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평: 저자의 니체에 대한 열등감이 느껴진다. (★★☆☆☆)
열등감에 빠진 사람들은 특히 눈에 띈다. 자신의 존재를 알아달라는듯이 말이다. 그리고 자신을 열등에 빠지게 한 사람, 물건, 사념을 닮아간다. 철학 학원 칸트의 원장인 나카지마 요시미치는 칸트주의의 프레임으로 실존주의의 니체를 비평한다. 그러나 글이 이어질수록 칸트의 인간관은 사라지고 니체의 인간관만이 남아있다. 게다가 저자는 이미 이 글을 쓸 때 니체의 인간관에 집중하여 쓰려고 했었다. 자신이 인간적으로 싫은 유치한 니체 철학의 위대함을 인정한 것이다. 다시 한 번 니체의 위대함을 느낀다.
1. 약자는 비판에 익숙치 않다.
강자는 어디서나 항상 비판을 받고, 또 그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약자는 모두가 종기 다루듯 조심스레 대한다.
그로 인해 약자는 확실한 비판을 한 번 받으면(즉, 진실을 들으면) 깜짝 놀라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게 된다.
그러니 약자는 더욱 제멋대로 설치며 반성하지 않는 것이다.'(p.34)
대화를 해보면 상대가 강자인지 약자인지 느껴진다. 나만의 능력이 아니라 어느 정도 사회 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이 글에선 비판을 받으면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고 했지만, 난 반대로 목소리가 커지는 사람들을 주로 봐왔다. "너만 생각하냐 나도 생각하고 내 생각도 중요하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사실 맞다. 철저하게 비판받아 마땅한 상황에서 비판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지적하는 부분은 약자는 비판에 단순히 예민하게 반항하는것 처럼 당황하고 그에 대한 대처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의 약자는 사회적 약자라기보다는 평범한 대중을 의미한다. (자세한 내용은 책에서) 그래도 글의 이해를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남들이 가는 길을 평탄하게 걸어온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평범한 대중이고 약자다. 비판을 받았을 때 눈이 떨리고 침이 마르고 심장이 쿵쾅거리는가? 긴장되고 불안한가? 그런 사람들이 약자다. 강자는 비판을 즐긴다.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강자다. 필로소피아 독서토론에서 0~10점(10에 가까울 수록 강자) 중 몇으로 하겠느냐는 질문에서 7이라고 대답했지만(대부분의 사람들은 극에 치우친 사람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사실 속으로는 나는 10점이라고 생각했다. 맞다 나는 철저하게 강자다. 남들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것을 향유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그에 따르는 책임 의식은 항상 가지고 있다.(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향하는 비판을 즐긴다. 나에 대한 비판은 자연스레 나 자신에게 의문을 가지고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것이 얼마나 나를 성장시켜줄까? 이 생각 자체만으로도 나는 벌써 즐겁다. 대답은 이미 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것이다. 물론 이 인용구의 태도는 별로 달갑지 않지만 비판을 즐기라는 말을 하고싶었다.
2. 자기기만(mauvaise poi)
온몸에는 "약하니까 어쩔 수 없다"는 화음이 울려 퍼진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비판하는 의견에는 거세게 덤벼들고, 조금이라도 위협이 되는 의견에는 귀를 닫는다.
사르트르 식으로 말하자면 끊임없이 스스로를 속이는 자기기만에 빠진다.
게다가 이 모두를 거의 무의식적으로 해치운다.
그리하여 선량한 시민의 몸속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불투명한 침전물이 쌓인다.
그것은 단단한 덩어리가 되어 그들의 사고를 마비시키고 문제를 문제로 느끼지 못하게 한다.
아니, 더욱 악질적이게도 자신의 안락과 이득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한,
떤 문제에 대해서도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자세를 취하게 한다. (p.48)
대중의 특성을 간략하게 설명하라고 하면 이정도일 것이다. 26살, 사회에서 어린아이 취급을 받지 않을 나이가 되었고 '어른이 되어야지' 라는 말을 하는 친구들도 많이 줄고 이미 다들 세속적인 어른이 되었다. 내가 느끼는 한국 사회에서 '어른이 되어라' 라는 말은 '대중이 되어라' 라는 말과 같게 느껴진다. 조금이라도 risk를 취하려고하면 '너가 아직 어리구나' 라는 말을 들어야 하고 안정적인 직업에 안전지향적인 성격을 지녀야만 아빠가 될 준비가 되었구나 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이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저 논리가 이해되고 그것이 이상인 사회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게 정말 풍요로운 인생일까? 마침 영화 'kill your darlings'의 한 대사가 떠오른다.
폭 넓게 살때만이 인생은 흥미롭지
데인 드한(루시엔 카 역)
3. 착하게 살라는 가르침의 희생자
아이들의 집단 따돌림에서 가해자의 비열함은 철저하게 추궁해야 한다.
그러나 따돌림의 표적이 된 사람에게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그들이 나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현대 일본을 지배하는 착하게 살라는 가르침의 참된 희생자다. (p.55)
내가 중학생 때 동네에 있는 '종로엠스쿨'이라는 학원을 다녔었다. 그곳에 학교에서 왕따 자연스레 학원에서도 왕따인 소심한 남자 아이가 있었다. (이름이 일주?) 첫인상은 평범한 안경잡이의 조용한 아이었다. 그래서 다가가서 말을 걸고 인사를 했는데 반응이 냉담했고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당시엔 그게 꽤 불쾌했고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집에 돌아와서 그 이야기를 엄마에게 했더니 시큰둥 하셨다. 그리고 솔직히 그 아이가 왕따 당해도 싸다고 얘기를 했었다. 이유는 소심하고 못생겼고 불친절하고 등등이었다. 시큰둥 하시던 엄마는 그 얘기를 듣고 엄청나게 화를 내시고 다음부턴 그렇게 생각해선 안된다 잘못된 생각이다라고 훈계를 받았었다. 사람을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행동은 잘못 되었다. 글에서처럼 따돌림의 가해자는 도덕적이든 인격적이든 크게 문제가 되고 잘못했다. 그런데 그 당시에도 그것은 이해가 되었지만 왕따를 당하는 아이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말은 끝까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곱씹어봐도 그 아이는 따돌림을 당하기 좋은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착하게 살라는 가르침의 희생자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는 공동체주의가 강한 국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을 더 하등하게 바라본다. 그러나 분명히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람마다 성격은 모두 다 다르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공동체가 개인보다 우선시 되는 의식구조는 참 아이러니하다. 제도가 바뀐다고 의식이 뒤따라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자유에 대해 고찰한다면 더 많은 이상을 현실로 끌어올 수 있을텐데...
4. Amor fati
운명애란 나를 덮친 일과 내가 일으킨 일 사이의 간극이 몹시 작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한다.
나를 덮친(듯이 보이는) 일이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관련되어 있고,
내가 일으킨(듯이 보이는) 일이라도 그 밖의 무수한 요인과 관련되어 있다.
(중략)
운명애란 실천의 문제이기도 하다.
즉, 사태의 진짜 원인을 전혀 모를 경우, 위와 같이 인식함과 동시에 내가 한 모든 행동에서 나를 제외한 다른 원인이나 미지의 원인을 늘어놓으며 책임을 회피하지 말고 그 일을 내가 스스로 의지했다고(일으켰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p.109)
'내가 한 게 아닌데 왜 해야 하나' 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그런 친구들에게 항상 이 이야기를 해주거나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착한 사람들은 이것을 토대로 노예가 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라는 것이지 자신의 존재를 하찮게 여기라는 것이 아니다. 제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았던 친구들은 저 말을 빌미로 헌신을 요구하는 꼰대로 나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5. 새빨간 호의
착한 사람은 거리낌 없이 호의를 흩뿌리는데, 사실 이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들의 호의는 개별적인 상대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을 연구하여 베푸는 호의가 아닌, 모든 사람의 호감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 호의다.
따라서 이는 조잡하고 억지스러우며 모두가 분명히 좋아해줄 것이라는 계산이 깔린 오만 방자한 호의다. (p.123)
아무렇지 않게 가식을 깔고 시작한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웃으며 인사하고 반기는 것이 예의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행동하고 이후에도 이 습관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이건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지만 굳이 적극적으로 나를 고립시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동은 습관처럼 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너무 좋다.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궁금하고 그것을 알아 나가는 행동 자체가 즐겁다. 그리고 그 사람을 알아갈수록 나와 비슷한 사람인 사람에겐 끌린다. 남자든 여자든 나와 비슷한 사람은 정말 반갑고 애착이 간다. 주변에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적게 그런 친구들이 있다. 표현은 안하지만 항상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고 사랑한다. (동지애의 느낌으로)
6. 여자도 사람이다
여자는 다른 여자에게 엄격하다.
언뜻 보면 남자들이 여자를 사이에 두고 싸우는 것 같지만, 그것은 태양 아래의 밝은 싸움이다.
강한 남자를 얻기 위한 여자의 싸움은 훨씬 음산하고 치열하다.
거기에는 온갖 속임수와 책략과 덫이 있다. (p.148)
분명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는 사실을 이런 부분에서 느낀다. '여자의 적은 여자다' 라는 말을 종종 보고 듣게 된다. 아니라는 일부 여자의 의견도 있지만 공감하는 사람도 주변에서 종종 본다. 근데 나는 남자라서 남자의 경우밖에 모르겠다. 남자는 그런 암투는 굳이 벌이지 않는 것 같다. 굳이다. 왜 굳이 벌이지 않을까? 왜 여자는 암투를 벌이고 남자는 동성간의 싸움을 드러낼까?
이것이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부분일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보다 후천적인 부분이 사고에 더 크게 관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근원을 모르겠는 이미지가 분명히 존재한다. 남자는 싸워서 승리하면 승리를 쟁취하는 멋진 사람이 된다. 하지만 여자가 싸워서 승리하면 욕심 많은 사람이 된다. 이 기저를 나는 찾지 못하겠다. 다만, 이것이 여자들이 암투를 벌일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나의 이 의문에 시원한 답을 주었으면 좋겠다.
7. 저자의 유약함과 열등감
니체는 결코 혼자서 현실적으로 여자를 얻는 평범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부터 그는 성취할 가능성이 없는 여자를 점찍은 뒤 계획대로 차이는 것이다.
여자에 대해 자신감이 전혀 없는 남자로서는 상처를 최소한으로 끝낼 가장 현명한 방법이 아닌가? (p.158)
정말이지 너무 많이 갔다고 생각한다. 완벽하고 누구나 사랑하는 여자를 사랑하고 고백하는 행동은 용기가 무척 필요한 것이다. 저자의 니체에 대한 해석은 정말 유치하고 근거가 약하다. 저자는 니체의 인간학이라며 그것을 인용하여 자기주장을 하고 덧붙여 니체를 인간적으로 까내린다. 그리고 자신이 멋대로 사는 삶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글로 쓴다. 은둔 성향이 짙은 것은 본인도 심각한데 니체의 그런 성향을 비난한다. 철학을 한다는 사람이 자기 성찰이 너무나도 부족한 것이 아닌가? 2ch의 비난을 일삼는 어리석은 신형 약자들과 저자는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8. 강해져라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며 양보하지 않는 것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편이 고귀하다.
자신이 옳을 경우에는 특히 그러하다.
다만 그럴 만큼 넉넉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 '독사에게 물린 상처에 대하여'
고귀한 자는 남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경고한다.
고귀한 자는 번민하는 모든 사람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도록 스스로에게 경고한다.
(중략)
나는 고뇌하는 자를 도운 손을 씻고 영혼까지 깨끗이 닦는다.
왜냐하면 고뇌하는 자의 고통에 찬 모습을 보았을 때 그의 수치심 때문에 부끄러웠기 때문이며,
또 내가 그를 도와 주었을 때 그의 긍지를 심하게 상처 입혔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햇다' 제2부, '동정하는 자들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는 내가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책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이 너무나도 강렬했고 위험하고 내가 두려워하는 책이다. 책을 두려워 한다는 것을 남들이 들었을 때 우스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두렵고 무서운 책이다. 요즘 주변에 추천을 하고 있는데 잘 하고 있는 행동인지도 의문이다. 가능하면 올해 이 책과 다시 맞서고 싶다.
위의 글귀처럼 살아야 한다. 내가 잘 못 하는 부분이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완전히 부정 당하기 직전까지 밀고 나가기 때문이다. 아마 빈 수레이기 때문에 그런 자잘한 것에 더 집착하는 것일 것이다. 계속 노력하자. 니체가 말하는 강함에 가까워지고 싶다. Übermensch는 현재 나의 이상이기 때문이다.
9. 니체와 엘리자베트
독일어에 도플갱어(doppelgänger)라는 단어가 있다.
언제나 자기 곁에 있으며 자기와 함께 걸어가는 자라는 뜻이다.
굳이 번역하자면 제2의 자신, 자신의 분신이다.
또는 융의 말을 빌리자면 자각적 자신인 아니무스(animus)를 보완하는 무자각적 자신인 아니마(anima)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p.248)
나는 아니무스로 행동하는가? 아니마로 행동하는가? 둘 다 나이지만 진짜 나는 무엇일까? 프로이트와 칼 융에 대해 공부하고 싶게 만드는 구절이었다.
10. 끝내는 말
이렇게 길게 쓰고 싶지 않았다. 사실 이런 긴 글이 더욱 더 많이 나에 대해 되짚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는 되지만 글을 가벼이 보는 세상에서 읽히기를 기대할 수 있는 글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곳에 글을 남들이 읽기를 목적한 것은 아니다. 나 개인의 반성의 시간인데 그래도 남들이 가벼이 읽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은 것도 나의 목적이다. 하고 싶은 말을 많이 줄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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