 '자연주의' 라고 부를 수 있었던 그런 관점이다.


진리와 공리

스피노자에게 '신' 이란 공간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즉 연장을 가지고 있는 자연 그 자체인 것이다. 실체는 이 속성들을 통해서 '표현' 된다고 한다. 다른 속성(차원)의 것으로 두 명제가 나타날 수 있다. 이 양자는 분명히 서로 다른 명제이지만, 그것만큼이나 동일한 실체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일치하고 있는 셈이다. 즉 그 양자가 동일한 것을 표현하는 것인 한 그 본질에서는 당연히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데카르트를 당혹케 한 '일치' 의 문제가 스피노자에게는 아예 발생하지도 않는 것이다. '"개라는 개념은 짖지 않는다" 라는 유명한 말은 이런 맥락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연장이라는 측면에서 본 개(현실적인 개)와 사유라는 측면에서 본 개('개' 라는 개념), 아까 원의 면적과 길이에서 보았듯이 다르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의 2부에서 "진리가 진리와 허위의 기준이다" 라는 정리를 제출한다. 비유하자면 '빛이 빛과 어두움의 기준이다' 라는 말을 한다. 빛과 어두움 외부에 있는 제3자에 의해 구별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리가 진리 자체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앞서 말한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면 그걸 자기 얼굴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하는 질문에서 스피노자는 그런 판단을 하려면 내 얼굴에 대해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인식을 통해 '진리' 에 이르려는 근대적인 주체에게 그건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출발점임을 가르쳐 준다. 즉 인식에 이르려면 이미 '진리' 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무의식' 의 윤리학

스피노자는 욕망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연구하려고 한다. 이런 관심을 다루는 것이 '윤리학' 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육체와 영혼으로 나누어지며 이 양자는 서로 합일적(통일적)이라는 것이다. 육체와 정신을 모두 힘으로 정의하며 '힘' 을 가장 중요한 원리로 설정하고 있다. 육체와 정신의 결합체로서 인간에게는 양자를 합일(통일)시키려는 코나투스(conatus)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어떤 상태를 '지속하려는 힘' 이라고 한다. 이 힘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체의 양태인 모든 것들, 즉 모든 개체들에 다 있다고 한다. '관성' 이 이런 힘의 대표적인 것이다. (국역에서 노력으로 번역되는데, 그것을 틀리다. 예컨대 코나투스는 '관성' 처럼 의식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어떤 '힘' 을 가리킨다) 인간에게도 육체와 영혼을 일치(합일)시키려는 힘이, 즉 코나투스가 있다고 말한다. 예를 빌리면, 넥타이를 매고 강단에 섰을 때와 운동화를 신고 공을 하나 들고 운동장에 서 있을 때의 정신적 힘(mens)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신적 힘은 육체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그에 맞추어 변하며, 반대로 정신적 상태에 따라 육체가 맞춰 변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코나투스가 정신과 관련되면 '의지' 라고 불리고, 육체와 정신에 동시에 관련되면 '욕망' 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코나투스 개념은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기氣란 개념을 서양철학의 언어로 이해하는 데 가장 근사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따라서 데카르트라면 당연히 이성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할 이 '욕망' 이 스피노자에겐 바로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게 된다. 욕망 역시 하나의 '양태' 로서 타자에 의존한다. 엄밀히 말하면 '유한양태' 라는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 스피노자에게 유한하다는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한다는 것과 동일하다. 인간의 욕망은 다른 인간과의 특정한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즉 인간관계(욕망을 만들어내는 조건)를 바꿈으로써 욕망 자체를 전환시키는  게 훨씬 더 현실적으로 중요한 게 된다. '코나투스' 란 일종의 '무의식' 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스피노자의 '무의식' 은 일종의 생체무의식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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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선

경제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만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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