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_지그문트 바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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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돌링이 보기에 불평등의 지속을 뒷받침하는 부정의의 교의는 이것만(사익 추구가 공익에 기여한다)이 아니다. 그는 현실적 증거가 전혀 없거나 비판적으로 검증된 적이 없는데도 대중들의 인식과 태도와 행위에 끈질기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다른 암묵적이고 은폐된 믿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돌링은 그와 같은 부정의와 교의들엘리트주의가 효율적이다’, ‘배제는 정상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건강을 위해 필요하며, 부에 대한 욕망은 삶의 향상에 이바지한다.’, ‘이런 것들로 인해 초래되는 절망은 불가피하다같은 것들을 들고 있다.

p37

 

우리가 호모 엘리겐스의 종 즉 선택하는 동물에 속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무리 강력하고 고통스럽고 끈질긴 압력도 우리의 선택을 완전히 봉쇄함으로써 우리의 행동을 완전히 결정지은 적은 없으며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으리라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큐가 보내는 방향대로 당구대 위에서 움직이는 당구공이 아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자유로울 운명을 타고 났다. 선택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아무리 갈구한다 해도, 우리 앞에는 언제나 하나 이상의 길이 놓여 있을 것이다. 우리의 선택, 우리의 생활 방식, 우리의 삶의 궤적을 합작하는 자율적인 요소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운명이다. 운명은 우리가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종류의 상황으로, 태어난 곳이나 부모의 사회적 위치, 태어난 시기처럼 우리의 행위와 관계없이 우리에게 일어나는일들이다. 다른 하나는 인격이다. 우리는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우리의 인격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인격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인격을 함양시킬 수 있다. ‘운명은 현실적 선택지들의 범위를 결정하지만, 그 범위 내에서 우리의 선택을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인격이다.

p39

 

사회적 비용이 큰 선택일수록 선택될 확률이 낮다. 그리고 선택하는 사람들이 고분고분히 선택할 때 받게 되는 보상처럼 압력을 받고 있는 선택을 거부할 때 드는 비용도 주로 사회적 용인, 지위, 위신이라는 소중한 통화로 지불된다. 우리 사회에서 이 비용들은 불평등과 불평등의 공적, 사회적 결과들에 대한 저항을 매우 어렵게 만들고 따라서 저항하기보다는 체념하고 얌전히 굴복하거나 아니면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길을 시도하고 추구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조정된다.

p41

 

뛰어난 철학자이자 예리한 소설가로 우리 세게의 죄와 실수, 어리석음을 날카로운 눈으로 끈질기게 기록해온 존 쿳시(John M. Coetzee)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의 세계가 원래부터 서로 경쟁하는 경제 주체들로 갈라지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주장은 궤변이다. 경쟁적 경제는 우리가 그것을 만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출현한 것이다. 경쟁은 전쟁의 순화된 대체물이다. 전쟁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쟁을 원하면 전쟁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선택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경쟁을 원한다면, 우리는 경쟁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경쟁 대신에 우호적 협력을 하기로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선조들이 선택하고 실행에 옮긴 결정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건 아니건 간에 21세기 초의 우리의 세계가 인간적 연대와 우호 협력은 고사하고 평화 공존에도 우호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의 세게는 협력과 연대를 인기도 없고 게다가 힘들고 값비싼 대가까지 치러야 하는 선택으로 만든다. 그러니 오늘날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극소수의 경우에만 물질적 그리고 혹은 정신적 힘을 발휘해 그와 같은 힘든 선택을 하고 끝까지 지켜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p45

 

3장 새빨간 거짓말, 그보다 더 새빨간 거짓말


이제 상황에 대한 이의 제기와 상황을 지속시키는 생활 방식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잃어버린 혹은 도둑맞은 인권, 즉 존중되고 원칙들을 인정받고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할 인권에 대한 정당한 방어로 간주되지 않는다. 이제 반대의 목소리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면 어떠한 악덕보다도 해로운 (중략) 모든 실패자들과 약자들에 대한 동정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관용과 묵인 속에 늘 존재하던 최대의 위험으로 간주된다. 이런 식으로 획책된 대중적 믿음들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불평등의 흐름을 저지하고 더 나아가 그러한 흐름의 확산을 막고 제한하려는 모든 진지한 시도로부터, 불평등을 보호하고 폭넓은 사회적 지지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매우 효과적인 방패 역할을 한다.

p73

 

문제는 지구적 자본주의의 세계가 파국을 막는 데 필요한 장기 목표들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는커녕 아예 착수할 능력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활 방식과 그 지침이 되는 가치들을 근본적으로 다시 고찰하고 수정할 필요가 있다. 벨처(Harald Welzer)는 말한다. “위기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전에는 결코 생각해본적 없는 비전이나 비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발상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한 비전이나 발상들이 순진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기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기차의 진행 방향과 반대로 내달리면, 대규모의 파괴를 일으키고 있는 기차의 속도와 방향이 바뀔 것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정말로 순진한 것이 아닐까?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말했듯이, 문제들은 애초에 그 문제들을 만들어낸 사고 패턴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진로를 바꿀 필요가 있으며, 그러자면 먼저 기차부터 정지시켜야 한다.

p85

 

대니얼 돌링(Daniel Dorling)의 주장처럼, “부자 나라들 내에서 사회적 불평등이 지속되는 것은 부정의의 교의들에 대한 지속적인 믿음 때문이며, 따라서 사람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구조의 많은 부분에 잘못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노예제가 존재하던 시대에 노예 농장을 소유한 가족들은 노예에 대한 소유권을 자연적인 것으로 보았다. 또한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것이 자연의 섭리로 여겨진 적이 있었듯이, 많은 이들에게 우리 시대의 너무나 커다란 부정의는 정상적인 경관의 일부일 뿐이다.”

p88

 

미국의 사회학자 배링턴 무어(Barrington Moore Jr.)는 불평등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다룬 주요 저서 부정의: 복종과 반역의 사회적 토대에서, ‘정의부정의에 의거해 규정되는데도 오히려 부정의가 더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구체적인 사회적 상황에서 정의의 기준은 항상 당시에 가장 불쾌하고 고통스럽고 분노를 유발한다고 생각되는(따라서 극복되고 제거되었으면 하고 가장 열렬히 소망되는) 형태의 부정의에 의해 환기되거나 암시되며 때로는 결정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무어는 정의부정의의 구체적 사례의 부정으로 본다.

p89

 

오늘날에는 우리 같은 다른 사람들, 우리 자신의 과거 신분이나 생활수준도 자연적인 비교 기준이 아니다. 지금은 높든 낮든모든 생활 형태가 공개적으로 전시되고 있어 누구나 볼 수 있으며 원칙적으로는 누구나 누릴 수 있을 것 같은 유혹적인 착각을 불러일으키거나 그 정도는 아니라도 최소한 누구에게든 팔려고 내놓여져있다. 공간이나 시간상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고 아무리 이국적인 생활 형태라도 원칙적으로 자신의 생활 형태의 비교 기준이자 평가 척도로 선택될 수 있다. 애초에 목표로 삼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혹시 있을지도 모를 다른 사람들까지 찾아내기 위해 수신인을 가리지 않고 메시지를 열린 공간에 내보내는 다큐멘터리, 다큐드라마, 가십 칼럼, 광고 같은 것들, 그리고 인권이란 그것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상정되는 존재들 간의 신분이나 지위의 차이에 대한 수용이나 승인은커녕 인식조차 완강히 거부한다고 보는 인권관은 이러한 추세를 더욱 부추긴다. 그리하여 부정의한불평등들을 발견해내고 정확히 짚어내는 일은 주관적 판단에 맡겨지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사실상 탈규제되고 상당히 개인화되었다.

p92

 

개인의 재능과 능력들의 자연적 불평등에 대한 믿음은 수백 년 동안 사회적 불평등이 무리 없이 수용되는 데 기여한 가장 강력한 요소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사회적 불평등의 확대를 제어하는 매우 효과적인 브레이크의 역할도 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불평등의 부자연스러운정도, 즉 부정의한 정도를 탐지하고 측정하는 기준을 제공했고 또한 그것의 수정을 요구했다. 사회적 복지국가의 전성기에 볼 수 있었듯이, 때로 그것은 사회적 위계의 상층과 하층 간의 간극을 얼마간 좁히는 역할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회적 불평등은 자연스러움이라는 가면을 쓰지 않고도 스스로를 영속화하는 방법들을 찾아내고 있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회적 불평등은 패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사회적 불평등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이제는 다른 논증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회적 불평등은 그렇게 하는 대신에 자연스러움에 근거한 자기변호를 중단해버렸다. 그리하여 부자연스러움이라는 둘도 없는 벗을 근거로 이루어지던 지나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은 제거되거나 최소한 축소되었으며, 사회적 불평등의 결과들은 중립화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사회적 불평등은 스스로를 영속화할 수 있는 능력에다 스스로를 선전하고 강화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게 되었다. 이제 사회적 불평등의 행진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p94

 

4장 말과 행위 사이의 간극


주체-객체 관계에 대한 서술은 권력’, ‘통치혹은 지배에 대한 서술과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 사물들이 정의, 분류, 평가, 취급되는 방식은 주체가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해 결정되고 주체의 편의에 따라 조정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 경향이 있다. 본래 수동적이고 감각이 없고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물들은 본래 능동적이고 지각과 판단 능력을 가진 주체들에 봉사하기 위해 거기에 존재할 뿐이다. 사물들은 바로 그런 한에서만 사물이다. 그것들은 고유의 물질적성질들 때문이 아니라 주체에게 선택되는 관계 때문에 사물들인 것이고, 그러한 선택을 하는 것은 주체다. 대상에 사물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도, 사물들이 그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잡아놓고 있는 것도 주체다. 이렇듯 사물의 지위는 대상들의 결정권과 선택권, 결정 능력과 선택 능력을 부정함으로써 즉 선호들을 표현하고 선호들에 대한 인정을 요구할 대상들의 권리와 능력을 부정함으로써 혹은 사물들에게서 그런 권리 그리고 혹은 능력을 박탈해버림으로써 부여된다.

p98

 

소비주의 문화는 사람 사는 세상 전체를 구석구석까지 오로지 잠재적 소비 대상들로만 가득 차 있는 거대한 컨테이너로 가정함으로써 소비자 시장들에서 정해진 기준들에 따라 각각의 세속적 실체들에 대한 인식과 평가를 정당화하고 촉진한다. 그러한 기준들은 고객과 상품, 소비자와 소비재 사이에 극심한 비대칭적 관계를 확립한다. 고객과 소비자가 상품과 소비재에서 기대하는 것은 자신들의 필요와 욕구와 소망의 충족일 뿐이고, 상품과 소비재의 의미와 가치는 오로지 고객과 소비자의 기대들을 얼마나 충족시키느냐에 따라서만 주어진다. 소비자들은 자신들의 필요나 의도에 바람직하거나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대상들이 얼마나 기대에 부응하는지,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람직함 그리고 혹은 적절함을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하는지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대상들을 바람직하지 못하거나 무관심하거나 무의미하거나 부적절한 대상들로부터 자유롭게 분리시킬 수 있다. 소비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물들은 쾌락을 제공하는 능력이 감소하지 않는 한은 소비자들에게 유용성을 갖는다. 그 능력이 감소하는 즉시, 그것들은 유용성을 상실한다. 우리는 상점에서 구매하는 상품들, 사물들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 우리는 상품들이 더 이상 쾌락이나 위안을 주지 않게 되더라도 그것들이 우리가 사는 공간을 어지럽히도록 내버려 두겠다고 보장하기는커녕 약속도 하지 않는다. 구매된 상품들의 유일한 용도는 약속된 쾌락이나 위안을 제공하는 데 있다. 그것들이 더 이상 쾌락이나 위안을 제공하지 않게 되거나 소유자 또는 사용자들이 다른 데서 더 많은 만족이나 질적으로 더 나은 만족을 얻을 수 있게 되면, 상품들은 폐기되거나 대체될 수 있고 그래야만 하면 대개는 실제로 그렇게 된다.

p100

 

인간 대 인간의 관계는 대칭적이다. 여기서 관계의 양측은 각기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다. 주체와 객체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관계의 양측 모두 동기를 가진 행위자인 동시에 자주적 결정의 원천이자 의미의 구성자이다. 둘 모두 능동적 존재로 참여하는 상호작용에서 시나리오의 공저자, 즉 행위를 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행위의 대상이 되는 자이기 때문에 장면 설정은 두 면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중략) 같은 상황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면서 사전에 충분히 조정되지 않는 목표들을 추구하는 두 명의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행위자인 두 주체 간에는 영구적으로 충돌 가능성이 현존하기 때문에, 위험들은 제거될 수 없으며 영구적 긴장을 야기한다. 그러므로 마찰은 불가피하다. (중략)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대가가 너무 비싸고 지불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소비자 시장의 메시지는 다름 아니라 바로 그들에게 인간관계에 따르는 불쾌함과 불편함의 제거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우리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제안에 매력을 느껴 그것을 전적으로 수용하고는 기쁨에 겨워 그러한 거래가 가져올 손실을 알지 못한 채 올가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약속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이 초래하는 손실은 막대하며, 신경쇠약과 어둡고 모호하고 산만하고 이유 없는 두려움들로 치러진다. (중략) 함정에 빠진 사람들에게, 세계는 의심과 용의자들로 가득 차 있는 곳으로 비춰진다. 이런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전부 혹은 거의 전부는 무죄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유죄인 반면, 무죄 선고는 추후 통지가 있기 전까지는 언제든 상소나 즉각 파기의 가능성이 있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는 임시변통일 뿐이며 요구 즉시 탈퇴 기능을 명시해놓은 조항을 동반한다. 헌신은 무모한 것이 된다. 장기적인 헌신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영구적인 결합이 아니라 유연한 결합이 끈질기게 권유되고 실제로 수요도 많다. 우리는 안전을 위해 인간의 선의와 친절보다는 입구에 있는 CCTV, 무장경호원에 더 의존한다. 그러한 함정에 빠져 버린 세계는 신뢰와 연대, 호의적 협력에 대체로 우호적이지 않다. 그러한 세게는 상호 의존과 충성, 상호부조, 사심 없는 협력, 우정 등을 평가절하하고 폄하하며, 그렇기 때문에 갈수록 차갑고 낯설고 매력 없는 곳이 된다. 우리는 마치 어떤 사람의 사유지를 방문한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과도 같다.

p103

 

카네티는 오늘날 작가는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작가가 존재하기를 열렬히 바라야 한다고 주장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한 바람에 따라 행위를 한다는 것은 성공 가능성이 아무리 희박해도 현실적이 되려고 계속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고 여러 세계 가운데 가장 맹목적인 것으로 규정할 세계에 살면서도 그 세계의 변화 가능성을 역설하는 사람들의 존재다.’ 세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비합리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결정에 대한 책임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두 감수하면서까지 세계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논리가 초래하는 맹목으로부터, 타자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과로부터 세계의 논리를 구원할 마지막 기회다.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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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선

경제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만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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