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_알랭드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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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라비와 커스틴 부부의 사랑의 서사이다. 하지만 그 내용만큼 작가가 부가 설명을 하기 위해 글에 나타난다. 읽다 보면 서사의 흐름보단 작가의 분석을 기다리게 되고, 작가의 TMT(too much talker)의 면모를 느낀다. 각종 예시라든가 서술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데 읽기 불편하진 않다. 단지 배보다 배꼽이 더 큰데? 라는 사소한 생각이 든다.

요즘 들어 결혼에 대한 고민을 종종 하게 되어 이 책을 찾았다.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인지 책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곳을 시원하게 긁진 못했지만 두 세 군데 정도 흥미롭게 읽었다. 당연한 이야기의 연속이긴 했지만, 읽는 동안 나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서 만족스럽다. 20대 중반-후반의 이미 사랑하고 좌절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1부 낭만주의


2부 그 후로 오래오래


(감정전이)


현재 시나리오의 일부는 다른 원천으로부터 동력을 얻은 듯하고

특정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오래전에 형성된 행동 양식이 잠재의식 속에서 다시 떠올라 본인도 모르게 나타나는 듯하다.

심리학 용어로 말하자면, 과민 반응을 하는 사람은 과거의 감정을 현재의 누군가(전혀 당해 마땅하지 않은 사람)에게 '전이'시키는 것이다.

p.110


전이의 위험성을 인정하면 짜증과 비난보다 공감과 이해에 우선순위를 두게 된다.

두 사람은 갑자기 폭발하는 불안이나 적대감이 항상 그들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그러니 그런 폭발에 매번 분노나 상처받은 자존심으로 대응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다.

격분과 비난이 동정심에게 자리를 내준다.

(중략)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익혀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한두 가지 면에서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쾌히 인정할 줄 아는 간헐적인 능력이다.

p.114


(모든 게 네 탓)


사랑의 모든 가정들 중 아주 얄팍하리만치 불합리하고 미숙하고 개탄스럽지만

그럼에도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사랑을 서약한 사람이

우리의 감정적 실존의 중심일 뿐 아니라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다 그에게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듯 사랑에는 기이하고 병적인 특권이 있다.

(중략)

우리가 불만 목록을 노촐할 수 있는 사람,

인생의 불의와 결함에 대해 누적된 모든 분노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그 사람 탓을 하는 건 당연히 부조리 중에서도 부조리다.

하지만 이렇게만 본다면 사랑의 작동 법칙을 잘못 이해한 셈이다.

우리는 정말로 책임이 있는 권력자에게 소리를 내지를 수가 없기에

우리가 비난을 해도 가장 너그럽게 보아주리라 확신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

주변에 있는 가장 다정하고, 가장 동정 어리고, 가장 충성스러운 사람,

즉 우리를 해칠 가능성이 가장 적으면서도 우리가 마구 소리를 치는 동안에도

우리 곁에 머물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에게 불만을 쏟아놓는 것이다.

p.122


"왜 당신은 부차적인 사실들에 신경을 써? 간단해. 그냥 엉망진창이야."

(중략)

커스틴이 상세한 설명을 원하는 건 불안에 대처하는 그녀의 방식 때문이다.

그녀는 사실들을 움켜쥐고 정리한다.

자신이 얼마나 걱정하는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제하면서 관리 운영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는 게 그녀의 방식이다.

(중략)

우리가 파트너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고 그 곁에서 매우 부조리해지는 까닭은

우리 내면의 불명료한 부분을 이해하고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고통을 많이 해소시켜주는 누군가가 또한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을 어떻게든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부모의 기적 같은 능력을 보고 감탄했던 어린아이가 수십 년 뒤 어른이 되어

그때의 경외감에 별난 경의를 표하듯 상대방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p.126


(가르치기와 배우기)


감정에 치우쳐 우리는 배우자의 부정적인 평가와

친구 및 가족들(조금이라도 비교할 만한 요구가 지워져 있지 않은)의 격려하는 어조를 대비시킨다.

(중략)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사랑과 가르침의 관계를 바라보는 유용하고도 시류와 다른 관점을 제안한다.

그들이 보기에 사랑은 무엇보다 먼저 타인의 훌륭한 점을 찬탄하는 감정,

고결한 특질과 대면했을 때 느껴지는 흥분이었다.

그 결과 사랑의 깊어짐은 항상 보다 고결해지는 방법(화를 잘 참거나 관대해지는 법, 탐구심을 키우거나 더 용감해지는 법)

가르치고 배우는 욕구를 수반하게 됐다.

성실한 연인이라면 상대방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런 수용은 관계의 목적을 나태하고 비겁하게 통째로 배신하는 행위였다.

그런고로 우리 자신을 향상하고 다른 이들에게 가르쳐줄 것들은 항상 존재할 터였다.

(중략)

현재보다 더 진보한 세계, 그리스식 사랑의 이상에 조금 더 깨어 있는 세계에서는

우리가 어떤 것을 알려주고자 할 때에 어색함과 두려움과 공격성이 약간 줄어들고,

피드백을 받을 때에도 다소 덜 호전적이고 덜 예민해질 것이다.

관계 안에서 교육이란 개념이 불필요하게 섬뜩하고 부정적이었던 함의를 벗게 될 것이다.

신뢰하고 협력하는 분위기에서는 가르치기와 배우기,

상대방의 결점을 환기하고 상대방의 비판을 허용하기가

결국 사랑의 참된 목적에 충실하다는 점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p.137


3부 아이들


(사랑의 가르침)


아기는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더 자란 아이들이 가끔 큰 불안을 느끼며 판단을 내리듯이,

아이들은 아무 요점이 없고, 이것이 아이들의 요점이다.

아이들은 그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도와줄 위치에 있기 때문에─ 

어떤 보답도 기대하지 않고 베푸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p.147


진정한 사랑은 까다롭고 불쾌한 행동의 이면에 놓여 있을지 모르는 무언가를

최대한 관대하게 해석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는 점이다.

부모는 울음, 발길질, 슬픔, 화가 진정 무엇 때문인지를 짐작해야 한다.

이 해석 활동의 두드러진 특징이자 평범한 성인들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해석 양상과 확연히 차별되는 점은 자애심이다.

(중략)

만일 이 본능을 성인들의 관계에 조금이라도 도입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친절한 사람이 되겠는가?

그렇다면 성인들의 관계에서도 심술궂음과 잔인함을 보아 넘기고

거의 항상 그 이면에 깔려 있는 두려움, 혼란, 피로를 감지해낼 수 있다.

인류를 사랑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이런 의미일 것이다.

p.150

 

사랑을 위한 노력이 그들을 녹초로 만든다.

그들에겐 서로에게 줄 것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들 각자의 내면에 있는 피곤한 아이는 오랫동안 방치된 것에 화가 치밀고 조각나 있다.

p.156

 

(사랑스러움)

 

라비는 직장에서 일할 때 특히나 아이들이 그립다.

끝없는 긴장과 직업상의 책략으로 얼룩진 환경에서 아이들의 신뢰와 취약함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려온다.

(중략)

사회는 사라진 특질에 예민하기 마련이다.

고도의 자제심, 냉소, 합리성을 요구하고, 극도의 불안과 경쟁으로 얼룩진 세게는

당연히 아이들에게서 잃어버린 평형을 되찾아줄 미덕을 발견한다.

성인의 영역에 들어가는 열쇠를 얻기 위해 너무 엄격하고 확실하게 포기해야 했던 자질들 말이다.

p.159

 

우리는 아이에게서 사랑스러움과 여림을 보고 그에 따라 도움과 위안을 주는데 능통하다.

우리는 아이들 곁에서 내면에 존재하는 최악의 충동, 복수심과 분노를 밀쳐놓을 줄 안다.

기대와 요구를 평상시보다 약간 낮게 재조정할 수도 있다.

화를 늦추고, 발현되지 않은 잠재성을 더 많이 의식하는 것이다.

이상하고 애석하게도 동료들에게는 보여주기 꺼려지는 과도한 친절함을 아이들에게는 쉽게 베푼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다정함을 보이는 세상에서 산다는 건 멋진 일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어린애 같은 면에 조금 더 다정함을 보이는 세상에서 산다면 더욱 멋질 것이다.

p.163

 

(섹스와 양육)


자위의 판타지에서 무작위로 만난 낯선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낮은 순위의 모티프가 된다는 사실은

낭만주의의 이데올로기에서는 논리를 획득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친밀함이 만든 무거운 짐들을 바로잡고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사랑과 섹스의 냉정한 분리바로 그것이다.

모르는 사람을 이용하면 분노, 감정적 취약성, 상대방의 욕구를 신경 써야 할 의무를 우회할 수 있다.

우리는 비난이나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원하는 선까지 특이하고 이기적으로 굴 수 있다.

모든 감정이 완벽하게 차단되어, 이해되기를 바라는 일말의 소망도 없고 따라서 잘못 이해될 위험도 없으며

그 결과 괴로워하거나 실망하게 될 위험도 전혀 없다.

마침내 삶의 소모적이고 거치적거리는 나머지 부분을 침대로 가져갈 필요 없이 욕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p.187


4부 외도


(찬성론)


낭만주의의 렌즈로 보면 명백히 이보다 더 큰 배신은 있을 수 없다.

다른 종류의 행동들은 거의 다 쉽게 묵인하는 사람들에게도 간통은 하늘이 노할 위반이자,

사랑의 가장 신성한 전제들을 깨뜨리는 섬뜩한 행위다.


첫 번째 전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든 함께하는 삶이 소중하다고 주장하면서

길을 벗어나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런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다면 애초부터 사랑은 없었다.


두 번째 전제: 간통은 우리가 익히 아는 불성실과는 종류가 다르다.

세상은 벌거벗음을 수반한 계율 위반은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이고,

지각변동에 버금가는 엄청난 종류의 배신이라고 말한다.

바람피우는 짓은 그냥 나쁜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한다고 공언하는 상대에게 할 수 있는 극악 행위다.


세 번째 전제: 일부일처제에 충실하다는 것은 상대방을 깊이 배려하고

그의 번영과 안녕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이다.

이를 고수하는 것은 상대방의 최선의 이익을 진심으로 염려한다는 확실한 징표다.


네 번째 전제; 일부일처는 자연스러운 사랑의 모습이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항상 한 사람과 사랑하기를 원한다.

일부일처는 정신 건강의 기준점이다.

p.213

 

만약 사랑을 상대방의 행복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마음이라 정의한다면,

자주 시달리고 잔뜩 주눅이 든 남편에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18층으로 올라가

거의 모르는 사람과 10분 동안 구강성교를 즐기고 활력을 되찾게 해주는 것도 사랑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간주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는 결코 사랑이 아니라 속 좁고 위선적인 소유욕,

다시 말해 상대방의 행복에 자신의 행복이 포함되는 경우에만,

오직 그 경우에만 상대방의 행복을 바라는 욕망에 불과하다.

p.216

 

종이 한 장에 서명을 하는 즉시 외부로 향한 성적 관심을 모두 포기할 거라고 어느 누가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신이나 더 높은 계율에 따라서도 아니고

단지 그것이 큰 잘못이라는 검토되지 않은 가정에 근거해서

(중략)

용인되는 매력적인 것들 만큼이나 그 나름대로 숭배받을 가치가 있는

다양한 절정의 감각들라비는 로런의 쇄골을 생각한다의 정당성을 부인한다.

간통의 발생 가능성을 거부하는 것은 곧 인생의 풍요로움을 부정하는 셈 아닌가?

반대로, 어떤 특정 상황에서 부정한 행위에 정말로 일말의 호기심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신뢰하는 게 합리적인 것일까?

p.217

 

(반대론)


당신은 어머니가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닐 때 뭘 하며 저녁 시간을 보냈을 거라 생각해?

호텔 방에서 기드온 성경을 펴놓고 좋은 구절을 읽고 있었을까?

뭘 하셨던, 난 당신 어머니를 위해 그게 멋진 시간이었고 어머니의 연인들이 어머니를 흠모했기를 바라.

그리고 당신을 그런 일에 절대 끌어들이지 않고 품위를 지키신 건 기쁜 일이라 생각해.

감사한 일이지. 그래도, 어머니 본인 탓은 아니지만 당신에게 아주 뒤틀린 여성관을 물려준 건 제외해야 해.

그래, 여자들도 여자들만의 욕구가 있어서 가끔은, 설사 사랑하는 남편이 있고 훌륭한 어머니라 할지라도

어떤 모르는 낯선 사람이 그들을 알아봐주고 그들을 절박하게 원해주기를 바라거든.

p.226

 

성숙해지면 소유욕을 초월하게 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질투는 아가들에게나 어울린다.

성숙한 사람은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걸 안다.

p.229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입술을 만지거나 손이라도 스쳤다는 말을 듣는 순간

누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우리가 과거에 어쩌다 바람을 피웠을 때 가졌을 매우 진지하고 충실한 생각과는 상반되고 논리에 어긋난다.

하지만 지금은 이성의 명령이 들리지 않는다.

현명하다는 것은 도저히 현명해질 수 없는 순간을 아는 것이다.

p.231

 

상대방의 충실함이 무의식을 가득 채워주는 한 외도라는 문제에도 태연자약할 수 있다.

한 번도 배신당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신의를 계속 유지하기에 좋은 전제조건이 못 된다.

보다 진실하고 충실한 사람이 되려면 적절한 예방 접종을 겪어봐야 한다.

한동안 극한의 공황과 모욕을 겪고 붕괴 일보 직전까지 가봐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배우자를 배신하지 말라는 명령이 틀에 박힌 말이 아니라

영구히 뚜렷하게 빛을 발하는 도덕적 의무로 변모한다.

p.232

 

(비밀)


우리는 정직성에 너무 감명하는 탓에 정중함의 미덕들을 망각한다.

아끼는 사람이 우리의 본성에서 상처를 줄 수 있는 면과

항상 전면적으로 마주치지는 않게 하려는 욕구 말이다.

어느 정도 자제하고 자기 편집에 조금 열성을 보이는 억제 능력은

솔직한 고백 능력 못지않게 당연히 사랑에 포함된다.

스스로 비밀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정직함을 내세워 상대방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상처가 되는 정보까지 털어놓는 사람은

절대 사랑의 편이 아니다.

p.241

 

외도의 여파로 라비는 결혼 생활의 목적을 다르게 보게 된다.

젊었을 때 그는 결혼 생활을 감정(애정, 욕구, 열정, 갈망 등)에 대한 축성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못지않게 하나의 제도로서도 중요하게 인시한다.

관계자들의 감정에 잠깐씩 일어나는 그 모든 변화에 낱낱이 주목하지 않고

한 해 한 해 굳건히 버틸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제도로서 말이다.

결혼 생활의 정당성은 감정보다 더 견고하고 지속적인 현상들,

즉 나중에 수정 불가한 최초의 약속 행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들을 창조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만족에 대한 무관심을 타고난 자식들이라는 존재에 있다.

p.242

 

자신의 감정에 높은 가중치를 부여해 언제까지나 삶의 길잡이 별로 삼는 것은 라비에겐 무리다.

그는 화학적 혼돈의 존재로, 잠깐씩 이성이 활동할 때 고수할 수 있는 기본 원칙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는 외적 상황이 가끔은 자신의 가슴이 경험하는 것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줄 안다.

아마도 그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다는 신호이리라.

p.244


5부 낭만주의를 넘어서


(애착이론)


하잔과 세이버가 최초로 고안한 이 설문 조사(1987)는 애착 유형을 평가하는 데에 널리 이용된다.

자신이 어떤 유형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응답자는 아래의 세 진술 중 자신과 가장 가까운 것을 고르게 된다.

(저자는 이를 인물을 단조롭게 만든다고 부정적으로 봄)


1. 나는 정서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원하지만, 상대방이 종종 뚜렷한 이유도 없이 실망스럽거나 이기적으로 나온다.

나는 스스로 타인과 너무 가까워지는 걸 용인하면 상처를 입게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나는 혼자 지내도 괜찮다.

(회피 애착)


2. 나는 타인과 정서적으로 친밀해지기를 원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내가 바라는 만큼 가까워지는 것을 꺼려 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소중히 생각하는만큼 그들도 나를 소중히 여길까 하고 걱정한다.

그 때문에 아주 속이 상하고 화가 날 때가 있다.

(불안정 애착)


3. 나는 비교적 쉽게 다른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친밀해진다.

타인에게 의지하고 그들이 나에게 의지하는 데 편안함을 느낀다.

나는 혼자 있거나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안정 애착)

p.260

 

(성숙함을 향해)


생에 처음으로 꽃의 아름다움에 눈을 뜬다.

사춘기에는 증오심마저 품었었는데 말이다.

야망을 펼칠 크고 영원한 것들이 있는데 그렇게 작고 일시적인 것에서 기쁨을 얻다니 터무니없어 보였다.

그 자신이 영예와 강렬함을 원했다. 꽃이 붙들린다는 것은 위험한 체념의 상징이었다.

이제 그는 이해하기 시작한다.

꽃을 사랑하는 마음은 겸양과 실망을 다룰 줄 아는 태도에서 나온다.

우리가 장미의 줄기나 블루벨 꽃잎에 감탄할 수 있으려면 그 전에 무엇인가 영구적으로 망가져봐야 한다.

일단 더 큰 꿈들이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타협되고 만다는 것을 깨달으면,

고요한 완벽과 즐거움을 간직한 이 자그마한 섬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다보게 된다.

p.274

 

(결혼할 준비가 되다)


우리는 마치 사랑을 단일하고 분화되지 않은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은 매우 상이한 두 가지 양식인 사랑받기와 사랑하기로 이루어져 있다.

후자를 실행할 준비가 된 동시에 전자에 대한 우리의 비정상적이고 위험한 집착을 인식할 때 결혼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

처음에는 사랑받기에 대해서만 고 인생을 시작한다.

아주 그릇되게도 사랑받는 일이 표준처럼 보인다.

(중략)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개념을 성년기까지 갖고 간다.

성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보살핌을 받고 다 받아들여지던 그 느낌을 되살리고 싶어 한다.

우리는 마음 속 은밀한 구석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예측하고,

우리의 심정을 읽어내고, 이타적으로 행동하고 모든 면에서 더 나아지게 해줄 연인을 그린다.

이건 낭만적인 것 같지만, 재난의 예고이다.

낭만적인 견해는 살아과 섹스가 한 줄로 맞춰지길 기대한다.

우리가 불만스러운 삶을 수용할 정도로 강해질 때 결혼할 준비를 적절히 갖췄다 할 것이다.

그러나 간통은 실현 가능한 해답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어느 쪽도 간통의 피해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마음 깊이 단절감을 느껴서도 안 된다.

(중략)

우리는 원하는 만큼 여러 번 그들의 변명을 들을 수는 있지만 내심 한 가지만큼은 확신한다.

그들이 우리를 굴욕에 빠뜨리기로 작심을 한 것이며,

그들의 사랑은 신뢰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지위와 함께 남김없이 증발해버렸다고 말이다.

다른 어떤 결론을 주장한다면 파도와 싸우는 꼴이 된다.

p.281

 

낭만주의 결혼관은 제짝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우리의 허다한 관심사와 가치관에 공감하는 사람을 찾는 것으로 인식된다.

장기적으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너무 다양하고 특이하다.

영구적인 조화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하게 취향의 차이를 놓고 협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제짝의 진정한 표지는 완벽한 상보성이라는 추상적 개념보다는 차이를 수용하는 능력이다.

조화는 사랑의 성과물이지 전제 조건이 아니다.

p.284



결혼할 준비가 되었는가?

   우리나라에선 비혼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의 숫자가 늘고 있다. 기술의 발달로 혼자서 생활하는 것이 크게 불편하지 않고 즐겁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사회 구조적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남성중심적인 유교 문화권의 영향, 경제불황, 육아의 사회적 비용, 남여갈등, SNS 발달이 야기한 사회적 박탈감 등이 있을 것이다. '편하게 먹는 새우튀김... 결혼은 하셨는지?'와 같은 밈(meme)이 커뮤니티에서 유행하기도 한다. 사회현상이 복합적인 결과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자발적으로 비혼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 나 또한 나의 비혼주의가 환경의 탓에 더 가깝다고 생각된다. 사회 문제는 혼자서 해결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결혼의 타당성을 따져보고자 이 책을 읽고 고민하였다. 결혼에 대한 가치관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까지도 나의 가치관으로는 결혼이 타당해보이지 않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낭만주의 연애관에 설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운명처럼 한 명을 바라보는 연애란 불가능하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인생의 풍요로움을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럼에도 나의 숭배받을 만한 가치들을 가슴 한 켠에 묻어두어 불만스러운 삶을 수용할 정도가 되고나서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넘쳐나는 나로서는 수긍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나는 낭만주의 연애관에서 탈피하여 결혼 상대는 인생의 동반자로서 서로의 행복을 바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그것이 정직성에 충실한 나머지 정중함을 잃어버린 결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 한 번 사는 인생이다. 나의 인생에서 하고싶은 것들을 최대한 하려고 노력하고 서로가 그것을 응원해주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동반자다. 저자는 상대방의 외도를 상상하면 신뢰가 깨어진다고 얘기했지만, 나는 지켜줄 수 있다. 겪어보지 못한 풋내기의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내가 먼저 외도를 당하고 더 손해본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충분히 감내하고 상대방을 응원해주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만큼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선제되어야 실행될 계획이다. 그럴 대상을 찾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내가 가진 가치관의 가장 큰 문제이다.

   10년 뒤, 아마 나는 결혼했을 수도 있다. 그 때는 내가 분명하게 생각하는 상대방을 만나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길 바란다. 지금과 같이 전투적인 삶을 지향하기도 하면서 안정적인 삶을 지향하기도 하는 모순적인 삶을 계속 추구하길 바란다. 꼰대가 아닌 어린 아이와 같은 생명력을 갖고 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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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만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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