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시장경제체제_이영훈


이 책은?

한국의 경제체제에 대해서 다양한 시각으로 구조를 살펴준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다각도의 시론서는 유일한 것 같다.


1장 총론


(한국의 시장경제 특질)

첫째, 한국경제는 고도로 개방적인 체제이다. (중략) 1960년대 이래 수출산업을 개발하고 그것을 성자의 동력으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중략) 한국의 수출산업은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기존의 노동집약적 수출상품을 자본집약적, 기술집약적 상품으로 대체해왔다. 그 과정에서 한국의 산업구조 역시 자본집약적, 기술집약적으로 고도화해왔으며, 그 결과 국가경제의 자립성도 점차 제고되었다. 그렇지만 한국경제는 수출산업의 핵심 소재, 부품, 장비를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이른바 조립형 공업화의 특질을 끝내 불식하지 못하였다. 공업화의 역사가 짧고, 과학·기술의 수준이 낮고, 국내시장이 협소하다는 원초적 제약조건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수출산업이 고도화될수록 핵심 소재, 부품, 장비의 해외의존도는 점점 커졌다. 그것들은 주로 일본에서 수입되었다.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은 성장의 주요 애로를 인접국 일본에서의 손쉬운 공급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는 지경학적 요인에 의존한 바가 컸다.

둘째, 소수 대기업이나 대기업집단이 기술혁신과 국가경쟁력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보통 재벌로 불리는 대기업집단은 혈연을 매개로 한 소수 특정인이 비관련 부문에 종사하는, 형식적으로는 독립적인, 다수 대기업을 사실상 소유, 지배하는 선단식 경영을 말한다.

셋째, 이 같은 대기업이나 대기업집단의 아래층에 혁신 역량이 없는, 생계형의, 영세소기업 집단이 방대하게 분포해 있다. 통계청의 전국사업체조사에 따르면 2011년 전국의 제조업 사업체 수는 총 34909개인데, 그 가운데 종업원 1~9명의, 공식적으로는 소상공인으로 불리는, 영세소기업이 277,877개로 81.5%의 큰 비중을 점하고 있다. 이는 같은 규모의 영세소기업이 영국에서 75.4%, 일본에서 69.7%, 독일에서 60.5%, 미국에서 49.3%임에 비해 크게 높은 편이다. (중략) 그뿐만 아니라 영세소기업의 수나 비중은 199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지속해서 증가해온 추세였다. (중략) 현재 한국 기업군의 규모별 분포에서 영세소기업으로 편중된 정도는 국제적으로 이상치(outlier)라고 할 정도로 높은 수준이다. 나아가 이들 영세소기업은 발전성을 결여하여 차상위 구간으로 올라가기보다 그 자리에서 정체하는 경우가 일반적인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넷째로 지적할 수 있는 한국경제의 특질은 노동시장이 전반적으로 불안정하고 불균형이 심하다는 사실이다. 노동시장의 질을 대변하는 여러 지표에서 한국은 OECD 국가에서 최고 아니면 최저의 극단을 보이고 있다. 예컨대 종업원의 평균 근속연수는 2009년 정규직의 경우 평균 6.2년인데, 이는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짧은 편이다. 비정규직이나 기간제의 근속연수는 2년이 채 되지 않는다. 나아가 전체 피용자 가운데 1년 미만 근속자의 비율이 무려 36.2%나 되어 OECD 국가 가운데 단연 최고이다. 반면 10년 이상 장기근속자의 비중은 16.9%OECD 국가 가운데 최하이다. (중략)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고용의 질이 이처럼 현격한 차를 보이는 것은 생산성에서 커다란 격차가 있기 때문이다. 2009년 종업원 300명 이상 대기업과 종업원 10명 이상 중소기업의 1인당 부가가치의 격차는 3.19배이다. 이는 국제적 비교에서도 심한 편이다. 예컨대 2007EU 15개국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1인당 부가가치의 격차는 평균 1.68배이다. (중략) 요컨대 한국의 노동시장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큰 격차를 내포하는 분절구조 내지 이중구조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대기업의 노동자는 고임금의 정규직으로서 잘 조직된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고 있다. 반면에 중소기업의 노동자는 저임금의 비정규직으로서 조직되어 있지 않다.

다섯째, 역시 노동시장의 문제로 수급의 불균형이 심하다는 사실이다. 2006년 한국에서 15~64세의 고용률은 64%OECD 평균 66%보다 낮다. (중략) 중소기업은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2006년 전체 사업장의 인력부족률은 2.7%인데, 10~29명의 소규모 사업장에서는 3.2%로 더 높고, 직종에 따라서는 7.2%에 달하기도 한다. 부족한 인력의 상당 부분은 외국인 근로자로 충당되고 있다. 2007년 외국인 근로자는 전체 취업자의 1.8%를 차지하며, 그들 대부분은 소위 3D 업종의 영세 사업장에 종사하고 있다. 비숙련공뿐 아니라 숙련공도 점점 부족해지고 있다. 이는 기존의 인력이 고령화하는 가운데 고학력자의 제조업 기피로 숙련과 지식을 갖춘 인력의 공급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2005년 제조업 6개 산업에 종사하느 근로자의 평균연령과 근속연수는 1차 금속은 40.1세에 9.8, 기계운송장비 제조업은 39.3세에 11.0년이다. 젊은 기능공의 충원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이 같은 기능 인력의 고령화 현상은 장차 이들이 퇴직할 때 산업 현장에서 숙련이 제대로 전수되지 않을 문제를 예고하고 있다. 이 같은 인력 수급의 불균형은 1990년대 이후에 지속된 교육정책의 혼란에 그 원인이 있다. 잘 알려진 대로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아서 한때 80%를 초과하였다. 그렇지만 이들 고등교육의 이수자들이 자기 전공 분야에서 직장을 구하는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2004년도 노동패널조사를 이용한 분석에 따르면 전문대졸 취업자의 63%, 4년제 대졸 취업자의 58%가 전공과 무관한 일을 하고 있다. 또한 정규직의 67%, 비정규직의 77%가 자신의 교육 수준보다 낮은 곳에 하향 취업했다고 응답하였다.

여섯째는 금융시장의 실태와 동향이다. 잘 알려진 대로 한국의 금융시장은 은행이 기업에 신용을 제공하는 간접금융 또는 관계금융이 그 원형을 이루었다. 1961년 박정희 군사정부는 전 은행을 국유화하고, 개발정책이 정한 우선순위에 따라 금융을 분배하였다. 이 같은 정책금융이 1970~1980년대에 걸쳐 전체 은행신용의 거의 70%를 점하였다. 정책금융은 1990년대 이후 금융시장이 자율화함에 따라 급속하게 감소하였다. 한국의 금융시장은 1997년 말의 외환위기를 경과하면서 주식과 회사채의 발행으로 기업자금을 공급하는 자본시장으로 그 중심을 이동시켰다. 2001년 예금은행 총자산 대비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비율로 보아 한국은 국제적으로 미국,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은 직접금융 그룹에 속한다. 이처럼 1990년대 이후 간접금융의 비중과 역할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전체 금융시장에서 간접금융의 은행시장은 직접금융의 자본시장과 경쟁하면서 또는 상호보완적으로 순기능을 하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은행을 통한 관계금융은 기업슬 선별하고 통제하는 능력을 키우는 가운데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점에서 자본시장이 은행시장보다 반드시 우월하다고 단정할 수 없는 실정이다.

불균형과 격차를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정부의 각종 규제가 강화됐다. 이 점이 일곱째로 지적될 수 있는 한국 시장경제의 특징이다. 전경련의 발표에 따르면 행정규제기본법에 따라 정부에 등록된 규제는 20006,912개에서 2013615,007개로 지속적으로 증가해왔다. 2014OECD가 작성한 상품시장규제 지표에서 한국은 2013년 조사대상 OECD 국가 가운데 네 번째로 높은 규제 수준을 보이고 있다.

p2

 

2001년 홀과 소스키스는 자본주의의 다양성에 관해 여러 명이 참가한 공동 연구서를 출간하였다. (중략) 홀과 소스키스는 종전의 비교자본주의론 또는 비교경제체제론과 달리 기업의 전략적 행동을 비교의 준거로 중시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기업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행위자이다. 기업은 안으로는 주주, 종업원, 노동조합과 밖으로는 부품·원료의 공급자, 경쟁기업, 소비자, 협회, 정부 등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기업의 본질은 관계적이다. 이 모든 관계에는 정보의 불충분성과 비대칭성에 기인하는 계약의 불완전성, 도덕적 해이, 배신, 꾀부림 등이 도사리고 있다. 기업은 성공하기 위해서 이 모든 위험을 훌륭하게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업이 조정에 성공해야 할 주요 관계는 다섯 가지다. 첫째, 노동자 또는 노동조합과 임금을 비롯한 근로조건에 관한 협상이다. (중략) 둘째, 기업에 필요한 숙련노동을 확보하기 위한 직업훈련의 문제이다. (중략) 셋째, 기업 자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금융시장과의 관계이다. (중략) 넷째, 기업 간 관계의 문제이다. 다섯째, 종업원과의 관계이다.

p12

 

홀과 소스키스는 동일한 충격에 대한 기업의 대응 방식이 나라에 따라 다름에 주목하고 있다. 예컨대 환율이 상승하여 수입품의 가격이 올랐다 하자. 영국의 기업은 오른 가격 그대로 소비자에게 팔아 기업의 수익률을 유지하지만, 독일의 기업은 오르기 전의 가격으로 팔아 기존의 시장점유율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 같은 차이는 영국과 독일의 제도적 환경이 다르고 그에 따라 외부 충격에 대한 기업의 조정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생긴다. 영국에서 기업은 자본시장에서 투자를 직접 유치하며, 투자자는 기업의 수익률과 배당에 큰 관심을 갖는다. 이에 경영자는 가격 인상의 요인을 소비자에 전가하여 기존의 수익률과 배당을 유지하는 조정방식을 선호한다. 그에 따라 시장점유율이 감소하면 종업원을 감원하면 된다. 영국의 기업은 호황기에 종업원을 고용하고 불황기에 종업원을 해고함에 자유롭다. 이에 종업원의 근속연수는 길지 않으며, 노동조합의 조직률은 낮다. 숙련의 형성은 노동자 자신의 책임과 투자에 의한다. 기업은 그가 필요로 하는 숙련과 기술을 시장에서 고용한다. 대학은 수준 높은 교양교육을 실시하여 어느 직종이나 산업에도 적응할 수 있는 범용의, 양질의 졸업생을 시장에 공급한다. 기업 간의 장기적인 거래는 없으며, 이에 기업가단체의 활동도 미약하다. 시장의 질서를 바로잡는 역할은 정부의 몫이다.

대조적으로 독일의 기업은 은행과의 장기적이며 고정적인 거래를 통해 자금을 확보한다. 은행은 기업의 장기수익률에 관심을 가지며, 기술개발이나 영업 전략과 관련된 기업의 내부 정보를 공유하면서 기업 경영에 개입한다. 이에 기업은 단기수익률에 매여 가격 인상의 요인을 소비자에게 전가하지 않으며, 오히려 시장점유율의 유지와 확장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독일 기업의 그러한 조정방식은 노동자를 쉽게 해고할 수 없는 노동시장의 사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독일에서 노동조합의 조직률은 매우 높으며, 노동조합은 기업 경영에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다. 숙련은 기업이나 협회가 제공하는 훈련과정에서 기업 또는 산업 특수적인 형태로 이루어진다. 교육에서도 학교는 이미 중등과정에서부터 기업과 밀접한 협동을 통해 기업 또는 산업 특수적 기술을 학생들에게 전수한다. 기업은 협회로 잘 단합되어 있으며, 이에 기업이 훈련시킨 숙련노동이 다른 기업에 탈취당할 위험은 없다.

이처럼 기업이 행하는 주요 조정과 관련된 각 부문의 제도들은 상호 정합성을 지닌다. 홀과 소스키스는 이를 가리켜 제도적 보완성이라 부른다. 홀과 소스키스는 그 제도적 보완성의 원리를 준거로 하여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크게 두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하나는 자유시장경제이고, 다른 하나는 조정시장경제이다. LME에 속하는 나라는 미국,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아일랜드 6개 국이고, CME에 속하는 나라는 독일, 일본,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오스트리아 10개 국이다. LME에서 제도적 보완성의 원리는 공정한 경쟁, 계약 그리고 기업의 조직 원리로서 위계이다. 반면 CME의 원리는 협약과 그에 기초한 전략적 협동이다. CME에서 기업은 위계라기보다 경영자와 노동자의 협약체이다. (중략) LMECME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나라들이 있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터키 등이다. 이들 나라는 대개 전체 산업에서 농업의 비중이 큰 가운데, 재정과 금융을 수단으로 하여, 국가의 경제에 대한 개입이 강하다는 공통의 특징이 있다. 홀과 소스키스는 제도적 보완성이 떨어지는 이들 나라에 대해, 지중해를 끼고 있다고 해서 지중해시장경제(MME)의 국가들이라고 이름붙였다.

p13

 

한국의 연구자들이 보이는 공통의 결함을 지적하자면, 그들은 한국의 경제체제를 제약하고 있는, 그것의 비교적 특질을 깊숙이 각인하고 있는, 한국인들이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비공식적 제도와 규범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적절한 관심조차 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인들이 상호 신뢰하고 협동하는 원리는 무엇인가. 한국사회의 조직적 특질은 어떠한가. 그것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해왔는가. 경제체제의 비교적 특질과 관련하여 제기될 수밖에 없는 이 같은 물음에 대해 한국의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인류학, 역사학은 부끄럽게도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한국경제의 유형적 특질에 관한 국내의 논의가 경험적이라기보다 규범적이며, 전체적이라기보다 부분적이며, 심층적이라기보다 표피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음도 이 같은 이유에서이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한국에서 VoC 이론은 글로벌리즘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의 일환으로 수용되었다. 최초의 소개자인 임현진은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병폐의 근원을 권위주의적 근대화 내지 신자유주의에서 찾고 그 대안으로서 서유럽의 CME를 추천하였는데, 그가 그 근거로 제시한 것은 순전히 그의 개인적인 도덕적 확신뿐이었다. 한국의 사회과학자들에게서 관찰되는 이런 절망적 수준의 도덕적 규범성은 앞으로 우리가 정의하게 될 한국형 시장경제체제에 내재한 한국 지성사회의 특질이나 한계일지도 모른다.

p25

 

정부의 규제가 강화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는데, 여기서는 부문 간의 불균등과 격차를 스스로 조정할 능력이 취약하다는 한국사회의 조직적 특질에 주목한다. 1973년 중화학공업화가 착수된 이래 한국경제는 기업 간의 협력과 조정이라는 이전에 경험한 적이 없는 생경한 문제에 부딪쳤다. 생산과정의 우회도가 큰 중화학공업화의 원만한 추진을 위해서는 대기업에 부품과 소재를 공급하는 중소기업의 건전한 역할이 필수적이다. 노동집약적 경공업제품을 가공, 조립하여 수출하던 이전 시기에 중소기업의 역할이나 발전은 없었다. 중소기업의 수는 196622,000여 개에서 1973~1976년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수출은 긴 조립라인에 다수 노동자를 배치한 대기업에 의해 담당되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협력관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며, 그에 따라 1966~1976년 중소기업으로서 하도급 업체의 비율은 10~20%에 불과하였다. 이후 중화학공업화의 본격적인 진전에 따라 1990년까지 중소기업의 수는 67,000여 개로, 하도급 업체의 비율은 70% 전후로 많이 증가하였다. 그렇게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가 긴밀해지자 1975년 정부는 전술한 계열화촉진법을 제정하여 양자의 협력을 증진코자 하였다. 그렇지만 결과는 실패작이었다. 관련 연구들을 검토하면, 그 기본 원인은 정부 정책의 부실에 있다기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신뢰가 원래 빈약한 데 있었다. 대기업은 하도급 중소기업을 종속기업으로 간주하였으며, 하도급 기업의 기술과 품질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자금과 기술을 지원하지 않았으며, 하도급의 결제를 미루었으며, 하도급 기업을 병합하여 기업조직을 확장하고자 했다. 중소기업 역시 대기업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특정 기업에 매인 장기간의 고정거래가 그를 종속시킬 위험성을 처음부터 경계하였다. (중략) 1975년 정부가 계열화촉진법을 제정할 때 정부는 일본의 하도급 관계를 모델로 삼았ㄷ. 계열화촉진법은 일본의 관련법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정부는 일본식의 하도급 관계를 추구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핵심 기술·부품·소재·장비를 손쉽게 수입할 수 있다는 지경학적 조건이 그것의 국내 자급에 요청되는 기업 간의 수평적 협조를 가로막은 경제적 요인이었을 터이다. 그렇지만 기업 간의 협력을 가로막은 요인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다른 어떤 조건이 충족되었더라면 경제적 요인의 제약을 넘어 협력을 균형해로 하는 쌍방의 행동전략이 도출될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일본식의 하도급 관계를 추구한 정부정책이 실패한 것은 일본에서와 같은 기업 간 신뢰와 협력의 문화가 한국에서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45

 

 

국가-경제관계

이익단체

 

밀접

적당한 거리

분산적

국가주의 시장경제

(1990년대 이전 프랑스)

자유시장경제

(영국, 발틱 국가들)

조직적

보상국가 시장경제

(이탈리아, 스페인, 동구의 체제이행국가들)

조정시장경제

(독일, 슬로베니아)


한국의 시장경제는 그의 사회와 문화에 배태된, 오랜 역사에 걸쳐 형성된, 요인에 규정되어 국가주의의 특질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국형 시장경제체제를 정의하자면 국가주의 시장경제이다. 한국의 자본주의는 VoC 이론이 제시하는 자본주의의 네 가지 유형으로서 자유시장경제, 조정시장경제, 국가주의 시장경제, 보상국가 시장경제 가운데 국가주의 시장경제에 속한다. 한국의 자본주의가 그를 국가주의 시장경제로 이르게 한 진화의 경로를 탈출할 수 있다면, 그러한 행운을 자신의 책무로 실천하는 정치적 리더십이 출현한다면, 그와 더불어 이 나라를 네덜란드와 같은 교역국가의 수준으로 완전 개방할 수 있다면, 이 나라가 새롭게 나아갈 방향은 조정시장경제보다 자유시장경제 쪽이 훨씬 친화적이다. 강력하고 공정한 법치가 행해진다면, 이 나라의 개성적인 인간들은 자유시장경제의 기본 원리인 경쟁, 계약, 위계의 덕목을 새로운 통합의 질서로 수용함에 커다란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유사한 덕목으로 짜인 나선구조의 전통사회에 의해 오랫동안 단련되어왔기 때문이다. 김선빈의 글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 나라가 조정시장경제로 곧바로 나아가기는 어렵다. 조직되지 않은 인간들을 자발적 신뢰로 묶는 사회조직의 진화는 훨씬 느린 속도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진화의 세계는 전쟁이나 공황이나 국망과 같은 수준의 충격이 가해지지 않은 이상, 인간들이 그들의 사회를 특정한 방향으로 밀어온 진화의 경로를 이탈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한국경제는 보상국가 시장경제로 떨어지는 최악의 경로를 회피할 수 있다면, 그런 정도의 국민적 상식이 건재해준다면, 국가주의 시장경제의 틀에서 심하게 갈등하면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해갈 것이다.

p51

 

2장 한국의 국가혁신체제: 국제 비교와 추격형에서 선진국형으로의 전환

 

압축성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선진국이 100년 이상 걸린 과정을 몇십 년 만에 달성하는, 그래서 선진국과의 격차를 급속히 줄이는 추격형 성장을 해왔다. 이러한 추격형 성장의 핵심은 소위 선도형 추격으로서, 추격을 선도한 주체는 대기업, 제조업 부문, 수출산업과 정부 부문이었다. 반면에 뒤처진 분야는 중소기업, 서비스업, 내수산업, 시민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장기적으로 볼 때 과거 선도형 추격 모델의 힘이 소진되어가고, 이제는 그동안 뒤쳐져 있던 부문과 같이가는 동반형 추격이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

p58

 

각 국가의 혁신능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며, 이에 대해서는 슘페터학파의 국가혁신체제의 개념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룬드발, 넬슨 등 슘페터학파는 일찍이 국가혁신체제라는 개념을 주창하며, 이 국가혁신체제의 차이가 각 국가의 혁신성과의 차이를 낳고, 그것이 그 나라의 경제성장을 결정지음을 주장한 바 있다. 룬드발은 국가혁신체제를 지식의 생산, 확산, 사용에 관련되는 여러 주체와 그들 간의 관계라고 정의한 바 있다. 결국 국가혁신체제란 지식의 습득, 창조, 확산, 사용에서의 효율성에 관한 개념이다. 이 글에서는 한국의 과거 추격형 성장단계에서의 국가혁신체제는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살펴보고, 나아가서 앞으로 한국이 선진국에 안착하고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의 선진국형 국가혁신체제를 갖추어야 할 것인가 하는 정책과제를 다룬다. 최근 애쓰모글루 등이 제도 특히 포용적 제도와 수탈적 제도를 비교하면서 제도의 중요성이 국가의 경제성장을 결정짓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애쓰모글루가 분석한 전근대 사회나 저소득 국가에서 기초적 제도가 큰 중요성을 지님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근과 김병연의 연구는 중진국 이상의 발전단계에서는 혁신적 성과가 더 중요함을 논증하였다. 다만 이근과 김병연의 연구에서는 혁신의 지표로 각 국가가 출원한 미국 특허 수를 채택하였으나, 이근의 최근 연구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단순히 특허 수를 넘어서 국가혁신체제의 더욱 다양한 측면을 보여주는 지표가 필요하고, 그것이 국가혁신체제를 제대로 분석해내는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p59

국가혁신체제를 표현하는 첫 번째 측면은 지식 획득의 원천과 토착화에 관한 지표이다. 이는 후발국의 관점에서 후발국이 어느 정도 해외 지식 원천에 의존하여 자신의 지식을 창출하는가 하는 측면과 또 나아가서 얼마나 스스로 내부의 지식 원천에 의존하고 지식생산 메커니즘을 토착화하였는가 하는 측면이다. 이것은 지식생산의 토착화 지표라고 부를 수 있으며, 개념적으로는 그 나라가 출원한 특허의 인용도를 조사해볼 때 얼마나 많은 정도로 과거 그 나라가 가진 특허를 인용하는가 하는 그 국가의 자기인용 정도로 표시될 수 있다.

국가혁신체제의 두 번째 지표는 지식생산의 집중도이다. 이는 각 국가에서 지식을 생산하는 주체가 소수 대기업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다수 주체가 참여해 골고루 분포되는가 하는 측면을 포착한다. 당연히 이 지표에서 선진국은 굉장히 분산화된 양상을 보이고, 중진국과 후진국일수록 지식생산이 소수 발명자에 집중되어 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지식생산의 세 번째 지표는 각 국가가 출원한 특허가 얼마나 독창성이 높은 분야의 특허를 창출하는가 아닌가 하는 지표이다.

국가혁신체제를 표현하는 네 번째 지표는 해당 국가가 기술수명이 짧은 분야에 많이 특화하고 있는가 아니면 기술수명이 긴 분야의 기술에 많이 특화하고 있는가 하는 측면이다. 이는 기술수명주기라고 한다. 기술수명이란 어떠한 기술이 얼마나 오래가느냐 또는 오래 사용되느냐 하는 개념이며, 기술수명이 짧다는 것은 그 분야의 기술이 금세 수명을 다해서 몇 년 지나면 그 유용성이 급격히 감소한다는 특성을 말한다. 기술수명주기는 해당 특허가 인용한 특허들의 평균 출원 연도를 가지고 계산할 수 있다.
국가혁신체제의 다섯 번째 지표는 기술다각화 지표이다. 이 지표는 어떤 국가나 기업이 매우 다양한 기술 분야에 특허를 내고 있는가 아니면 소수의 한정된 분야에 특허를 내고 있는가 하는 지표이다. 이근에 따르면 당연히 선진국들은 기술적으로 많이 다각화되어 있는 반면, 중진국들은 다각화의 정도가 높지 못한 양상을 보인다.

p61

 

기업, 산업, 국가라는 세 차원에서 수행된 실증분석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성공적 추격국가 및 기업들은 기술수명주기가 짧은 분야에 집중적으로 특화하여 성장해왔다는 점이다. 기술수명주기가 짧은 것이 추격형 성장에 유리한 직관적 이유는 수명이 짧을수록 선진국들이 장악하고 있는 기존 기술의 유용성이 금세 하락하기 때문에 기존 기술에 덜 의존해도 되며, 동시에 기술수명이 짧다는 것은 계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성장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동시에 지식생산의 토착화 면에서도 선진국이 장악하고 있는 기술에 덜 의존하기 때문에 더욱 빨리 국가 차원의 자기인용도를 높일 수 있는, 즉 지식생산의 토착화를 빨리 달성할 수 있는 유리한 점이 있다.

p64

 

한국과 타이완 등의 성공적 추격국가는 기술수명이 짧은 분야에 특화하면서 추격을 달성하였던 반면, 상대적으로 지식생산의 집중도 및 독창성 확보 면에서는 다른 개도국과 특별한 차이를 보이지 못했다. , 지식생산의 집중도나 독창성 확보는 추격형 성장을 가능케 한 핵심요소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도 선진국형 국가혁신체제로의 전환 과정에서는 개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볼 수 있다.

p67

 

기술수명이 긴 분야가 진입장벽이 높고 후발자가 성공하기 어렵다면 왜 그 분야에 굳이 진입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이 현재 잘하고 있는 IT 등의 짧은 수명주기 산업에 계속 특화해도 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할 수 있다. 물론 현재 잘 되는 산업을 계속 발전시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문제는 기술수명이 짧은 분야는 우리가 빨리 추격하였듯이 중국과 같은 또 다른 후발자가 쉽게 쫓아올 수 있는 분야라는 것이다. (중략) 기술수명이 긴 분야로의 진입이라는 과제 외에도, 한국은 지식생산의 토착화나 기술다각화 수준을 더 높일 필요가 있고, 과다한 집중도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전환은 기존의 소수 대기업 주도의 혁신체제로는 어렵고, 중소기업 등 다양한 경제주체의 참여가 필요하다. 즉 선도형 추격에서 동반형 추격으로의 전환 및 창조경제라는 화두가 어느 정도 적절함을 시사한다.

p73

 

3장 한국 대규모 기업집단의 특징과 전망

 

기업집단은 한국에만 고유하고 국제적인 기준으로 볼 때 예외적인 현상인가? 기업집단은 법인으로서의 기업들이 일정한 형태의 소유관계를 통하여 경제적 동일체를 형성하고 있는 기업의 형태이다. 자연인과는 구분되는 법인으로서의 회사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형태를 띠면서 발전했으며,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주식회사가 대표적인 기업의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 그 주식회사가 다른 회사의 주식을 보유할 수 있게 되면서 기업집단이 형성되었다. 사실 경제학 교과서가 상정하는 분산된 소유구조하의 독립된 회사는 후발산업화 국가에서는 일반적이지 않다. 후발산업화 국가에서 상위 대기업은 국가 소유가 아니라면 기업집단의 소속기업인 경우가 많다. (중략) 후발산업화 국가에서 대규모 사업체의 경우 한국을 필두로 가족이 지배주주인 다각화된 기업집단이 주요 기업 형태임을 알 수 있다. 가족중심의 기업집단이 아닐 경우에는 국가소유의 기업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즉 경제학이 상정하는 분산된 소유구조하의 독립적인 기업이 경제에서 대표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오히려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역사적으로 볼 때도, 19세기 초에 등장한 영국의 무역상사의 예와 같이 다각화 과정에서 출범한 기업집단이 선진국에서는 21세기까지 존속하고 있기도 하여, 기업집단을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후발산업화 국가의 고유한 현상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p88

 

선진국과는 달리 후진국에서 다각화된 기업집단이 지배적인 기업 형태로 드러난 이유로 독창적 기술에 의존하기보다는 다른 생산능력에 의존하여 성장하는 과정에서 습득한 노하우로 타 산업에 진출하기 쉽기 때문이라는 기술적 역량을 강조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자본시장, 노동시장 등 제도적 시장이 미비한 후발산업화국가에서 기업집단은 그 자신이 지니고 있는 역량으로 인해 발전된 시장을 갖고 있는 선진국에 비해 더욱 지배적인 형태를 보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p91

 

한국의 가문중심 기업집단은 가문의 소유지분이 낮고, 지배하는 기업집단이 후발산업화 국가의 기업집단 중 가장 큰 규모이며, 예외 없이 지배가문의 경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나아가 통제권과 현금흐름권의 괴리도가 높아서 두 가지 대리인 비용(경영자와 주주, 소액주주의 지배주주)이 모두 상승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특질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빠른 시간 내에 유례없는 성장을 이룩한 한국경제의 승자의 재앙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대규모 기업집단의 이러한 특질은 소유분산, 주주보호, 전문경영인 주도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강력하게 추진할 대항세력이 성숙하지 않았음에 그 연유가 있다.

p97

 

한국 기업집단의 전망은 아래와 같은 제약하에서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가족기업에서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한 역사가 깊은 선진국의 사례를 살펴볼 때, 현재 한국에서 지배적 형태인 가문중심 기업집단체제가 그대로 존속할지는 의문이다. 한국과 같은 가문중심 대규모 기업집단을 지배적 기업 형태로 하면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사례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미국의 반트러스트 운동이나 영국의 전통적인 독립적 금융자본주의, 독일의 노동조합과 같은 강력한 대항세력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급격하게 소유의 분산을 기대하거나 가족 소유와 경영을 배제하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 한국의 대규모 기업집단의 미래를 전망할 때 영미식의 분산된 소유구조하의 전문경영인 체제로의 급격한 변화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가운데 유럽의 내부자 모형이나 일본의 게이레츠 형태 기업집단으로의 변화, 또는 이러한 변화를 거친 후 영미식의 소유·지배구조로의 전환을 고려할 수 있따. 기업집단의 경제적 장점을 유지하면서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변화를 유도한다고 할 때,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선 기업 형태의 획일성을 지양하고 다양한 형태의 기업체제가 공존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될 필요가 있다. 다수 기업집단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기업집단을 활용한 다양한 형태의 경쟁제한적 환경이 이어진다면, 성장하는 기업 역시 기존의 지배적 기업 형태를 취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최근의 총수 없는 기업집단의 경영 행태도 비연관 다각화와 계열사 확대라는 기존 가문중심 기업집단의 경영 행태를 답습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기업경영의 책임성을 확립하고 기업경영의 민주성을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 실질적으로 총수일가를 이루는 지배소수주주의 권위와 힘은 앞서 살펴본 통제권 확대 메커니즘에 의존한다. 즉 소유구조의 구조적 특성을 이용하여 통제권과 현금흐름권의 격차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경제적 유인이 존재하는 것이 기업집단이 장기적으로 존속하는 유인이다. 이 같은 문제점은 제도의 개선을 통하여 일정 부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다중대표소송제등의 소수주주 보호 장치, 기업간 배당소득세제의 실질화, 경쟁제한적 주식소유에 대한 경쟁 당국의 처분권 강화 등, 법인 간 주식소유의 비용을 높이는 정책은 기업집단 형성의 유인을 줄일 수 있을 것이고, 결국은 소수의 주식 보유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현재 형태의 기업집단의 유인을 줄일 것이다. 한편 가족경영의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하여 지배가문이 쉽게 소유와 경영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하는 출구전략도 필요하다. 미국은 1935년 계열사 청산에 유인을 부여하여 대규모 기업집단의 해체를 촉진한 경험이 있다. 그러나 기업집단 통제권의 엄청난 프리미엄이 지속된다면 지배가문의 질서정연한 퇴출과 기업집단 체제의 완화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하겠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한국은 기업집단의 변화는 다음 사항에 의하여 제약될 것으로 짐작된다. 우선 기업집단 자체의 변화 가능성 및 지배가문의 전략이 가장 중요하다. 그 다음, 외부 요인으로서 경제위기 및 구조조정의 가능성, 그리고 개방과 경쟁 확대의 정도,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법적, 제도적 개선 노력의 가능성, 산업자본과 독립적인 금융 부문의 발전 가능성, 노조 등 대항세력의 형성 가능성 등이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그 위에 경제적 인센티브 구조의 변화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소유의 편익보다 지배의 편익이 상대적으로 클 경우, 기업집단의 확대 및 통제권 확대메커니즘 활용의 유인이 증대한다. 이 같은 근본적 유인이 제거되지 않으면 현재와 같은 기업집단 체제는 언제까지라도 존속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통제권 확대메커니즘을 항구화하는 지주회사제도의 권장이 바람직한 정책인지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즉 복잡한 출자구조를 단순화한다는 취지로 도입된 지주회사제도가 자회사 및 손자회사의 유지 요건인 조식보유율이 하락하면서 통제권과 현금흐름구너의 괴리를 항구화하는 장치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의 통제권과 현금흐름권의 괴리도를 개선하는 데 기여할 여지가 없는 신규 순환출자만을 금지하는 정책의 효과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p98

 

4장 경제발전의 전개 형태와 중소기업

 

서구에서는 기업 간 거래가 기본적으로 시장거래에 기초하고 있다. 비록 장기간에 걸쳐 거래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더라도 가격이 더 낮거나 품질이 더 좋은 공급업체가 새롭게 나타나면 거래관계가 언제라도 변경될 수 있다. 기업 간 분업관계를 구성하는 네트워크가 이완적인 것이다. 그에 비해 일본이나 한국의 기업 간 거래는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특성을 보인다. 여기에서 장기지속적이라 함은 물리적 시간의 길이보다는 거래관계의 지속성을 의미한다. 만일 더 낮은 가격을 제시하는 신규 공급업체가 출현하였을 경우에 서구적 거래관계에서는 기존 공급업체와 거래를 즉시 중단하고 새로운 공급업체로 거래를 전환하게 된다. 반면에 장기지속적 거래에서는 기존 공급업체에게 신규 공급업체가 제시한 조건만큼의 가격 저하를 요구하고, 그 대신 거래관계는 계속 유지하게 된다.

p112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대기업이 감소하면서 그와 결합된 중소기업 또한 감소하지 않고 왜 증가하였느냐는 점이다. 부분적으로는 1990년대에 기술집약적 산업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부품 공급에 대한 의존이 상대적으로 적은 노동집얍적 산업의 비중이 낮아진 반면에 부품공급 의존도가 높은 기술집약적 산업의 비중이 높아진 점이 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으로는 소기업으로의 생산 전가가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 (중략) 가격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추진된 전략의 하나는 외주생산의 확대였다. 기술집약적 제품은 수많은 부품으로 구성되므로 최소한의 핵심역량에 해당하는 생산활동만 대기업에 남기고 그 밖의 생산활동은 중소기업들로 이전하였다. 그와 동시에 중소기업들에 낮은 비용의 부품생산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이 같은 대기업의 요구에 직면한 중소기업, 1차 협력업체는 대기업의 요구조건을 충족시키기 어려워 l를 다시 다른 중소기업, 2차 협력업체에 더 낮은 생산비로 생산해 달라고 요구하는 등, 일련의 연쇄 반응이 일어나게 되었다. 종국에는 가장 최하위층으로 저비용 생산이 귀착되고, 국내인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워 외국인 노동력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90년대 한국 기업 간 분업구조에서는 수직적인 중층화가 일어났다.

p120

 

아직 실증되지 못한 가설들이지만 어떤 역기능들이 나타나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해보기로 하겠다. 첫째, 기존의 장기지속적 분업관계로는 혁신성이 제고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추격형 발전단계에서는 조속한 숙련 형성이 긴요하였으므로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거래관계는 숙련의 확산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창의력이 필요한 혁신형 발전단계에서는 장기지속적 거래가 갖는 단점인 폐쇄성으로 인해, 외부로부터의 새로운 이종교배 기회가 저하되어 혁신 창출이 감소할 수 있다.

둘째, 기업간 분업구조의 정점에 있으면서 전체 분업집단에 대해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기업은 창의와 혁신에 도전하기보다 중소기업으로의 전가 유혹을 받기 쉽다. 혁신에 대한 유인이 없기는 중소기업도 마찬가지다. 안정적 거래가 보장되어 있고 심지어 대기업이 거래관계에 있는 중소기업의 생산비 정보를 파악하여 납품 단가를 책정하므로 구태여 생산성을 높여 생산비를 낮출 유인이 없다. 정부출연연구소의 기술 지원을 받아 생산비를 낮추었더니, 대기업에서 그만큼 단가를 인하하여 혁신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는 실제 사례가 있을 정도이다.

셋째, 대기업의 공급업체로서 중소기업은 생산에만 집중하므로 독자적 시장 개척에 필요한 마케팅, 제품기획 등의 활동에 대한 필요가 감퇴한다. 이렇게 되면 이들의 수요에 기반을 둔 전문서비스업이 쇠퇴하게 되어 중소기업이 독립할 수 있는 경로가 막히게 되므로 대기업의 지배력은 더욱 강화될 수 있다.

넷째, 중소기업의 지위 향상을 위해 정책적 지원이 강화되어도 그 효과를 거두기 어려울 수 있따. 정부 지원에 힘입어 중소기업의 수익성이 향상될 경우 대기업에서는 추가적인 단가 인하를 요구하여 다시 과거의 낮은 수익성으로 회귀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정책적 지원은 중소기업이 아니라 대기업으로 귀착될 수 있다.

p127

 

5장 한국 자영업 부문의 현황과 구조적 특성: 경쟁의 성격을 중심으로

 

한국의 자영업 부문은 전통 소상공인 부문이 철저히 해체된 바탕 위에서 형성되어왔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그 전까지 형성되었던 소상공인 부문의 물질적 기초와 경제적 관계는 대부분 파괴되었다. 이후 자영업 부문은 근대화 과정에서는 이농인구에 의해 형성된 도시 비공식 부문으로, 최근에는 기업구조조정에 의한 퇴출인력의 집적지로 형성되어왔다. 과거 소상공인 부문의 전통 및 유산과 단절된 채 전후 새로운 원천으로부터 자영업 부문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형성과정으로 인해 한국 자영업 부문은 안정적인 물질적 토대나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하지 못했으며, 전통적으로 형성되었던 상거래의 도덕의식이나 규범도 희박하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아무런 토대가 전통 없이 생존을 위해 밀려난 사람들의 각축장으로서 자영업 부문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한국의 자영업 부문은 과당 경쟁과 불안정성, 열악한 생활 조건을 그 특징으로 지니게 되었다.

p135

 

자영업 진출의 동기에 대한 연구이다. (중략) ‘유인가설(pull hypothesis)’구축가설(push hypothesis)’이 있다. 유인가설은 자영업으로의 진출은 자발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자영업을 선택하는 것은 기업가 정신의 발현으로 자신의 사업을 일구기 위한 도전이다. (중략) 구축가설은 자영업으로의 진출이 임금근로자 지위에서 밀려나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된 결과라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자영업 부문은 능력이 낮은 노동자들이 최후로 의지하는 부문이다. (중략) 연구는 대부분 한국의 자영업 부문이 구축가설에 더 가까운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p139

 

지금까지 경제학에서는 경쟁의 성격에 대한 충분한 주의가 없었다. 신고전파 경제학에서는 경쟁을 정태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여기서는 완전경쟁을 이상으로 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경쟁의 정도를 파악한다. 완전경쟁은 진입에 제한이 없는 상태이자 무수한 생산자가 있는 상태이다. (중략) 결국 신고전파 경제학에서 경쟁은 자원이동과 진입퇴출이 자유로운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슘페터나 오스트리아학파는 경쟁을 혁신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동태적 과정으로 파악한다. ‘창조적 파괴기업가적 발견이 이들이 자본주의 경쟁을 이해하는 개념이다. (중략)

그런데 신고전파의 정태적 경쟁 개념이나 슘페터 및 오스트리아학파의 동태적 경쟁 개념 모두 절대적 경쟁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즉 나의 생산량 조절이나 혁신이 다른 기업의 이윤이나 생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다른 기업과 대비된 상대적 지위에 의해서 이윤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산비용과 내 제품에 대한 수요에 의해서만 이윤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대적 경쟁 상황에서는 시장실패가 발생하지 않거나 심각한 문제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경쟁이 상대적 경쟁의 성격을 띠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상대적 경쟁은 다른 기업과 대비해서 나의 상대적 수준이 어떠냐에 따라 이윤이나 보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나의 생산량이나 기술에는 변화가 없어도 다른 기업의 행동에 따라 나의 이윤이 달라질 수 있다. 또한 나의 경쟁력 강화 노력이 다른 사람의 이윤을 줄어들게 만들 수도 있다. (중략) 내 역량을 높이는 행위는 다른 기업을 하위로 밀리게 만들어 수입을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노력을 덜 했을 경우 예상 피해가 크기 때문에 과도하게 많은 노력을 투입하게 된다. 보상은 더 커질 수 없는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투입을 늘릴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지출이 수입의 증가를 낳지 않지만, 지출하지 않으면 막대한 피해를 입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적절한 수준 이상으로 과도한 비용의 지출이 발생하며, 이로 인해 사회 전체적으로 비효율이 발생한다. 상대적 경쟁은 시장실패를 가져오는 것이다.

p143

 

 

6장 한국 식료 부가가치 사슬의 특징: 시장지배력과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한국 농산물 시장의 특징)

첫째, 농업생산물 시장에서 농가의 중요한 시장 상대는 식음료 가공업체와 소매유통업체가 되고 있는데, 이들과 비교해보면 개별 농가의 소규모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한국 농가의 평균 매출규모는 중규모 이상 식음료 업체에 비하여 1/400에 불과하며, 대형 소매유통업체의 평균 규모에 비해서는 1/2,500에 불과하다.

둘째, 고령화는 기술적 적응과 투자는 물론, 사회적 자본에 대한 투자와 적응도 어렵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가의 생산성과 시장 적응력을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셋째, 농업 생산자들은 그 소규모성을 탈피하지 못하는 가운데 유통업체는 대규모화되어 있으며, 특히 연매출 1,000억 원 이상의 대규모 업체가 유통시장의 60% 이상을 점하고 있어 높은 집중도를 보여준다.

넷째, 한국에서 농업협동조합이 농산물 유통에서 점유하는 비율은 외견상 낮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농협이 공동선별이나 매취 등의 실제적 유통 기능을 발휘하는 비중은 전반적으로 낮고, 품목별로 격차도 큰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적 유통 기능의 비율은 평균 10~30% 정도로 추정된다.

p189

 

정책적 함의를 개괄적인 수준에서나마 간단히 정리함으로써 논의를 마치고자 한다. 첫째, 한국의 농업소득 문제는 물적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정책을 통해서 해결할 수 없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의 농업정책에는 경영체를 대규모화함으로써 생산성을 향상시켜 농업소득 문제를 해결한다는 접근방식이 시기별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중요하게 작용해왔다. 그렇지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농업소득의 문제가 농산물 가격이 다른 재화 가격의 상승에 현저히 뒤처지는 데 그 기본 원인이 있으므로, 생산성 향상을 통한 소득 문제의 해결은 적절한 해법일 수가 없게 되었다.

둘째, 그 대신 농산물시장에서 교섭력의 비대칭성을 완화하는 다양한 정책이 필요하다. 우선, 시장주체들의 행태 면에서 가공, 외식, 유통업체들의 불공정 거래나, 구조 면에서 시장에서 우월한 지위를 형성하게 하는 합병 등에 대해서 엄격히 규제할 필요가 있다.

셋째, 시장지배력이 강력한 수요자들에 대하여 길항력을 가질 수 있는 여러 생산자 조직이 성장할 수 있도록 정부 역할의 조정이 필요하다. 정부는 생산자들의 자발적 참여와 출자에 기초하고 그들의 자치적 감시를 받는 조직들이 성장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넷째, 대형 유통업체들의 시장지배력이 강화되는 푸드시스템 내에서 생산자와 소규모 가공업체, 외식업체, 소비자들이 지역 단위의 다양한 부가가치 사슬을 형성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기존의 농업정책 수행방식, 즉 사업을 정부가 설계하고 관련 주체 간의 재정지원 자금의 획득 경쟁을 유발하는 정책 방식은 민간 주체 간의 네트워크 형성과 아이디어 및 정보의 교류를 돕는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이 글에서는 언급되지 않거나 간단히만 언급되었지만, 투입재 시장에서의 공정거래 질서의 확립과 석유 및 화학제품 의존도의 완화는 농업소득 문제의 해결은 물론, 한국 농업의 지속성 확보를 위해서 중요한 과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왜곡되어 있는 전기 및 석유 등 농업 에너지원의 가격체계를 정상화하고, 투입재 지원 위주로 되어 있는 친환경농업 육성 정책을 농업의 지속가능성과 환경에 대한 긍정적 기여를 북돋우는 방향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p198

 


7장 한국 고령노동시장 성격에 관한 비교사적 접근

 

선진국의 역사적인 사례는 기술의 변화가 대체로 고령인력의 노동시장 퇴출압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행됐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19세기 말~20세기 초 발생한 소위 2차 산업혁명은 생산기술을 자본집약적으로 바꾸고 노동의 강도를 높이는 한편, 작업의 신축성을 낮춤으로써 고령근로자들의 노동시장 퇴출압력을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

p225

 

1980년 이후 고령인력에 대한 상대적인 수요가 감소했음에도 같은 기간 고령자들의 상대적인 고용이 증가했다는 사실은 고령자들의 상대적인 노동공급이 증가했따는 것을 강하게 시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은 장기적으로 고령근로자 일자리의 질이 상대적으로 나빠지고, 근래에는 고령자들의 상대적인 임금도 눈에 띄게 감소했다는 사실과 잘 부합된다. (중략)

첫 번째로 들 수 있는 정황적인 증거는 전통적인 노인부양방식이 점차 약화해온 반면, 공적연금을 비롯한 근대적인 노후보장제도는 아직 완비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중략) 둘째, 외환위기 이후 중년 및 고령 근로자의 고용이 불안해지고 조기 퇴직의 경향이 강화되어 소득불안정성이 높아진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교육비 및 주거비의 상승으로 말미암아 노후를 위한 저축이 더욱 어려워졌다는 목소리가 높다. (중략)

셋째, 이러한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한 이후 생계를 유지하거나 보조하기 위해 일자리의 질을 가리지 않고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고령자들이 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p226

 

 

8장 한국의 소득분배: 장기추이와 국제 비교

 

시장소득에 의한 지니계수가 가처분소득보다 높은 것은 소득재분배의 효과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양자의 차이가 최근으로 올수록 벌어지고 있어, 소득재분배 효과가 늘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른 OECD 국가들은 시장소득에 의한 지니계수가 가처분소득에 의한 것보다 현저히 높게 나타남] (중략) 가처분소득 기준으로 보았을 때 한국의 지니계수는 0.314이며, OECD 국가의 평균 수준임을 알 수 있다. (중략) 그렇지만 시장소득 기준의 지니계수는 0.344로 되어 있는데, 전체 OECD 국가 중에서 한국이 가장 낮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지니계수가 가처분소득 기준에서는 OECD 국가의 평균 수준으로 나온 것은 한국이 소득재분배 효과가 멕시코를 제외하면 가장 낮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중략) 요컨대, 한국의 가처분소득 기준 불평등도가 OECD 국가 중에서 중간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은, 사실은 이와 같은 두 가지 극단(시장소득 기준 지니계수와 소득재분배 효과가 모두 가장 낮은 그룹에 속한다는)이 서로 상쇄된 결과이다.

p249

 

1996~2000년의 경우는 1억 이상의 각 구간에서 소득자 수가 늘어나고 있지만, 가계동향조사가 시행된 2006년과 2010년에는 그 이전 시기에 비해 파악된 소득자가 줄었거나 아예 누락되었음을 알 수 있다.

p255

 

가계조사 결과를 소득세 통계나 국민계정 통계와 비교해보면, 상층 소득자에게서 표본의 누락이 심각하며, 금융소득의 경우도 상당히 과소 보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통계청의 지니계수가 불평등을 과소 평가하는 편향이 큼을 말해준다.

p259

 


p264(수정된 지니계수)

주목되는 것은 상위 5~1%의 소득비중은 해방 전과 해방 후에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을 보인 데 비해, 상위 1%의 경우는 수준이 현격하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두 시기의 소득집중도 차이가 주로 상위 1% 이상의 최상위층의 문제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중략) 최근 15년간에 걸쳐 각 상위 소득그룹의 소득집중도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는데, 최상위로 갈수록 그 경향은 더 심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p270

 

 

9장 한국 사회갈등의 진단과 통합 촉진 자원으로서 신뢰

 

구조적 균열요인(structural cleavage)이란 한 사회의 구성원들의 신념(정향), 소득, 생산과정에서의 위계, 소속감, 연령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고 고착되는 것으로 정책이나 특정 이슈로 인한 견해 차이에 의해 생겨나는 갈등(conflict)이나 분쟁(dispute)과는 성격이 다르다.

p294

 

사회갈등 심화의 구조를 정책영역을 기준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먼저 정치적으로는 탈권위주의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이념형 정책 쟁점이 빈발하면서 정치적 조정 비용이 증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외환위기로 인한 경제구조의 단절적 변화가 계층 간 소득격차를 심화시키면서,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위한 경제적 에너지를 충분히 축적하기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사회문화적으로는 급격한 생활양식의 변화와 과거와 비교하기 곤란할 정도인 사고의 다양성 증가는 사회 내부의 의사소통을 굴절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압축성장의 찬란한 빛과 함께 그 이면에는 불만, 불안, 불통, 부진, 불쾌의 5불 현상으로 표현되는 그림자도 점차 짙어져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의 갈등 심화의 근저에는 무엇이 자리 잡고 있을까? 한국사회에서 국가, 시장, 시민사회가 차례로 성장하면서 각 영역의 교차점에서 신뢰구조가 형성되지 못했던 것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사회는 선진국에서 관찰되는 국가, 시장, 시민사회 사이의 힘의 균형을 통한 역동적 사회발전보다는 삼자 간의 조화와 공존을 저해하는 힘겨루기 양상이 노출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신뢰구조의 미약은 한국사회를 상시적 갈등사회로 변모시켰고, 사회궛ㅇ원의 모든 층위에서 불만이 누적되고 현실비판의식이 증가하게 되었다. 또한, 갈드으이 복잡성 증대로 갈등의 접점이 워낙 다양해져 조정과 통합을 이루기가 매우 어려워지고 있다. 새로운 발전체제를 모색하는 현시점에서조차 갈등조정을 위한 제도 확충과 문화적 세련화가 지체되면, 경제사회 주체 간 상생과 화합의 정착이 곤란하게 될 것은 자명하다. 갈등조정이 원활하지 못하면 사회적 응집력과 경제적 역동성이 약화되는 것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 대부분이 갈등의 접점에 높여 있으면서도 해결의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지속되면, 위험사회로의 진입이 가속할 것이다. 나아가 많은 사람이 자신이 피해자 또는 희생자라는 의식이 만연한 사회에서 신뢰를 기대하기도 어렵고, 또한 사회적 신뢰가 낮은 상태에서 온전한 의미의 선진국으로의 진입이 수월하게 진행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민주사회에서 통용되기 어려운 억압과 통제적 접근을 사회갈등관리에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비현실적이다. 따라서 사회갈등에 대한 좀 더 세련된 방식의 처방을 모색하려면, 사회갈등의 원인구조와 그 수준을 비교국가적 관점에서 정밀하게 진단하고, 구체적 갈등조정 경험과 제도적 세련화에서 앞선 나라들을 살펴보면서 사회갈등을 배태하는 균열을 축소하고, 갈등관리 역량을 향상시킴으로써 갈등을 극복하고 통합을 촉진할 수 있는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p295

 

대표적인 갈등에 대한 분석적 관점은 Morton Deutsch의 행위 중심 관점과 Kenneth W. Thomas의 정서적 관점으로 대별할 수 있다. 도이취는 갈등이 양립 불가능한 행위로 인해 발생한다고 보며, 토마스는 갈등을 한 개인 내부의 양립 불가능한 반응 경향으로 파악한다. 이와 같은 여러 관점의 갈등 연구를 종합하면, 일반적으로 갈등의 개념은 당사자 간의 동의 여부, 이해관계의 양립가능성, 실제와 인식 간의 차이, 세계관 및 행위양식의 불일치 등의 요소로 구성된다.

p301

 

갈등의 양태가 워낙 다양하고 표출되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다 상당수의 개인적 갈등이 사회갈등 구조에 영향을 받는 측면이 강하므로 갈등의 생성-표출 구조를 논의할 때 사회변동의 과정에서 주요 사회집단들 사이의 자원 배분의 격차나 가치관의 간극을 중심으로 발생하는 집단적 갈등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p304

 

한국사회의 구조적 균열의 정도는 30개 국 중 12위였고, 잠재적 갈등 수준이 가장 높은 부문은 계층갈등이었다. 계층갈등에 이어 노사갈등, 지역갈등, 세대갈등, 민족·종교갈등 순으로 균열의 정도가 높았다. 이 결과는 사회통합위원회가 주관하는 “2012년도 사회통합에 대한 국민의식조사 결과와도 대체로 일치한다.

p309

 

한국의 갈등관리 역량은 OECD 국가 중 27위에 불과해, 구조적 균열이 심화되거나 분쟁화하는 것을 제어할 수 있는 역량이 미흡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갈등관리 역량의 모든 부문에서 지표가 평균 수준을 밑돌고 있어 체계적인 강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인다.

p312

 

단기적으로 구조적 균열 수준은 비슷하지만 갈등관리 역량이 높은 영미형 모델(기술적 관리 역량의 강화)을 참고하고, 중기적으로는 중균열·고갈등관리 역량의 독일형 모델(이해관계자 간 협의구조의 공고화와 신뢰 강화 병행)을 추구한 뒤, 장기적으로는 저균열·고갈등관리 역량의 북유럽형 국가(고차원적 신뢰 형성에 주안점)를 지향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인구 규모를 감안할 때, 저균열·고갈등관리 역량의 북유럽형 모델을 조기에 착근시키기는 곤란한 것으로 판단된다.

p317

 

역사적으로 한국은 후발 산업국가였다. 국가, 시장, 시민사회가 차례로 성장하면서 3자와 모두 관련된 복합갈등 양상이 표출되고 있다. 국가, 시장, 시민사회 각 영역의 교차점이 사회의 신뢰구조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공공선을 지향하는 이해관계 추구의 준칙이 형성되고 세 영역의 상호작용이 균형을 이룰 때, 갈등의 유기적 조정과 대형 분쟁의 제어가 가능할 것이다. 사회적 신뢰의 배양, 축적, 신장을 위해서는 비제도적 노력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비지배적 상호성을 통한 민주주의 질적 심화를 추구하는 것이 비제도적 노력의 핵심이다. ‘비지배적 상호성은 개인의 자율성과 시민적 덕성을 조화시키는 한편, 시민의 자발적 참여와 갈등의 민주적 해결을 동시에 촉진하는 정치적, 도덕적 판단 근거를 말한다. 이와 같은 비지배적 상호성을 민주적 심의의 조정원칙으로 삼아 갈등 상대방의 정당한 주장을 용납하고, 가치의 다원화와 상호성에 대한 고려를 실천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질적 심화를 추구하는 것이 요청된다. 한편, 적정한 사회적 긴장과 갈등을 발전의 동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합리적 토론을 통해 이해의 거래가 아닌 공동체의 복리를 중시할 필요가 있다. 갈등 당사자가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려는 조급함에서 벗어나, 대화의 양보를 통해 쉬운 문제부터 협상함으로써 상호 신뢰를 증진하고, 이를 바탕으로 타협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 이와 같은 비제도적 노력의 구체적 실천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p323

 

유형

사례

시사점

노사

독일의 미래협약: 의견조정 합의문화로 고통 분담

신뢰에 입각한 이익 조정

계층

덴마크의 복지개혁: 공적 부조와 일할 의무 교환

경쟁력 제고 위해 조화 선택

지역

벨기에의 연방제: 자치 영역의 확대

문화적 정체성의 보장

환경

미국 스노퀼미강 분쟁 조정: 민간 전문 역량 결합

중재 활용, 타협점 도출

입지

일본 원자연료 사이클 시설 건립: 주민 자체 조사

의구심 해소, 보상과 설득

p326

 

10장 한국의 시장경제: 제도의 부정합성과 가치관의 혼란

 

한국경제의 발전이 여전히 더 많은 자본 투자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래된 경제학에 의존한 구태의연한 발상이다. 실제 물적 투자, 교육 등의 요인은 성장의 투입요인이지만, 이 요인은 다른 요인에 의해 영향받는 매개변수라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Acemoglu et al. 2001). 또한 한국은 사회적 갈등 수준이 높고,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높은 국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회적 갈등을 낮추고 제도와 문화의 질을 높임으로써 경제성장을 높이려는 정책은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원인과 현상에 대한 체계적 연구조차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한국 사회와 경제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근본적 이유는 알지 못한 채, 드러난 문제에 대한 증상적 치유, 대증적 반응 등이 그동안 주류를 이루어왔으며, 그 결과 제도와 문화의 일관성과 정합성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p337

 

이 결과를 종합하면, 한국의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제도의 질, 그중에서도 비경제제도의 질이 낙후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론을 수렴하고 민주적 책임성을 높이며 국민과 소통하는 정부는 좋은 제도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그리고 정치적 안정성이 제고되고 폭력의 행사가 줄어들며 사법부의 독립성과 법에 의한 지배가 견고해지는 등 제도의 질이 증진되면, 이는 경제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이 결과는 규제의 질이 높아지고 부패 정도가 크게 감소해야 한국 경제성장의 새로운 추동력이 생겨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p346

 

경제성장의 요인들, 즉 자본, 정책, 제도가 1인당 국민소득에 결맞게 고루 발전되어 있는 대부분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한국은 물적·인적 자본의 강국이나 정책 항목 중 일부가 뒤떨어져 있으며, 제도의 측면에서는 함정에 빠졌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낙후되어 있다. 특히 제도 중에서도 경제제도는 비교적 발전된 반면, 비경제제도의 낙후성은 심각한 수준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발전된 것으로 평가되는 경제제도의 면에서도 각 경제제도의 수준의 편차가 큰 편이다. 즉 생산 활동과 직접적 연관이 있는 제도, 구체적으로 기업자유도, 투자자유도, 금융자유도는 높은 반면, 부패자유도, 노동자유도는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이다. 이는 제도의 부정합성, 즉 어떤 경제제도는 비교적 자유로운 시장경제 모델을 따르는 반면, 어떤 제도는 자유시장경제 모델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경제제도의 부정합성을 표준편차를 통해 살펴보면, 한국의 제도별 순위의 표준편차는 48.1로서 포르투갈(56.3), 스페인(49.1)보다는 낮으나, 타이완(46.7)보다는 높다. 그 이외 국가는 한국의 표준편차보다 훨씬 낮다(미국 5.8, 영국 12.3, 그리스 17.9, 일본 20.9, 멕시코 24.5).

p347

 

시장중심의 경제가 원활히 작동하기 위해서는 익명의 상대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며, 미국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한 신뢰, 즉 일반적 신뢰도가 높은 편이다. 미국은 급진적 혁신에 강하며, 따라서 급진적 혁신의 필요성이 높은 IT, 바이오, 금융 산업이 발달하였다.

일본의 경제제도는 미국과 대비되는 점이 많다. 집단주의적 가치관이 반영된 점이 그러하다. 고용관계는 평생직업이라는 단어가 함축하듯 장기고용이 많다. 그러나 1990년대 일본 경제의 침체 이후 경제적 효율성의 제고를 위해 비정규직 채용이 늘어나서 현재는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 모형으로 일본의 고용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기업 간 관계에는 장기발전을 도모하는 촘촘한 연결망이 형성되어 있어 독립적인 여러 기업의 연결사슬이 발달되어 있다. 금융제도는 주거래은행 제도를 통한 간접금융이 중요하였다. 고용과 해고의 자유가 낮은 편이며, 기업 내에서의 직업교육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기 때문에 기업은 직원 채용 시 인성이나 팀워크를 먼저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일본형 경제는 시장과 정부, 연결망이 서로 조율, 보완, 때로는 갈등을 일으키면서도 비교적 일관된 제도를 형성하였다.

p350

 

현재 한국은 단기와 장기고용의 혼재, 직접과 간접 금융의 혼재,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수직적 비대칭적 연결망, 고용의 자유는 높으나 해고의 자유는 낮은 노동시장 등, 비전형적인 제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국가에서는 복지 수준도 높은 편이나 한국은 비교적 최근에 이르러서야 복지 지출이 크게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시장을 적극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면서도 시장을 지탱해주는 신뢰 수준은 낮은 편이며, 시장에서 낙오되는 개인에 대한 사회안전망은 미흡하다. 그리고 노동시장이 경직적이기 때문에 기득권 세력(인사이더)과 진입 세력(아웃사이더)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혼재와 혼란은 경쟁력 보유 산업 면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한국은 자동차, 조선 산업 등 상대적으로 비시장 중심의 경제에서 경쟁력을 보유하기 쉬운 분야에서도 경쟁력을 가진 동시에, 급진적 혁신이 필요한 IT 산업에서도 경쟁력을 갖고 있다. 즉 일관성이 결여된 한국형 경제체제는 경쟁력 보유 산업의 스펙트럼이 넓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규모에 비해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는 산업 스펙트럼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특히 시장적 계약관계 혹은 신뢰에 바탕을 둔 연결망 관계가 아닌 비대칭적 지배관계로 대기업과 하청 중소기업의 경쟁력은 크게 낮은 등 구조적 문제가 심각하다.

이처럼 한국형 경제제도는 하나의 특징으로 일관되게 설명하기 어려운, 다양한 경제제도가 일관성을 상실한 채 뒤섞여 있는 경제체제이다. 이러한 제도의 부정합성은 정부 주도의 성장 과정에서 경제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직접적 요인에 집중하여 정책을 편 결과이기도 하다. 또한 문제가 발생하면 단기적, 대증적, 여론영합적으로 해결하려 한 결과가 이를 가져온 측면도 있다. 그리고 제도의 부정합성은 다음에서 논의할 한국인의 가치관의 아노말리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p351

 

물질주의 가치관과 이를 위한 지나친 경쟁은 타인을 신뢰하기보다 경쟁 대상으로 간주하게 한다. 그리고 물질주의가 심할수록 부패가 증가하고 사회 갈등을 심화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경제적 비효율성의 증가로 이어져 경제성장을 저해한다. 그러나 물질주의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물질주의 가치관은 그에 걸맞은 제도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세계화의 영향으로 투명성, 객관성, 평등성을 지향하는 제도들이 도입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어떤 제도는 전통적인 요인에 기초하여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한국에서 제도의 부정합성이 초래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경제성장 위주의 제도적 구성, 세계화의 영향으로 수입된 제도, 전통적 제도 등이 상호 충돌하는 현장이 바로 한국사회이다. 여기에다 단기성과 위주의 정부 정책과 기업 경영, 국민의 감정을 자극하고 이를 통해 시청률과 구독률을 올리려는 일부 언론과 문화계의 선정주의(sensationalism), 그렇게 형성된 여론의 압력을 받은 정부와 정치권은 제도의 상호 정합성을 숙고할 시간조차 갖지 못한 채 인기몰이식, 땜빵식 제도를 난립시켜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p358

 

가치관의 혼란에 빠진 한국인은 타인에 대해서는 엄격한 윤리 수준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 교육에서 모범을 보인 위인들의 이야기를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이상주의적 경향도 보인다. 예를 들면 공무원은 나라에 봉사하는 사람으로서 박봉을 감수해야 하며 퇴직 후에도 전관예우를 받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고시에 합격하여 공무원이 된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과 보수 수준의 불일치를 경험하면서 어떤 식의 보상을 바라거나 추구하게 된다. 이들은 부패에 직접 가담할 수도 있고 퇴직 이후 그동안의 박봉을 보상받는 것을 자연스럽고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도 강력한 물질주의 가치관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중심적 경제체제에서는 이들의 보수를 현실화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의 일탈 행위나 전관예우를 규제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공무원의 보수에는 이상주의적 원리(국가에 봉사)를 적용하면서 오히려 규제만 강화하려 든다. 그러나 이는 규제의 영향에서 비켜날 수 있는 더 교묘하고 새로운 방법의 개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규제가 정말 효과적으로 실행된다면 능력이 우수한 사람은 공무원이 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한국인의 가치관은 일관성이 없는, 이른바 아노말리 현상을 두드러지게 보이고 있다. 또한 높은 물질주의와 부패 수준, 낮은 신뢰 수준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서로 강화하면서 한국사회의 부정합성을 초래하고 있다. 이러한 가치관과 사회규범의 특질은 부정합적인 제도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전통과 관행의 습관이 남아 있는 가운데 미국식 시장경제제도, 세계화의 영향을 받은 제도가 들어와 상호 충돌을 일으키면서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한국인의 가치관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 것이다.

p360

 

 

11장 한국사회의 역사적 특질: 한국형 시장경제체제의 비교제도적 토대

 

2013년 아오키는 종래 일본경제를 주요 대상으로 하여 그가 주도적으로 개척해온 비교제도분석을 한국경제와 중국경제에 적용하여 동아시아 3국의 경제체계를 비교분석하는 주목할 만한 논문을 발표하였다(Aoki 2013). 주지하듯이 일본의 이른바 조정시장경제는 기업 간 게이레츠, 회사주의, 종신고용, 연공서열과 같은 특질을 지닌다. 아오키는 이 같은 일본경제의 특질이 그의 전통 사회와 문화에 기인하는 역사적 관련성을, 그 역사적 경로의존성을, 반복적 게임의 전략적 균형이라는 틀로 설명하였다. 아오키에 있어서 제도는 어느 인구집단에 있어서 행해졌고, 행해지고 있고, 행해질 것으로 믿어지는 사회적 게임의 가장 두드러진 방식이다. 게임의 반복성과 지속성, 그 특질에 대한 개별 경기자의 믿음은 어떤 외적인 인지적 원천에 의존한다. 그것은 법, 규범, 단체, 종교적 이념과 같은 것들로서 곧 공식적 내지 비공식적 제도이다.

p370

 

한국경제가 전통사회로부터 물려받은 비교제도적 특질과 관련하여 아오키는 식민지기의 활발한 농촌개발, 인구이동, 인적자본의 축적에 주목한다. 그것은 한국 전통사회에 내재한 사회의 융통성과 개방성, 그리고 활발한 사회협약의 능력에 기인하였다. 오늘날 한국겨엦의 국제경쟁력을 대변하고 있는 대기업집단에 관한 아오키의 이해는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 선행하는 시대에 상대적으로 덜 제약적인 인간의 유동성을 상기하는 민첩한 기업전략은 준가족적(quasi familial)인 재벌들을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집단으로 만들었다

일본사회와 중국사회에 대한 아오키의 비교적 이해는 양국의 지성사에서 오랜 전통을 갖는 것이다. 1947년 중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훼이샤오통은 서양사회가 안팎의 경계가 명확히 그어진 단체를 단위 구성으로 하여 그것을 차곡차곡 쌓은 짜임새를 갖는다면, 중국사회는 마치 수면에 돌을 던질 때 생기는 파문의 겹과 같은 자아중심의 사회라고 하였다. 영향력이 큰 사람의 파문은 현과 성의 범위를 넘을 수도 있지만, 보잘것없는 사람의 파문은 두세 사람에 그친다. 중국사회는 이같이 각 사람이 만들어내는 파문의 중첩으로, 곧 전술한 콴시로 짜인다. 훼이샤오통은 이 같은 중국사회의 짜임새를 차서격국이라 하였다. 그에 비해 일본의 전통사회에서 각 사람은 그에 부여된 직분에 따라 견고하게 조직된 단체에 소속하였다. 사회는, 나아가 국가는, 이 단체가 견고하게 쌓인 구조이다. 일본의 역사학자 기시모토 미오는 중국과 대비되는 이 같은 일본사회의 짜임새를 단체격국으로 비유하였다.

그렇다면 한국 전통사회의 짜임새는 어떠하였던가. 일본, 중국과 대비하여 어떠한 특질의 원리를 지녔던가. 이 같은 질문에 많은 연구자는 한국은 일본과 중국의 중간형이라고 대답해왔다. 이 문제에 관해 지금까지 가장 진지한 관심을 표명해온 연구자는 미야지마 히로시이다. 미야지마에 따르면 한국의 가족·친족과 촌락의 구성은 중국적 원리와 일본적 원리를 능숙하게 결합한, 양쪽의 장점을 모두 흡수한, 중간형에 해당한다. 따라서 한국의 전통사회는 일본의 단체와 같은 조직의 안정성을 구가하면서도 중국의 콴시와 같은 상황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동시에 보유하였다. 한국의 전통사회가 활발한 사회협약의 능력을 보유하였다는 아오키의 이해도 이 같은 미야지마의 한국사회론과 상통하고 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중간형은 하나의 유형일 수 있는가. 중간형 나름의 원리는 있는가. 중국사회의 짜임새가 차서와 그것의 중첩으로서 콴시라면, 일본사회의 짜임새가 직분에 기초한 단체의 결성과 그것의 누적이라면, 한국사회의 짜임새는 무엇인가. 이 같은 질문에 미야지마는 대답하고 있지 않다. 필자가 미야지마의 중간형 사회론에 비판적인 가장 심각한 이유는 사회를 그 전체적 구조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후술하겠지만, 17~19세기 조선 농촌사회의 구성원들은 양반과 상민이라는 신분으로 대립하고 갈등하였다. 조선왕조의 지배체제도 그 같은 신분적 차별을 정당화하였다. 이 점은 동시대 일본과 중국에서 찾을 수 없는 한국 고유의 현상이다.

p373

 

조선왕조는 개별 인간의 노동력을 재원으로 파악하여 그로부터 역을 수취하였다. 이 같은 인간 지배체제는 중국의 경우 9세기 당 왕조까지의 일이며, 10세기 송 왕조 이후에는 소멸하였다. 그에 비해 조선왕조의 개별 인간에 대한 지배체제는, 다소간의 이완을 보이긴 했지만, 19세기까지 완강하게 지속하였다. 오히려 조선왕조에 이르러 개별 인간에 대한 지배체제는 이전의 고려왕조에 비해 일층 강화되었다. 크게 말해 한국사에서 국가의 지배체제가 오로지 토지에 대한 지배로 순화하는, 중국사에서의 당송변혁과 같은, 큰 변화는 경험되지 않았다. 그 점이야말로 다른 나라의 역사와 대비되는, 한국사가 안고 있는 최대의 특질이라고 할 수 있다.

p381

 

양반의 우월한 신분적 지위는 농촌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위한 공공의 질서와 기능을 창출하고 공급함에 그 정당적 근거를 두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농촌사회와 이해를 같이하는 진정한 의미의 지방세력이 아니었다. 그들의 신분적 특권은 왕조로부터의 우대에 그 근거가 있었다. 중앙권력에 연원을 두지 않은 양반은 없었다. 농촌에 정착한 후에도 그들의 시선은 언제나 중앙의 조정으로 향해 있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서원과 서당을 세우고 그들의 자제를 교육하여 중앙관료로 출세시킴에 최대한의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p383

 

흔히 두레로 불린 이 같은 공동노동의 조직과 관행은 종래 한국인들의 우수한 공동체 문화를 상징하는 민속으로 알려져왔지만, 근래의 인류학적 연구는 그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고 있다. 두레의 전형은 양반세력이 강한 반촌에서 상계가 하계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강제체제와 그에 부수하는 문화였다. 동리의 양반 부민들은 두레를 통해 가난한 하민들의 노동력을 수탈하였다. 두레는 소농의 자율적인 노동 과정을 억압하였다. 두레의 성립은 17~18세기에 걸친 이앙법의 보급이 그 주요 계기였다고 이해되고 있는데, 필자의 소견으로는 상하합계의 동계의 성립이 그 사회적 계기로서 더 중요했다고 보인다. 동계가 결성되지 않은, 수적으로 다수였던, 상민 신분의 민촌에서 어떠한 협약이 맺어졌는지, 거기서 15~16세기의 향도는 어떻게 계승되고 있었는지는 참고할 문헌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유교의 침투가 미약하였던 함경도 등 북부 산간지대에서는 20세기 전반까지 향도의 유제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나머지 지방에서 향도가 체현하였던 유교 이전의 전통 신앙과 생활문화는 양반세력의 억압을 받아 점점 위축되었음이 분명하다.

p391

 

일제하에서 발족한 한국문명의 근대적 전환은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으로 그 정치적 결실을 맺었다. 건국과 더불어 실시된 농지개혁은 근대적 전환에 박차를 가하였다. 농지개혁에 의한 지주제의 폐지는 그에 부대하였던 반상제의 유제를 해소하는 일대 계기였다. 전형적인 반촌에서 잔존했던 노비들이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추는 것은 농지개혁 이후였다. 반촌에서 하민들을 양반가의 상여군으로 동원하는 관행도 농지개혁을 경계로 소멸하였다. 두레 민속도 하민들의 반발을 맞아 중단되었다. 농지개혁 이후 한국인들은 명실공히 그 신분적 지위에서 자유롭고 평등해졌다.

p400

 

1950년대의 한국인을 가장 친밀하게 결속한 친족집단도 실은 그리 잘 단합된 공동체가 아니었다. 1964년에 이루어진 사회학적 조사는 친족집단의 기본 기능이 제사의 거행과 족보의 편찬 등, 가문의 위세를 드러냄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공유재산에서 나오는 적지 않은 수입 대부분은 그러한 위선사업에 투여되었으며, 가난한 족원을 위한 공동체적 부조는 거의 없었다. 친족집단의 내부에는 종가를 중심으로 한 위계가 형성되어 있어서 갈등의 소지를 내포하였다. 공유재산의 관리와 시제의 봉행은 종가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나머지 족원들은 단지 시제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의 원 신분을 과시하는 효용을 누렸을 뿐이다. 진정한 의미의 생활공동체는 동고조의 이른바 당내집단으로 한정되었다.

p401

 

나선사회가 고도 성장에 제공한 동력에 관해 설명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고도성장을 지휘한 박정희 대통령은 마치 잘 알고 있었던 양 능숙하게 나선사회의 짜임새와 친화적인 개발정책을 추구하였다.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은 정부가 주도하여 세계시장에서 국제경쟁력을 갖춘 대규모 공장을 기간산업에서부터 차례로 건설해가는 과정이었다. 이 같은 경제정책의 원리를 가리켜 우원철은 엔지니어링 어프로치라고 간명하게 요약하였다. 공장의 성공적 건설과 경영은 소수의 신뢰할 만한, 능력이 검증된 기업가들에게 맡겨졌다. 정부는 그들의 재산권을 보장하였으며, 외국자본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였으며, 다소간의 경쟁력을 갖추었다고 판단되면 국제시장에 진출하도록 몰아쳤다.

p416

 

재벌을 위시한 소수의 엘리트가 누리는 특별한 기회는 고도성장의 경주가 끝나자 다수 대중이 제기하는 불만의 대상이 되었다. 핸더슨의 별로 유쾌하지 않은 지적대로 한국적 소용돌이의 역사는 그 상층부가 권력을 지향하는 엘리트들의 파당이 주도하는 비생산적인 도덕논쟁으로 일관되어왔다. 고도성장을 주도한 권위주의 정치체제가 해체되고 이른바 민주화 시대가 개막된 것은 그러한 정치적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이후 권력을 잡은 정치 엘리트들은 기회와 소득의 평등을 가치로 내걸고 대기업집단을 억누르면서 중소기업이 주도하는 성장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자 무던히도 노력하였지만, 지금까지 근 30년간 그리 볼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것은 나선사회의 짜임새와 친숙한, 그리하여 다수의 한국인이 신바람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역사적 경로가 아니었다.

p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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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선

경제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만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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