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평: 불륜(본능)의 불가피함을 아름답게 묘사한 그림 같은 작품 (★★★★☆)
불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벗어났다는 의미이다. 사전적 의미는 굉장히 포괄적이지만 주로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사회적으로 인정 받지 못하는 만남을 불륜이라고 일컫는다. 과연 불륜은 비난받아 마땅한가? 우리 모두 불륜과 상관 없는 존재인가? 불륜을 단순히 악한 행동이라고 여기던 사람들은 이 책을 꼭 읽어보길 권한다. 그리고 불륜을 꿈꿨던 사람들에게도 위로의 마음으로 권한다.
1. 각인
알에서 갓 깨어난 오리는 대략 12~17시간이 가장 민감하다.
오리는 이 시기에 본 것을 평생 잊지 않는다.
박시룡, '동물의 행동' 중에서
이 책의 서두에는 이런 글이 인용된다. 오리가 어릴 때 각인된 것을 평생 잊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인간도 이처럼 어릴 때 평생 잊지 않을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나의 경우엔 나의 웃음에 대한 칭찬이다. 어릴 때 뚱뚱해서 웃으면 눈이 자연스레 사라졌었다. 그 모습을 보는 동네 아저씨, 아줌마, 가족들 모두 그 점을 칭찬해주셨다. 그것이 각인되어 지금은 눈을 감지 않고 웃을 수 있지만 습관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그렇게 웃는다. 아무래도 남에게 사랑받고 싶은 본능이 나를 그렇게 시키나보다.
그래서 성인이 되고 이 부분을 비판 받았을 때 정말 괴로웠었다. 여자친구가 아무한테 웃어주지 말라고 정말 자주 얘기하고 그거 때문에 크게 힘들어 했던 경험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분의 욕심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지금은 그 당시처럼 자주 웃지는 않는다. 그 분 덕에 나는 내 감정에 좀 더 솔직해졌다. 그러나 그만큼 잃은 것도 있으니 고맙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2. 시간을 두고 오다
십오륙 년 전에, 여학교를 졸업하고 이 고장을 떠나면서도 나는 그 수돗가에서 손을 씻었습니다.
그 이후로 이 고장에 내려오거나 다시 이 고장을 떠날 때마다 저는 그 수돗가에서 손을 씻었습니다.
(중략)
그 자리에서 손을 씻고 이 고장을 떠나가면 이 고장에서 잇었던 일들을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랬을까요?
글쎄, 그건 단순히 이루어진 습관이었을까요?
그날, 그 수돗가에 손목시게를 벗어 두고 온 것을 집에 돌아와서야 알았습니다.
그 노란 시게는 당신이 주신 것이었지요. (p.14)
필로소피아 현대문학 스터디에서 어느 한 친구가 이 부분이 불륜 상대와의 비극적 결말을 예측하게 해주는 복선이라고 했다. 처음 읽을 땐 너무 초반부라 인물간의 관계가 정확치 않아 넘어갔었지만 다시 보니 정말 그렇다. 그런데 그 사람과의 절연을 시계를 즉 '시간을 두고 왔다' 라는 말로 표현하였다는 것이 너무 아름다웠다. 관계의 기억이 시간으로 대표되었고 그 시간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고 온다고 표현하였다. 작가의 표현력에 정말 감탄하였다. 그리고 불륜이라는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행동이 개인에게 이렇게 소중할 수 있다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정말 고민된다. 미래의 아내에게 미안하지만, 난 이런 상황이 다가온다면 어떻게 하겠다고 섣부르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3. 양자택일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제 말이 모두 당신에게 오리무중일 것만 같으니.
점촌 아주머니를 혼자 살게 한 점촌 아저씨의 그 여자,
그 중년 여인으로 하여금 울면서 에어로빅을 하게 만든 그 여자……
언젠가, 우리 집…… 그래요, 우리 집이죠…… 거기로 들어와 한때를 살다 간 아버지의 그 여자……
용서하십시오……제가……바로, 그 여자들 아닌가요? (p.44)
나 자신이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존재가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누구나 타인을 아프게 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 행동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내 눈에 보이는 상황이라면 정말 괴로울 것이다. 내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한다는 것.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직 그런 경험이 없다. 내 주변과 관계가 있는 사람은 기피하게 되는 이상한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상황이 주어진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정말 어렵다...
4. 그 여자
……그 여자처럼 되고 싶다……
이것이 제 희망이었습니다.
(중략)
그 여자는 우리 집에 살기 시작한 지 열흘 만에 큰오빠만 빼고 모두를 끌어안아 버렸어요.
백일이 갓 지난 울 줄 밖에 모르던 그네 속의 막내 동생까지요.
그 여자의 손이 닿아 제일 먼저 화사해진 게 아기그네였습니다. (p.46)
맞습니다. 그 여자가 제 인상에 각인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여자가 저를 알아봐 줬기 대문이에요.
당신을 처음 만난 그날, 느닷없이 내리는 비를 맞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여러 여자들 중에서 감기를 앓고 있는 여자가 바로 저라는 걸 알아줬던 것처럼 말이에요. (p.62)
5. 나처럼은 되지마
아, 그때 그 여자의 얼룩진 얼굴이라니.
눈물에 분이 밀려나서 그 여자 얼굴은 형편없었어요.
칫솔을 내밀자 그 여자는 웃을락말락 했습니다.
그 여자는 내 손에 있는 칫솔을 가져가는 게 아니라, 손을 그대로 꼭 잡았습니다.
그리고선 제 눈을 깊게 들여다봤어요.
나…… 나처럼은…… 되지 마. (p.74)
이 책에서 가장 인상에 깊이 남은 부분이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여자의 상심과 고통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비슷한 경험이 있어 더 공감이 되었을까... 꼭 아픔을 아는 사람과 만나고싶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나는 그 여자와 같은 사람이 좋다.
6. 일상 속 행복
아버지는 그 여자를 정말 사랑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여자가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들어오면 손크림을 발라 주셨지요.
왜 그것만이 유난히 생각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아버지의 손과 그 여자의 손이 전혀 스스럼없이 서로 엉키는 것이 꼭 꿈결인 것만 같았어요.
손크림을 통에서 찍어 내 그 여자의 손에 골고루 펴 발라 주실 대 아버지의 그 환한 모습을,
그 이후에도 그 이전에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p.86)
아름답다. 이런 소소한 것이 지금은 어찌나 크게 느껴지는지. 이런 소소한 행동을 하고싶고 받고싶은 것을 보니 연애를 하고 싶은가보다.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7. 행복을 놓친 아버지
그 여자가 우리 집을 떠나고 나서 아버지는 오랫동안 술에 취해 계셨습니다.
아무 데나 마구 토해서 부축할 수도 없었어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환했던 때는 그 여자가 있던 그 시절이라고 생각됩니다. (p.90)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보고도 결국 화자는 그 여자처럼 포기한다. 가장 환했던 모습을 자신도 놓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는건데...
8. 맺음말
나는 선택장애가 없는 편이다. 모든지 선택하길 원하고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말 이런 상황이 닥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책임을 배신하고 행복을 택할까? 불행과 함께 책임을 선택할까? 정말 어렵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