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_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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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흰에 대한 한강의 시선을 담은 책이다. 단순히 소재에 집착한 것이 아니라 서사의 흐름이 연결되어, 흡착력 있는 매력이 있다. 그녀의 슬픈 시선을 공감하며 세상의 한 조각에 함께 아파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태어나 두 시간 동안 살아 있었다는 어머니의 첫 아기가 만일 나를 이따금 찾아와 함께 있었다면나로서는 그걸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그이에게는 언어를 배울 시간이 없었으니까한 시간 동안 눈을 열고 어머니 쪽을 바라보았다고 했지만아직 시신경이 깨어나지 않아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오직 목소리만을 들었을 것이다죽지 마죽지 마라 제발알아들을 수 없었을 그 말이 그이가 들은 유일한 음성이었을 것이다그러나 확언할 수도부인할 수도 없다그이가 나에게 때로 찾아왔었는지잠시 내 이마와 눈언저리에 머물렀었는지어린 시절 내가 느낀 어떤 감각과 막연한 감정 가운데모르는 사이 그이로부터 건너온 것들이 있었는지어둑한 방에 누워 추위를 느끼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니까죽지 마죽지 마라 제발해독할 수 없는 사랑과 고통의 목소리를 향해희끗한 빛과 체온이 있는 쪽을 향해어둠 속에서 나도 그렇게 눈을 뜨고 바라봤던 건지도 모른다.

p36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 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p40

 

파도

멀리서 수면이 솟아오른다. 거기서부터 겨울 바다가 다가온다. 힘차게, 더 가까이 밀려온다. 파고가 가장 높아진 순간 하얗게 부서진다. 부서진 바다가 모래펄을 미끄러져 뒤로 물러난다. 물과 물이 만나는 경계에 서서 마치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파도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동안 (그러나 실은 영원하지 않다-지구도 태양계도 언젠가 사라지니까), 우리 삶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만져진다.

부서지는 순간마다 파도는 눈부시게 희다. 먼 바다의 잔잔한 물살은 무수한 물고기들의 비늘 가탇. 수천수만의 반짝임이 거기 있다. 수천수만의 뒤척임이 있다(그러나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

p58

 

입김

어느 추워진 아침 입술에서 처음으로 흰 입김이 새어나오고,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 우리 몸이 따뜻하다는 증거. 차가운 공기가 캄캄한 허파 속으로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덥혀져 하얀 날숨이 된다.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

p72

 

하얗게 웃는다

하얗게 웃는다, 라는 표현은 아마 그녀의 모국어에만 있다.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 사람이다.

그는 하얗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 아마 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p80

 

백목련

스물다섯, 스물네 살의 대학 동기 둘이 비슷한 시기에 죽었다, 버스 전복 사고와 군부대 사고로. 이듬해 이른봄 같은 학번 졸업생들이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만들어, 문학 수업을 듣던 강의실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어린 백목련 두 그루를 심었다.

여러 해 뒤 그 생명-재생-부활의 꽃나무들 아래를 지나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대 왜 우리는 하필 백목련을 골랐을까. 흰 꽃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걸까, 아니면 죽음과? 인도유럽어에서텅 빔(blank)과 흰빛(blanc), 검음(black)과 불꽃(flame)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는다고 그녀는 읽었다. 어둠을 안고 타오르는 텅 빈 흰 불꽃들-그것이 삼월에 짧게 꽃피는 백목련 두 그루인 걸까?

p81

 

각설탕

열 살 무렵이었다. 막내고모를 따라서 처음으로 커피숍에 갔을 때 그녀는 각설탕을 처음 보았다. 흰 종이에 싸인 정육면체의 형상은 완벽할 만큼 반듯해, 마치 그녀에게 과분한 무엇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종이를 벗겨내고 하얀 각설탕의 표면을 쓸어봤다. 귀퉁이를 살짝 부스러뜨려보고, 혀를 대보고, 아찔하게 달콤한 표면을 조금 갉아먹고, 마침내 물잔 속에 넣어 녹는 과정을 지켜보는 탐험을 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단 것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지만, 이따금 각설탕이 쌓여 있는 접시를 보면 귀한 무엇인가를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것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p83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회복될 때마다 그녀는 삶에 대한 서늘한 마음을 품게 되곤 했다. 원한이라고 부르기엔 연약하고, 원망이라고 부르기에는 얼마간 독한 마음이었다. 밤마다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이마에 입 맞춰 주던 이가 다시 한번 그녀를 얼어붙은 집 밖으로 내쫓은 것 같은, 그 냉정한 속내를 한 번 더 뼈저리게 개달은 것 같은 마음.

그럴 때 거울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그녀 자신의 얼굴이라는 사실이 서먹서먹했다.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이 그 얼굴 뒤에 끈질기게 어른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p98


하얗게 웃는다

우리는 하얗게 웃는다. 그 의미는 모두 다르지만, 모두 하얗다.

우리는 아니, 나는 왜 하얗게 웃는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사람에 관심을 쏟는 작가의 시선으로나마 간접적으로 하얗게 웃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하이얀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정말로 즐겁다 아니, 슬프기도 하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즐겁기도 슬프기도한 이 양가적인 상황을 읊으며 지내고 싶다.

흘러가는 시간은 느려지고, 바라보는 세상이 뒤틀려진다.

너무나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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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선

경제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만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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