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민족주의와 홍콩 본토주의_류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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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 책의 구성이 홍콩의 역사 박물관인 '홍콩 스토리'를 기준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읽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 또한, 몇 가지 관점에서 인용된 문구는 나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울만큼 저자의 논리와 벗어나서 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점은 나의 협소한 시각 때문에 발생한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런 생각 때문에 읽는 내내 불편한 감정이 들어서 여러모로 편치 않았다. 하지만, 국내에 몇 안되는 중국과 홍콩 사이의 관계를 묘사한 책이다. 내가 찾기로는 유일했다. 최근 홍콩 시위와 관련해서 시각을 넓히고 싶다면 불편함을 감수하고 읽기를 추천한다.


2. 홍콩의 박물관

 

박물관은 민족과 국가를 상상하게 만드는 비결이다. 분리주의적 민족주의의 대두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국민국가의 박물관은 주목대상임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박물관에서 보았던 것은 절대 진리이니 절대로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라는 모범 이미지가 지속적으로 은근하게 관객의 뇌리에 자리 잡게 된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박물관이 주는 확정적 이미지는 매우 강력하다.

p32

 

3. 탈본토 스토리

 

한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모호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여러 학자들이 지적한 대로 혈통적으로 한족을 규정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한족 자체가 이른바 중원을 중심으로 이민을 받고 이민을 나가서 이루어진 민족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족의 역사를 이민의 역사로 보는 것이다. 대만의 전 총통 리덩후이는 한걸음 더 나아가 중국이라는 단어 자체가 애매모호한 것이라고 한 적이 있다. 레이 초우는 혈연 신화설을 제기하여, 중화민족의 혈연 특징은 상상처럼 그렇게 순수하지도 안정적이지도 않다고 하면서, 국민을 복종시키는 민족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했다. 어디 중화민족 뿐이겠는가! 민족의 생성에 대해 조사해보면 혈연으로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언제나 그랬듯이 민족이나 민족주의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일찍이 앤더슨은 민족을 상상으로, 홉스본과 랭거는 전통의 반복 창조, 호미 바바는 혼잡한 후식민 쟁탈로 정의했다. nation의 라틴어 원어는 nasci로서 출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삭은 민족이라는 어휘는 부락(tribe)·인민(people)·족군(ethnic group)·종족(race)·종교(religion)·지역국가(country)·국가(state)와 호환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어휘 하나하나가 모두 거대 담론을 구성하지만, 실체가 뚜렷하지 못한 낭만주의 용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민족국가(nation-state)는 현시점 세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국가 형태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니시카와의 말처럼 민족의 사회학적·인류학적 정의는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민족국가라는 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의 무의미성을 우선 살펴보아야 한다. 그들이 제창하고자 하는 그 자랑스러운 정체성이 사실은 비합리적이고 자가당착적이고 고립적인 그 무엇이다. 더불어 민족적 정체성 고양작업이 사실은 자신을 타자로부터 더욱 고립화하고자 하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p79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김광억의 정의는 매우 자연스럽다. 그에 의하면 민족은 국가(state), 영토(territory), 주권(sovereignty)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적(국가) 경계와 역사, 혈통, 언어, 종교 등 문화적 경계와 일치하는 맥락에서 인지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민족주의란 곧 국가적 단위와 종족적 단위가 일치할 것을 주장하는 이념적 성향을 말한다.” ‘민족은 일종의 서술이다(nation is narration).’는 호미 바바의 유명한 테제이다. 현재 홍콩을 중심으로 민족에 대한 새로운 서술이 강요되고 있다. 탈식민을 표방하는 수많은 학자들은 두아라처럼 민족으로부터 역사를 구출하고자 할 것이지만, 아리프 딜릭처럼 냉정하게 시각을 유지하는 것도 필요할 듯싶다. 우리가 싫어한다고 해서 그 대상이 역사로부터 실제로부터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딜릭은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민족은 역사 속으로 들어가면서 자아 규정을 위한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근거를 제공해왔고, 창안되었건 아니건, 하나의 역사적 동력으로 작용해왔으며 계속해서 그럴 것이다.” 따라서 딜릭은 두아라에 비하면 현실을 중시하는 현실론자라고 할 수 있다. 아파두라이도 탈식민의 역사에서 민족주의가 도깨비 방망이처럼 사용되어왔고 되고 있음을 탈식민지 세계의 엘리트 집단에서 남자로 자라온 우리들에게 민족주의는 일종의 상식이며 우리의 야심과 전략, 윤리 감각이 정당함을 보증하는 원칙이었다.” 는 말로 확인시켜 준다. 탈식민을 위한 가장 유용한 도구였지만, 재국민화를 위한 가장 유용한 도구가 된 것이다.

p83

 

아스만은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기억을 세 종류로 나누어 분석했다. 소통 기억, 집단 기억, 문화 기억이 그것인데, 그중 소통 기억은 구전으로 전승되는 사람들의 실제 생활 경험이나 일상 기억 등으로 수명은 1백년 이하이다. 집단 기억은 연계 기억이라고도 하는데, 열사·종교·기념일·기념비 등이 기억의 운반체가 되어, 군중의 의식을 부단히 환기시킨다. 그다음이 가장 추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 기억이다. 역사 자료 같은 문자로 기재된 것으로 풍부한 상징이나 기호를 함유하고 있는데, 이는 커뮤니티의 정치적 신분을 규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건국 신화나 유태인의 종교 전적 같은 것이 그 예가 된다.

p125

 

중국은 현대사에서 홍콩에 대한 주권을 요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홍콩 영국정부의 실효적 지배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이른바 불평등 조약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대외적으로 입게 될 국가 이미지 추락을 우려했고, 자유 무역항으로서 홍콩의 존재가 중국의 이익 특히 경제적 이익에 여실히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홍콩의 주권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중략) 중국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에 이미 홍콩 문제는 시기가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서 협상을 통해서 해결한다는 방침을 세워놓았고, 수립 후에는 저우언라이 총리가 내놓은 장기타산, 충분이용의 방침에 따라 홍콩의 즉시 수복을 고려하지 않았다. 19633월에 이르러서야 사회주의 국가가 식민지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느냐는 외국인의 질문에 공식적으로 홍콩 마카오 문제는 역사적으로 제국주의가 중국에 강요한 불평등조약에 속하며”, “우리는 조건이 성숙하면 담판을 통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이고, 해결 전에는 현상을 유지한다는 것을 일관되게 주장해왔다.”고 밝혔다. 19723, 중국은 유엔 비식민화 특별위원회에 중국의 입장을 전하기를, “홍콩과 마카오는 영국과 포르투갈에 의해서 점령당한 중국 영토의 일부로서, 홍콩 마카오 문제의 해결은 전적으로 중국 주권 범위 내의 문제이기에, 근본적으로 통상적인 이른바 식민지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반식민지 선언 중에 적용될 식민지 명단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유엔은 이 문제를 토론할 권한이 없다.”고 못박았다. 동년 11, 유엔 27차 회의는 홍콩 마카오 문제에 대한 중국 정부의 입장과 요구를 인정했다. (중략) 영국 측이 수세로 몰리기 시작한 것은 홍콩의 미래 불안이 홍콩의 실물 경제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주는 상황이 도래하면서부터였다. 19824, 덩샤오핑은 영국의 전 수상 히스를 만나서 중국은 대만에 대한 기본정책인 ‘9개 조항의 조건으로 홍콩의 주권을 회수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중국이 곧 홍콩의 주권을 회수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19817월부터 19828월까지 1년 동안 주가지수는 정확하게 반 토막이 났고, 주택 가격도 폭락했던 것이다. 홍콩 사회의 불안저은 당시나 미래 모두 영국 측의 이익에 치명적이었다는 점에서 영국측은 반환 협상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중략) 홍콩영국 정부가 크게 놀랐던 이유는 중국 정부의 태도가 종전과 확연히 다른 강경한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중국 정부는 홍콩이 식민지라는 것을 인정한 적이 없다. 그것이 홍콩에 대한 중국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1972년 중국 정부는 유엔의 식민지 명단에서 홍콩과 마카오를 제외해달라고 요구한 바 있다. 그 배경에는 실리적인 측면에서 식민지 홍콩의 존재가 중국에 주는 큰 이점이 자리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한국전쟁 시기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홍콩은 중국이 외국과 소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거점이었다. 그래서 중국은 결코 홍콩이 게속해서 영국의 통치를 받는 현실을 동요시킬 뜻이 없었다. 19837월 재개된 회담에서 영국 측의 카드는 주권을 주고 통치권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 주권과 통치권을 분리해서 주권은 중국에게 넘겨주되, 영국이 홍콩의 통치권을 계속 행사하자는 것이었다. 임대 방식으로 홍콩을 수십 년 더 통치하자는 것이었지만, 중국 정부가 일관되게 주권과 통치권을 분리할 수 없다는 원칙을 견지하자 회담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마지막으로 영국 측은 홍콩을 싱가포르와 같은 독립된 도시 국가로 기획했으나, 중국 측의 강력한 반발로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마웨에 따르면 중국은 영국이 1997년 이후에도 홍콩을 통치한다는 것은 민족주의 입장에서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p136

 

4. 탈식민 스토리

 

뤄구이샹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론을 소수야말로 문학의 상태이자 정태로 보며, ‘대문학은 지나치게 자만하여 스스로가 주도적 중심이라고 여겨 자신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18세기 이래 서구 제국주의는 아시아인과 화인을 대충 황인종이라는 민족 형태로 구분하였는데, 우리 역시 이런 편견에 부화뇌동하여 아시아 국민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전통을 표방하는 중국 현대의 민족관에도 서구적 관점이 많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소수야말로 이른바 다수’, ‘주도’, ‘전체등의 가치 관념에 부단히 반항하면서 반성을 요구한다고 보았다.

p170

 

버틀러는 내부적으로 아무리 그럴싸해 보인다고 해도 민족적 동질성을 내세우는 그 어떤 주장도 의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민족국가의 기반이 되는 민족을 발명하기 위해 민족 내부의 이질성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p183

 

97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사회적으로 최대의 반환 반대 목소리는 홍콩 본토에서 나왔다. 게다가 서방 교육을 많이 받은 지식 계층/전문직과 상공업 엘리트일수록 더욱 강력하게 이른바 영국이 홍콩을 팔아넘기는 것에 반대하여, 홍콩을 중국에 돌려주는 것을 반대했다. 심지어 중영 쌍방이 1997년 홍콩을 중국에 돌려주기로 약속한 이후에도, 홍콩 여론은 여전히 영국은 마땅히 홍콩인의 이익을 보호해야 하고, 홍콩에 대해 영국은 도덕적인 책임이 있다는 등의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전 세계 반식민지화의 역사에서, 식민자(사실 식민지 통치하의 체제)에 대한 홍콩인의 연연함과 미래에 대한 공포와 저항은 영국 식민지였던 스페인의 남쪽 도시 지브롤터 외에는 유일무이할 것이다.

p198

 

홍콩다움을 갖춘 사람이 홍콩인이라고 볼 때, 과연 홍콩인은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가장 정확하게 답변을 줄 수 있는 존재는 타자이다. 레비나스의 경우 우리의 내재성 속에서는 어떠한 혁명의 씨앗도 생겨날 수 없으며, 우리는 오직 저편으로부터만 우리의 이기심을 부수어줄 자의 도래를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절대적으로 다른 자를 타자라고 정의할 경우, 타자의 존재가 우리를 우리답게 만들어준다. 역설적으로 타자는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하다.

p205

 

5. 탈식민을 위한 본토

 

마웨는 패튼(마지막 영국총독)기본법회색지대를 이용하여, 1995년 입법국 선거의 민주적 요소의 비율을 최고로 끌어올렸다고 본다. 즉 기본법에 주권 반환 이후 첫 번째 입법회의는 20석을 직선으로, 30석을 직능조별로 10석을 선거위원회가 선출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으나, 선거위원회 구성과 직능조별 의석을 선출하는 방식에 대해 자세한 규정이 없기에 패튼이 선거인 기초를 최대한 확대시킨 것이다. (중략) 대륙학자 저우핑은 역사적인 입장에서 영국과 중국의 충돌 지점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좀 길지만 인용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영국은 홍콩에 대해 식민통치를 계속할 수 없다고 인식했을 때부터, 홍콩에 대해 비식민화 정책을 채택했다. 이 정책은 정치적으로 홍콩의 정치제도를 대의제로 개조하는 것이었다. 이전 1백여 년의 홍콩 통치에서 영국은 홍콩에 민주를 부여하는 고려를 해본 적이 없고, 홍콩영국의 정치체제를 건드릴 만한 모든 개혁 조치를 거절했다. 하지만 강요에 의해 홍콩에서 철수할 즈음, 홍콩영국 정부는 오히려 정치체제 개혁을 크게 시도하여 홍콩인에게 민주를 부여하는 시도를 했다. 특히 중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미래 특구 정치제도를 설계하는 시점에, 홍콩영국 정부는 미래 특구 정치체제 개혁 계획을 미리 실현하여 일석이조의 목적 즉, 홍콩에 대한 영국의 덕치를 표현하여, 홍콩인의 광범위한 호감과 지지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기회로 친영 세력을 부식시킬 수 있으며, 그 세력이 홍콩 정치권력 체계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영국이 1997년 이후에도 영국의 통치 없이 영국의 대리인이 홍콩을 계속 통제할 수 있는 국면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동시에 중국정부를 진퇴유곡의 상태에 빠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정부가 만약에 이 시도를 막지 못한다면 홍콩 반환 시 홍콩영국 당국이 조성한 기정사실을 접수할 수밖에 없고, 만약 이 시도를 반대한다면 홍콩영국 정부는 중국정부에 민주 반대그리고 홍콩인과 대립이라는 모자를 씌울 수 있는바, 중국정부에 압력을 행사하고 이간을 도발하며 불화를 산포할 수 있어, 중국정부를 수동적 지위에 처하게 만들어 중국 정부의 주권 회복 능력을 약화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국은 홍콩 내 엘리트들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그들에게 영구적인 영국 거주권을 주었다. 표면적으로는 영국 거주권 부여는 홍콩 장래 문제가 대두된 이후 나타난 홍콩 인재의 대탈출 러시를 완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1989‘6·4’ 이후 인재 유출이 심화될 조짐을 보이자 이들의 홍콩 내 장기 거주를 유도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 하지만 인재 유출은 표면적인 이유였고 홍콩의 엘리트 계급에게 민주주의를 이식시키고자 했던 것이 더욱 근본적인 이유라 할 수 있다.

p266

 

1970년대 중기부터 홍콩인의 의식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 영국 식민 통치에 대한 거부감이 어느 정도 사라지면서 홍콩 본토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10년 주택 건설 계획과 클린 홍콩캠페인, 특히 1974년 총독 직속으로 설립된 강력한 반부패 기구인 염정공서등 정부의 노력이 민심을 일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홍콩정부는 중국인 엘리트를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바로 식민지 정부에 현지 엘리트를 참가시키는 것으로 현지의 반발을 무마하며 식민지 정부에 대한 공신력을 높이는 방법이었다. (중략) 사실 동아시아 전통에서 이른바 인정이라는 요소의 작동을 얼마나 적절하게 차단시킬 수 있느냐가 근대화의 관건이라고 본다. 인정 요소의 차단은 바로 부패와 얼마나 거리를 두느냐 하는 것이고, 그것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기제를 만들었다는 것은 서구적 근대를 구현한 결과라는 것이다. 염정공서의 설립은 홍콩인의 정서를 안정시킬 수 있었고, 법치에 대한 믿음과 함께 정부에 대한 신뢰감을 제고시켰다. 뿐만 아니라 홍콩에 대한 대내외의 공신력을 제고시켰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홍콩인들의 일반적인 정서인 정부에 대한 소극적 지지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p270

 

6. 결론

 

민족주의의 항형 차원인 본토주의는 민족주의와 똑같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아 또 다른 국수를 형성한다는 의미이다. 즉 홍콩 본토주의에서 자랑해야 할 것은 경제적인 업적이 아니라 제도적 투명도가 비교적 높고 다문화에 대한 수용의 폭이 넓다는 정도이고, 반면에 중국 민족주의가 자랑해야 할 것은 광대한 영토나 유장한 역사가 아니라 예술을 숭상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예절의 정신이어야 한다.

p293

 

우리가 전 지구화를 피할 수 없다면 보편적 합리주의가 대안이기 때문이다. 합리적 제도와 그것으로부터 주어지는 자유는 홍콩문화의 자랑스러운 특징이자 정체성이다. 분명한 것은 홍콩 내에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정치 실체보다는 이른바 중국의 전통이나 문화적 정체성에 동의한느 정서가 실재한다는 사실이다. 중국적인 정서를 극복하여 문화적으로 독립하지 않을 경우 본토의 성립은 더욱 요원한데, 그것을 위해서는 가치중립적인 홍콩의 다움이 보호받아야 한다.

p294

 

다문화주의가 실패한다면, 그 이유는 우리다움인 고유의 강한 정체성 대문이다. 민족과 본토는 그것의 다움을 가지는 동시에 지향성을 지니는데, 지향성은 반드시 배타성을 수반한다. 향후 본토 홍콩에 가해질 국민국가 강화라는 태풍을 우려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합리주의가 작동하는 본토를 건설하는 방법 외에는 대안이 없다.

p297


홍콩은 어디로..

   최근 범죄이 인도법이 입법 법안으로 제출되면서 홍콩에서 대규모의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많은 한국 청년들도 그들의 행보를 지지하였고, 그와 동시에 대학 내에서 (한국인, 홍콩인)과 중국인 사이의 갈등이 발생했다. 단순히 나와 동질한 사상을 지녔다고 홍콩인들을 지지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을 찾은 것이다. 중국과 홍콩에 대한 3권의 책을 읽고서의 나의 판단은 현재의 중국 중화주의가 격심해졌고 조금은 완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홍콩의 민주화 시위를 어느 정도 지지한다는 개인적인 판단 기준을 갖게 되었다. 물론 총체적으로 중국으로부터 독립시켜서 SAR(Special Administrative Region) 지위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홍콩의 민주화 시위가 어느 정도를 이상적으로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SAR 지위를 포기하기엔 경제적인 손해가 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굳이 가까운 국가를 심지어 우리나라보다도 동질적인 국가와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떠나는 것은 미래에 어떤 위협과 손해를 야기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홍콩의 공무원들도 대개 친중성향을 띠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화가 나서 불타는 마음으로 뜻을 펼치는 것에 대해 이해는 하지만, 객관적으로 국가의 미래와 안녕을 바란다면 좀 더 좋은 협의점을 향해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때문에 나는 홍콩인도 중국인도 아닌 한국인으로서 그들의 갈등 구조를 통하여 우리나라의 동북아 외교를 고민하였다. 우리도 민족주의 속에서 중국과 일본을 너무 적대적으로 보는 것은 아닐까. 집단주의 문화 속에서 불가피한 아포리아라고 하지만, 점점 불확실해지는 미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선 동북아 협력이 꼭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합리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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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선

경제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만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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