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완독하지 않고 쓰는 잡설입니다.
들뢰즈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에겐 김상환 교수님의 들뢰즈에 대한 강연(https://openlectures.naver.com/contents?contentsId=132094&rid=2933)을 추천드립니다.
참여하고 있는 동아리에서 들뢰즈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다는 자신감 하나로 토론을 진행하려고 했다. 그것은 마치 돈키호테가 적이 아닌 풍차를 적이라고 생각하고 전의를 불 태우던 것과 같았다. 겨우 실존철학을 쉽게 풀어낸 몇 권과 카뮈와 니체의 책을 읽어본 경험만으로 들뢰즈의 철학을 서술해놓은 책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매우 부족했다. 그러나 일부 이해한 것만으로도 이 사상이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고 그것이 우리 사회에 어떠한 순기능으로 작용할 수 있을지를 상상하기만 하여도 전율이 느껴졌다. 최근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마주하면 많은 사람들이 들뢰즈를 알지는 못하지만 이 사상을 누군가가 퍼뜨리고 있고 그것에 전염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따르는 부작용을 나는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가까운 미래의 사상은 들뢰즈의 철학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래는 토론을 하기 위해서 준비했던 들뢰즈의 철학에 대한 요약입니다.
토론으로 연결되지 못하여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나중에 시간이 남았을 때 들뢰즈를 재도전하기 위해 남겨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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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철학(서동욱)을 읽고 쓴 요약(책 내용의 20%)
x란 무엇인가?와 같은 개념의 재현을 묻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는 보편성을 물었지만
이념의 드라마화
이념이란 것은 특정할 수 없으나 boundary는 있는 것.
그런 이념을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와 같이
구체적인 질문을 해야 하는 것이다.
ex: 삶
삶이 무엇이다 라고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틱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동일자의 반복이 과거의 것이라면
차이를 산출하는 반복을 제시한다.
사유를 뒤집은 것이다. 기존의 스타일로부터 새롭게
과거엔 정답이 있는 것처럼 서술했다.
그 정답을 따르도록 애썼으나 사실 삶의 지평에 정답은 없다.
개별적으로 다 다른 것인데 과거엔 이데아를 실현하도록 애를 쓰게 했었다.
그러나,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매번 다른 삶들이 있는 것이다. 삶은 연극이다!
그것이 들뢰즈.
삶을 구제한다. 긍정한다.
들뢰즈의 철학은 철학사의 그동안의 사유방법을 바꾸어버렸다.
경험세계, 의식 (표상적) 에서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사고했었다.
이러한 경험세계를 설명하고자 한 사람들이 그동안의 철학자.
들뢰즈는 경험이 가능하게 한 조건인 경험 이하의 세계를 찾고자함.
경험 이하의 세계=발생적 조건.
즉, 경험하기 위한 근거를 찾고자 했다.
경험세계 바깥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경험 이하의(내재된) 세계에서 찾고자 했다는 전환점이 있다.
통상 생각하는 차이=동일성에 종속된 차이=개념적 차이
일반으로서의 사과(=보편자)
우리는 개념의 상태에서의 차이를 보통 생각한다.
진짜 궁금한 것은 this와 this의 차이다.
보편비교가 아닌 실재끼리의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과와 배의 차이를 알려면 어떻게 비교할 것인가?
과일이라는 류에서 차이를 가져야 함.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by아리스토텔레스)
동물류>포유류>개or인간or등등
인간이라는 종이 생각하는 동물(공통된 동일성)이라는 것이다.
공통된 동일성에서의 차이로 정의한 것.
동일성에 종속된 차이인 것이다.
인간이라는 이데아(by플라톤)
인간1, 인간2, 인간3 ....
가지계=이데아(고정불변, 영원)
가시계=인간1, 인간2, 인간3...(모방한 것, 본질을 닮은 것)
인간의 종류가 차이가 난다.
얼마나 이데아를 잘 따르느냐에 따라 존재론적인 위계가 달라진다.
가장 잘 닮은 것을 이상으로 본다.
그런 인간을 그린 것=모방한 것을 모방한 것
본질로부터 굉장히 먼 것=시뮬라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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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란 무엇인가?
초월론적 경험론의 근본 직관
사물이란 무엇인가? =시뮬라크르
세계랑 무엇인가? = 알, 달걀
사유란 무엇인가? = 분열적 코기토
가장 탁월한 상태, 최고의 활력 속에 놓여 있는 사물=시뮬라크르
플라톤 전통에선 단일한(우상) 하나를 유지하는 것이 건강한 것임
1. 들뢰즈는 하나에 붙들려 있으면 좋지 않은 상태임
존재론적 탁월한 상태는 끊임없이 자신의 형상을 바꿀 수 있어야 함
허상에서 트랜스포머로
유기체에서 비유기적 생명으로
형식의 위력에서 질료의 위력으로
2. 들뢰즈에게 본래의 생명은 비유기적인 것임
유기적인 조직은 마치 개념에 갇히는 것처럼 제한, 억제, 부자유를 의미
3.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생명체든 어떤 종류의 사물이든 형식과 질료의 결합체로 이해했었음. 다만, 형식적인 측면에 더 중점을 둠.
들뢰즈는 질료에 중점을 둠.
근본적인 에너지, 질료에서부터 형식적 조형력이 자라나는 것임.
그러한 형식적 조형력을 '잠재성', '초월론적인것' 으로 바라봄.
"세계는 알이다"
닭에 해당하는 것이 현상계, 일상적 경험의 세계이다.
그 안에 알이 있다.
노른자는 생물학에서는 세포핵, DNA라고도 부름. 유전정보가 있음
닭은 노른자에 있는 유전 정보가 구체적으로 발현된 것임.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노른자가 초월론적인 장, 초월론적인 평면, 잠재성, 강도 0 등 여러가지로 표현할 수 있음.
흰자는 노른자에 대해서 이중적인 관계에 있음.
1. 노른자의 발생 원천
2. 노른자에 담겨잇는 유전정보, 초월론적인 요소들, 형식적 조형력
이런 것이 병아리로, 닭으로 분화될 때 재료가 되는 것임.
형식적인 원리들, 요소들이 세포질 속에 구현되고 분화됨
들뢰즌 흰자위에 해당하는 것을 강도 intensity라고 부름.
1. 동적발생=노른자가 생겨나는 과정
2. 정적발생=노른자에서 병아리가 태어나는 과정
동적발생은 무의미하고 비연속적이고 파편적인 자극의 세계인 강도의 질료의 세계에서 초월론적인 평면(=형이상학적인 평면)이 성립되는 것이다.
정적발생은 초월론적인 평면에서 경험적인 세계가 성립하는 과정.
정적발생이든 동적발생이든 언제나 세 단계의 리듬이 있다.
연결적 종합-연접적 종합-이접적 종합.
connection-conjunction-disjunction
초월론적 평면은 이접적인 종합에 의해서 성립한다.
인식 능력으로 보면 순수사유, 추상적 사유, 이미지 없는 사유가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사유란 무엇인가?'
분열적 코기토인데, 이는 생식적이다.
플라톤은 우리의 사유가 '상기' 라고 한다.
태어나기 이전에 가졌던 앎을 되살리는 것.
데카르트는 우리에게 본유적으로 주어진 것을 회복하고 올바르게 적용하는 것이 양식이고 올바른 사유라고 했다.
아르토는 사유는 상기도, 본유성에도 기반한 것도 아니다.
정말 사유, 창조적인 사유, 그것은 사유 속에 사유를 낳는 '생식적 사유'
들뢰즈는 이런 아르토의 의견을 차용함.
두 번째로, 분열적 코기토는 추상미술의 혁명에 부응하는 사유다.
추상미술은 형상의 차원을 떠난다.
모든 형상의 기본, 나타남의 기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
나타남 일반의 논리와 관계하고자 하는 것.
이미지 없는 사유는 추상미술
세 번쨰로, 칸트에 대한 들뢰즈의 정말 독창적인 해석이다.
들뢰즈는 숭고 판단, 숭고 체험에서 그 사례를 찾는다.
숭고란 무엇인가?
거대한 자연의 크기 앞에서 맛보는 좌절에서 시작한다.
상상력으로 총괄할 수 없는 막대한 크기,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크기 앞에서 자신의 무력을 느끼고 좌절하면서 시작한다.
좌절에서 끝나면 아무것도 아닌데 여기서 어떠한 반전이 일어난다.
모든 감성적 제약을 넘어서게 된다.
들뢰즈식으로 하면 사유 속의 사유가 일어나는 것이다.
칸트식으로 하면 새로운 공통감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인식 능력들 간의 모든 조화가 다 깨져서 적나라하게 배타러적인 본성들 간의 갈등, 투쟁이 일어나는 가운데 다시 새로운 일치가 일어나는 것이다.
상상력과 이성 간의 일치가 일어나는 것이고, 이 일치는 불일치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들뢰즈는 (칸트를 잘못 계승했다고 들뢰즈가 바라보는)독일 관념론과 다른 방식으로 초월론적 철학을 완성하겠다는 희망, 포부를 가졌다.
출처: 들뢰즈와 철학의 귀환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열린연단 강의
초월론적 경험론
이것의 고유성은 체계, 새로움에 대한 관심으로 두 가지다.
체계: 합리론의 전유물이었지만 칸트 이후의 독일 관념론이 뼈대이다.
들뢰즈는 사유 구조의 실천적 의미는 '규정'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
우리의 삶을 구속하는, 또는 억압하는 규정성 그 자체에서 벗어나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놓는 것.
미래의 시간이 더 근본적임. 모든 것이 파열 속에서 실현되는 어떤 분열적 시간으로 보아야 하는 것. 미래의 시간은 압도적이고, 숭고하고, 비극적임.
감성=직관
지성=개념
but 이성=사유의 방향을 설정하는 관심의 능력이다.
이 '관심'은 지성의 논리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희망'에 의해 향도되는 것.
칸트: 합리론과 경험론 이용. 합리론은 차이를 청소의 대상으로 본다. 이질적이고 혼란스러운 쓰레기로 여김. 반면 경험론은 개념에 묶여 있는 상태를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간주. 활력을 잃어버린 상태로 받아들인다.
들뢰즈: 경험론의 일종. 초월론적 경험론은 일반자의 주위를 맴돌던 개체를 중심으로 옮겨놓는다. 그리고 일반자로 하여금 주위를 맴돌게 만든다. 들뢰즈는 (푸코, 데리다와 더불어)현대 차이의 철학을 대변하는 위치
관심이나 희망의 수준에서 여타의 경험론고 구별되는 것.
하나는 체계에 대한 관심, 하나는 새로움에 대한 관심이다.
체계: 체계에 대한 구축은 합리론 전통의 전유물로 알려져 있으나, 초월론적 경험론은 독일관념론과 겨루며 거대 규모의 체계를 준비한다.
그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서양 철학사의 산맥 전체를 자신만의 힘으로 뒤바꾸어놓는 괴력의 소유자이다. 또한, 들뢰즈는 고전적인 문헌에 정통한 철학사의 대가였다. 과거 철학사를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에서 재구성해낸다는 점이다. 과거의 문헌을 절묘하게 해부한다는 점에서 데리다와 유사하다.
새로움: 나는 얼마만큼 달라질 수 있는가? 독창성이란 무엇인가? 과거의 철학은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라고 물었으나, 초월론적 경험론은 "나의 앎은 어떻게 새로워 질 수 있는가?"이다.
가령 '소수자-되기'라는 들뢰즈-과타리의 개념은 이런 물음의 산물이다.
초월론적 경험론은 선험적 원리를 인정하되 단순히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지 않는다.
출처: 아트앤스터디 김재희 강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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