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없는 경제학_차현진


이 책은?




-Gottlob Frege(수학자이자 철학자) “훌륭한 수학자는 이미 절반의 철학자이고, 훌륭한 철학자는 이미 절반의 수학자다이는 경제학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은행을 상대로 중앙은행이 대출을 했을 때, 최초의 원금은 회수할 수 있지만 이자는 회수가 불가능하다. 중앙은행이 뿌린 화폐의 양이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 그보다도 많은 규모의 화폐를 중앙은행이 무슨 수로 회수할 수 있겠는가? 흔히 중앙은행의 이자수입을 다른 경제주체들의 이자수입과 같다고 생각하지만, 인식론(epistemology) 차원에서 보자면 중앙은행의 손익개념은 실현 가능성이 처음부터 의심되는 허구적 개념 또는 숫자놀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범한 회계문제로 보이는 중앙은행의 손익개념은 통화정책의 건전성이라는 형이상학과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철은 하나’. 문이란,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 장르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이나 의지를 말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파토스의 영역이다. 이에 비해 철은 논리와 사상,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로고스의 영역이다. 사는 사회의 배경이나 제도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이는 사회적 관습 또는 사회구성원의 기질을 의미하는 에토스와 일맥상통하다. 따라서 ··철은 하나라는 말에는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사회나 제도의 영향을 받아 굳어지며, 반대로 사회 구성원들의 사상과 감정은 관습과 제도를 변혁시켜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화폐사상(1-2), 금융혁신과 개혁(3-4), 시장과 정부(5-6), 국제통화제도(7), 한국은행(8-9-10) 등으로 구분

 

1. ‘=이라는 고정관념의 역사

-근대적 의미의 금융업 또는 은행업의 출발은 15세기 초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메디치 가문이 어음할인을 통해 플로린이라는 돈을 대출하면서 근대 금융업의 모양새를 다듬었다. 메디치 가문이 대출(장기)대신 어음할인(단기)의 형식을 취한 것은 대금업의 규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즉 무역활동 때문에 발행되는 단기어음(상업어음)을 할인하는 것은 조만간 항구에 도착할 수입품에 대한 구매촉진 활동이라고 교황청을 설득한 것.

 

-영국 정부의 금태환 중단조치는 국민에게 매우 불쾌한 과거를 상기시킨다. 1688년 명예혁명 당시 인류 최초의 민주정부가 수립되기 이전, 영국의 화폐제도는 만신창이였다. 절대군주들이 불량화폐를 제조하여 교묘하게 화폐가치를 타락시켰기 때문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그레셤의 법칙은 당시 토마스 그레셤의 절규였다. 1694년 영란은행이 세워지고 아이작 뉴턴이 조폐청장으로 임명되었다. 불량화폐를 없애기 위해 파운드화가 보급되었고 18세기 이후 영국은 건전한 화폐제도를 구축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폴레옹 전쟁 직전 1797년 영국 정부의 금태환 중단조치는 불량화폐가 남발했던 절대왕정 시대로의 회귀를 의미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전비 조달 때문에 영란은행의 발목을 잡고 있던 금태환 의무라는 족쇄를 풀어주고 무한정 돈을 찍어 정부에 대출하라는 것이 정부의 의도였다. 국민의 시각에선 금태환 중단은 영란은행이 정부의 시녀가 되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국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더 걷던 절대왕정의 시대와 사정이 다를 바가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영국의 정계는 두 파로 갈렸다. 지금론자(리카르도, 휘틀리 등)들은 당장 금태환을 재개하고 영란은행이 정도를 걷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반지금론자(, 풀라톤 등)들은 금태환이 재개되면 심각한 불경기가 찾아올 것이라고 걱정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지금론자는 원칙론을, 반지금론자는 현실론을 내세웠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집단 간의 논쟁을 역사학자들은 지금논쟁(bullionist controversy, 1797-1821)이라고 부른다. 당시 논쟁은 지금론자들의 승리였다. 1819년 금태환법이 제정되고 이 법에 따라 1821년 영란은행권의 금태환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금태환 직후 경기가 나빠지기 시작했고, 1825년에는 금융공황이 닥쳤다. 한동안 남미투기 열풍이 불었다가 버블이 꺼지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당시 리카르도가 주장한 RET에 따르면, 정부가 세금을 더 거둬도 실물경기는 달라지지 않는다. 세금을 더 걷어 당장의 가계 가처분소득이 줄어들지만 재정적자 개선효과로 인해 미래의 세금은 줄고 가처분소득은 늘어나기 때문이다. 현재와 미래의 소득변화를 현재가치로 할인하면 똑같다. 리카르도는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정부가 세금을 더 거두어 영란은행에 대출금을 갚고 금태환을 재개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시 사람들은 금융공황이 금태환의 재개 때문이 아니라 그 이전에 있었던 영란은행의 과도한 대출(나폴레옹 전쟁 중 늘어난 대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대출의 근본적인 원인을 정부의 요구에서 찾지 않고 영란은행의 영업 확장 욕구에서 찾았고, 당시 영국인들은 영란은행에 대해 싸늘한 시선을 내비쳤다.

 

-이윽고 영란은행을 해체하자는 의견까지 등장했다. 영란은행의 화폐발행 독점권을 몰수하고 정직한 은행들끼리 금태환 준칙을 지키면서 경쟁을 하게 되면 통화가치가 더 안정되고 버블과 금융공황도 예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 은행이나 화폐를 발행할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을 자유은행주의(free banking system)라고 하는데, 이것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이론이었다. 미국에서도 1836년 자유은행주의를 실현하고, 1914년 연방준비은행이 설립될 때까지 중앙은행 없이 버텼다.

 

-1832년 영란은행 총재 존 파머 경은 의회에 (런던 지역에 한하여)발권 독점권을 인정하는 특허권 연장을 신청하면서 오로지 금의 유출입에 맞추어 은행권 발행을 기계적으로 조절하겠다고 제안하였다. 이는 일종의 항복선언이었다. 1837년 빅토리아 시대가 시작되었고, 로버트 필 수상은 수구파 휘그당을 보수당으로 인신한 사람이었는데, 보수당의 당수답지 않게 상당히 진보적인 면이 있었다. 도시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제도가 그중 하나였는데, 오늘날 런던의 경찰을 보비(bobby)라고 부르는 것도 필 수상의 애칭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세계 최초로 소득세를 정착시켰고, 여러 관세와 함께 보호무역법인 곡물법을 폐지했다. 그는 영란은행의 영업지역을 전국으로 확대하였고, 영란은행은 힘을 엄청나게 키울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초래한 필 수상의 법률이 근대식 중앙은행의 시작이었다. 영란은행의 최종대부자 기능을 이코노미스트 편집장이었던 월터 배젓이 롬바르드 스트리트라는 저서를 통해 찬양하였고, 영란은행은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 경제를 견인하는 최고의 기관으로 추앙되었다. 이렇게 해서 영국이 천명한 금본위제도는 유럽 전체의 도덕률, 즉 국제금융 시스템의 영혼이 되었다. 동시에 영국의 파운드화는 유럽의 금본위제도를 지탱하는 받침점이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의 플로린화가 담당했던 국제통화의 역할을 빅토리아 시대에 이르러 파운드화가 이어받은 것이다.

 

-금이 흔해지면서 금본위제도는 잘 버텼다. 하지만 금광이 부족했던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스위스 등 4개국은 통화부족 현상을 겪어 1865년 소위 라틴통화동맹을 결성하고 금과 은을 함께 돈으로 쓰는 복본위제도를 도모했다. 모든 시스템은 규모의 경제적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산업혁명 이후 세계 무역을 주도하는 영국을 따라 금본위제도에 동참하지 않으면, 경제적 불편을 넘어 고립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186720개국이 참가한 국제통화회의에서는 라틴통화동맹과 같이 복본위제도로 버텨보려는 일부 국가의 수고를 덧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전 세계가 금본위제도로 통일할 것을 결의하였다. 여기에는 반대도 많았다. 농업국가에 머물고 있던 미국은 1873년 주조법을 개정하여 금본위제도를 채택하기로 했을 때 서부의 은광 소유주와 농민들은 이 법을 Crime of 1873라고 하면서 강력히 반발했다. 미국처럼 내부갈등을 빚는 경우도 있었지만 19세기 이후 금본위제도는 글로벌 스탠다드로 자리 잡았다.

 

-1914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192234개국은 제노아에 모여서 금본위제도로 복원할 것을 맹세하고 이를 위해 각국이 중앙은행을 설립할 것을 결의했다. 1924년에는 승전국과 독일 사이에 배상금 문제도 타결되었다. 승전국들이 독일의 배상금을 낮춰주고 차관을 제공하면, 독일은 열심히 수출해서 빚을 갚는다는 미국 재무장관 찰스 도스의 중재로 마련된 도스 플랜이었다. 하지만, 전쟁 때문에 산업시설이 파괴된 영국의 입장에서 보면, 독일로부터 받아야 할 배상금의 규모가 줄어들고 시기도 늦어지기 때문에 파운드화의 가치하락을 감수해야 했다. 이것은 물가상승으로 이어졌다. , 도스 플랜의 성공은 유럽 대륙의 금융질서 회복을 향한 큰 진전이었지만, 정작 금융 종주국 영국의 형편은 더 나빠졌다. 아무 준비 없이 재무부 장관 자리에 오른 처칠에게 몬터규 노먼 영란은행 총재는 영국의 물가상승률이 다른 나라보다 높기 때문에 디플레이션을 감수하고서라도 금본위제도로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본위제도로 복귀한다면 무식한 사람, 도박꾼, 시대에 뒤떨어진 사업가들에게 욕을 먹을 것이고, 금본위제도를 거부한다면 교육받은 사람들과 후세로부터 영원히 욕을 먹을 것입니다.” 1925428, 하원에서 처칠은 마침내 금본위제도 복원을 선언했다. 하지만, 케인즈는 1924년 발간한 화폐 개혁론에서 금본위제도를 야만의 유산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노먼이 우려하고 케인즈가 예언했던 것처럼, 금본위제도 복원은 영국 경제를 상당히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실업문제가 심각해지면서 민심은 어수룩한 처칠 재무장관을 꾄 노먼 총재를 원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칠의 결단을 계기로 글로벌 스탠다드는 또다시 금본위제도로 바뀌었다. 미국만 잘 협조해주면, 그런 대로 국제금융 시스템이 잘 굴러갈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몬터규 노먼 영란은행 총재와 벤저민 스트롱 뉴욕 연준총재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세계대전에 뒤늦게 참가하여 피해가 가장 적었던 미국은 풍부한 노동력과 자원을 통해서 수출을 늘림으로써 당시 유럽의 금을 마구 빨아들였다. 금본위제도의 존속 여부는 영국이 아니라 미국의 손에 달려 있었다. 반면 유럽 국가들은 금 대신에 이웃 나라의 화폐를 외환 보유액으로 가지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유럽 국가들이 말로는 금본위제도를 떠들었지만 현실은 금환본위제였다는 점이다. 상당량의 금이 미국에 있는 상태에서 누군가의 금태환 요구가 차질없이 이행되도록 유럽 중앙은행들이 연대책임을 지는 시스템이다, 이런 살얼음 같은 시스템은 국제공조가 튼튼하지 않으면 그리 오래갈 수 없는 허약한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체결된 주요 중앙은행 간 통화스왑계약과 같다. 유대관계에 의존하는 이런 불안한 시스템 아래서 1928년 뉴욕 연준의 스트롱 총재가 갑자기 죽고 그다음 해인 1929년 대공황이 찾아왔다. 영국은 1931년 또다시 금태환 중단을 선언했다. 금본위제도의 명목상 종주국이었던 영국의 금태환 중단은 전 세계를 패닉 상태로 빠뜨렸다. 각국은 연쇄적으로 금태환을 중단하고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1933년 미국도 금본위제도를 포기했다. 다른 국가들도 잇달아 금본위제도를 중단하면서, 인류는 영원히 금본위제도로 복귀하지 않았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화폐가 가지는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속성만을 강조한다. 물물교환에서 생기는 이른바 ‘double concidenc of wants'라는 욕망의 이중적 충족 문제를 쉽게 해결하기위해서 화폐가 탄생했다고 칼 멩거(화폐의 기원, 1892)는 설명한다. 반면 게오르크 크나프나 칼 마르크스 등의 비주류 경제학에서는 화폐가 가지는 공동체적이며 국가적인 속성을 강조한다. 화폐국정설(1905)에 따르면 화페제도는 조세권을 가진 국가가 국민에게 강제하는 것이다.

 

2. ‘이라는 혁명가들의 야심

-16세기 프랑스는 종교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남쪽에는 가톨릭에 저항하는 신교도 위그노들이 많았다.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이들은 빠르게 성장하여 신·구교 사이의 정치적 긴장이 아주 팽팽해졌고 그들은 서로를 이단시하며 등을 돌렸다. 이때 가톨릭 세력을 대변하던 카트린 드 메디치는 드러내놓고 신교도들을 탄압하지는 않았다.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구교 사이에 힘의 균형이 유지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들 중 하나인 샤를 9세가 위그노 측과 너무 가까워지자 돌변했다. 어린 아들이 자기의 섭정방향과 달리 나가자 카트린은 프랑스 귀족 중에서도 위그노에게 가장 강경한 기즈 감누을 불러 예배를 올리던 위그노들을 습격했다. 이것이 훗날 프랑스의 국력을 황폐화한 위그노전쟁(1562-1598)의 시작이었다. 15728월에는 더 큰 사건이 터졌다. 카트린의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온 위그노들을 대량 학살한 것이다. 이틀 밤 사이에 전국에 걸쳐 참혹한 살육(성 바톨로메오 대학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교와 구교 사이의 갈등은 치유되기 어려웠고 돈 많은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나 국력의 쇠진도 컸다. 그 갈등은 1598년 낭트칙력을 통해 겨우 봉합되었다. 훗날 왕위에 오른 앙리 4세가 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대신 신교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 것이다. 성 바톨로메오 대학살의 밤, 도대체 몇 명이나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카트린 드 메디치가 집단학살의 밀명을 내린 그날 밤을 역사에서는 장검의 밤, Night of Long Knives’이라고 부른다. 이 악명은 20세기에 이르러 아돌프 히틀러가 저지른 사건을 가리키게 된다.

 

-1918년 연합국의 반격으로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자, 지방 토호세력인 융커(Junker)들이 지배계급으로 군림하던 신분사회 독일제국도 붕괴했다. 독일에 여러 이념을 표방하는 정당들이 난립했고, 독일 최초의 민주공화체제인 바이마르공화국은 이런 혼란 속에서 탄생했다. 당시 독일은 산업시설이 상당히 파괴되어 모든 물자가 부족했다. 그런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물가안정만 고집하다 보면 실업난이 가중되고 사회적으로는 폭동이 일어날 우려가 있었다. 몇 년 전 지독한 경제난에 시달리던 러시아에서 붉은 혁명이 일어나 체제가 전복되는 일을 목격했기 때문에 공산화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독일 중앙은행인 라이히스방크(Reichsbank)의 총재인 루돌프 하펜슈타인은 공산화되는 것보다는 인플레이션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물건값이 올라서 모든 거래단위가 커지는 상황에서는 중앙은행이 대출을 늘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믿었다. 통화량과 물가간의 인과관계를 오늘날과 반대로 본 것인데, 이는 당시 유행하던 진성어음주의(real bills doctrine) 때문이었다. 즉 실물경제활동을 반영하는 어음을 토대로 중앙은행이 수동적으로 자금을 공급하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믿은 것이다. 문제는 금리수준이었다. 터무니없이 낮은 금리로 진성어음을 계속 할인한 결과 물가는 천문학적으로 뛰었다. 그 결과 1921~1923년의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이 발생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화폐개혁을 준비하던 하펜슈타인 총재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19231115일 화페개혁 실시 전날 새벽, 돌연사했다. 당대 최고의 화폐금융 이론가이자, 행정가가 사상 최악의 인플레이션 주범이 되어 심장마비로 죽은 것이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은 햘마르 샤흐트라는 은행가였다. 그는 총재로 취임하자마자 자기의 인맥을 이용해서 해외에서 금을 빌려왔다. 덕분에 환율폭등과 초인플레이션이 빠르게 진정되었다. 이는 통화스왑계약과 똑같은 메커니즘이다.

 

-한편 정치는 혼란의 연속이었고, 1923118일 단기적으로 정권타도를 바랐던 왕당파와 나치당이 뮌헨의 한 술집에 모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를 뮌헨반란 또는 맥주홀 폭동이라 부른다. 하지만 다음날 오후 가볍게 진압되었고, 주범 히틀러는 체포되었다. 그러나 쿠데타에 대한 재판은 히틀러의 극우사상을 오히려 전국에 광고하는 계기가 되었고, 옥중에 집필한 나의 투쟁은 1000만 부 이상이 팔렸다. 독일 사회에서 극우주의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위그노파의 숙청을 지휘할 때 카트린의 손에 있었던 것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었다면, 룀 일당을 제거할 때 히틀러가 쥐고 있었던 것은 페더러가 쓴 독일의 기반이었다. 이는 나치당과 독일 사회가 지향하는 이념과 개혁 프로그램을 담은 팸플릿이었다. 경제학을 독학한 페더는 1919년 이자라는 족쇄에서 벗어나는 법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유태인들이 지배하고 있는 독일 금융계를 전복하는 것이 독일 사회가 번영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하면서 은행의 국유화와 이자철폐를 제안했다. 히틀러를 감동시킨 페더는 반유태적이며 반자본주의적인 금융관을 히틀러에게 인셉션하고 그의 정신적 멘토가 되었다. 독일 제국은 최고 정점에 있는 황제를 귀족계급인 융커가 떠받들고, 융커 계급을 유태인들이 금으로 유지하고, 유태인들은 그들에게서 돈을 빌린 일반서민들이 높은 이자로 떠받드는 먹이사슬 구조였다. 따라서 독일인들의 마음속에는 만일 돈()문제만 아니라면, 유태인들을 몰아내고 위대한 아리안족만의 순수혈통사회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라는 의식이 히틀러가 등장하기 전부터 자라나고 있었다. ‘=이라는 불문율이 깨지기를 바라는 독일 국민에게 1905년 놀라운 복음이 전해졌다. 게오르크 크나프라는 학자가 화폐국정설이라는 혁명적 저서를 발표한 것이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했다. “화폐는 법의 산물이다.” 그리고 법정화폐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크나프와 같이 역사적 사실을 중시하는 학자들을 역사학파라고 한다. 크나프의 주장대로 법률의 힘으로 화폐의 탄생과 유통이 결정된다면 금이 많다는 것은 화폐제도 유지의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다.

 

-독일에 진주한 연합군은 새로운 독일 화폐단위를 도이치마르크(Deutsche Mark)라고 작명했다. 과거 독일의 화폐단위가 모두 한 단어였지만, 도이치마르크가 두 단어인 이유는 미국식 문법이 작용한 결과이다. 독일에 미국식 제도가 주입된 것은 바야흐로 미국과 소련이 패권을 경쟁하는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크나프, 미첼 이네스, 케인즈 등은 금본위제도 밖에 있는 주변부 국가들의 열악한 화폐제도를 통해 화폐국정론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반면 카를 멩거, 루트비히 폰 미제스 등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영국과 프랑스 등 중심국의 화폐제도를 통해 개인과 시장이 주도권을 갖는 화폐제도를 당연시했다. 이런 점을 돌이켜볼 때 화폐제도에 대한 견해는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독일은 나름의 역사와 제도적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완전경쟁보다는 유치산업 보호가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영국의 고전학파와 비교하여 독일의 독자노선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역사학파라고 했다. 하지만 같은 독일 문화권에서도 경제력이 컸던 오스트리아 지역은 선진국인 영국과 생각을 같이하면서 역사학파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학파는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자유무역을 강조하였다. 나중에는 그 주제가 확대되어 경제학의 정체성과 경제연구의 목적에 관한 논쟁으로 번졌다. 이것을 방법논쟁이라고 한다. 오스트리아학파는 경제현상에 관한 일반적 법칙을 발견하고 예측하는 것이 경제학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선험적인 이론을 세우고 이를 통계적인 방법으로 검정하는 방법이 옳다고 보았다. 또한 오스트리아학파의 연구대상은 집단이 아닌 개인의 합리적 행동이었다. 이런 방법에 따르자면, 특정한 역사 속에서 진실을 파악하려는 태도는 올바른 방법론이 될 수 없다. 이에 비해 역사학파는 경제이론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들을 종합하여 사후적으로 세워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구체적 사실들을 설명하지 못하는 오스트리아학파 식의 막연한 일반화는 비과학적인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또한 경제학의 목표는 개인의 행동을 분석하는 것을 넘어서 경제 시스템의 존재 이유와 정당성을 평가하는 데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역사학파는 개인보다 집단, 가치 중립적인 분석보다는 가치 지향적인 평가를 중시했다. 경제학은 철학이나 수학과 같은 연역적 학문인가, 의학이나 생물학 같은 귀납적 학문인가? 경제학 연구는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가능한가, 통계자료와 컴퓨터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가? 선진국에서 통용되는 이론이 신흥 시장국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일반이론인가, 아닌가? 각종 경제학 이론들은 불변의 진리인가, 잠정적 가설인가? 경제학에서 역사적 경험이란 무엇인가? 이런 고민을 하다 보면, 경제학은 어느새 인식론과 비슷해진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 훌륭한 경제학자는 이미 절반의 철학자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3. 금융혁신을 향한 어느 은행가의 무한도전 (지아니니)

-아주 먼 옛날부터 금융업은 부자들만의 리그였으며 저주의 대상이었다. 미국에서는 중앙은행을 만들려고 하면 늘 위헌론부터 제기되었다. “종이는 돈의 유령일 뿐 돈이 아니다라고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일갈한 뒤 지폐를 발행하는 기관은 국민을 현혹하는 위헌적 기관이라는 것이 서부와 농민 그리고 보통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중앙은행 설립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경제가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망가진 다음이었다. 하지만 경제가 조금 회복되면 다시 중앙은행을 없앴다. 최초의 중앙은행인 제1차 미국은행이 1791년 시한부로 설립돼 20년만에 폐쇄되었고, 1816년 재설립된 제2차 미국은행은 1836년 잭슨 대통령이 폐쇄했다. 그 이후 78년 만인 1914년 미국 땅에서 세 번째 중앙은행인 오늘날의 연방준비제도가 설립되었다.

 

-오늘날 미국에서 금융업을 향한 저주, 혐오감, 경게심은 놀랍도록 줄어들었다. 건국 이래 대공황까지도 엄연히 존재했던 미국 안에서의 지역감정, 즉 유럽과 월가를 향한 서부와 보통사람들의 혐오감은 언제 사라진 것일까? 농업을 중심으로 했던 미국 서부경제가 운명의 사슬을 끊게 된 게기는 무엇이었을까? 불안한 정치상황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난 미국은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다. 미국으로 넘어온 이탈리아 사람들은 범죄자로 전락하거나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 머릿속에는 이탈리아 출신들이 하류인생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어떤 이탈리아 이민자는 기득권을 가진 앵글로색슨계를 피해서 대도시 대신 서부를 택했다. 제노아 출신의 루이기 지아니니가 그중 하나였다. 그는 큰아들 아마데오 지아니니를 자식으로 두었다. 아마데오 지아니니는 공부보다 장사하는 데에 더 재미를 붙였다.

 

-지아니니는 서민은행이라는 새로운 금융사업 모델을 세우고 자기와 함께 투자할 주주들을 모았다. 이 은행의 주고객층은 샌프란시스코의 리틀이탈리아 지역에 거주하거나 사업하는 사람들이라서 은행이름은 뱅크오브이탈리아라고 붙였다. 지아니니는 자기 회사를 난쟁이은행이라고 불렀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부터 가까스로 피했고, 그는 형식주의가 만연했던 경쟁자들과 차별적으로 영업을 재개했다. 사업내용이 확실하다면 구입물품을 담보로 구매대금을 선뜻 내주었다. 얼굴 한 번 보고 서류에 사인만 하면 쉽게 돈을 빌려준다는 소문이 나자 사정이 어려운 영세 자영업자와 중소기업 사장들이 구름같이 몰려왔다. 경쟁 은행들은 겁이 나서 흉내 내기를 주저했다. 지아니니는 선진 은행경영기법을 배우기 위해 동부의 뉴욕을 찾아갔지만 방문한 금융기관들은 형편없었다. 하나같이 주식시장에서 투기하기에 바빴고 유동성 부족에 쪼들렸다. 뉴욕의 은행들이 몹쓸 병에 빠졌다고 생각한 지아니니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서 유동성을 더 확실히 챙겼다. 190710월 뉴욕에서 시작도니 금융공황은 동부의 탐욕스러운 은행가들을 일거에 날려보냈다. 금융공황이 터지기 직전까지 뉴욕의 신탁회사들은 규제의 허점을 이용해서 몸집을 부풀리고 지급결제제도에가지 참여하여 은행들과 똑같이 행세했다. 주식을 담보로 개인들에게 대출해주고 그 주식을 담보로 다시 서부의 소형은행들에게서 돈을 빌렸다. 뉴욕의 은행들도 사정은 비슷했지만 현금으로 지급준비금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신탁회사들은 별도의 지급준비금이 없이 자기들이 투자한 유가증권을 담보물로 가지고 있었다. 주식은 현금화가 쉬우니 유사시에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믿은 것이었다. 투자회사들이 은행들과 똑같이 지급결제제도에 참가하고 자신들의 유가증권을 언제든지 환금성이 확보된 안전한 담보물이라고 믿는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모습과 똑같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런 모습을 자본시장의 선진화라고 주장하면서 자본시장법을 만들었다. 금융공황 당시 니커보커신탁회사는 맨해튼에서도 세 번째로 큰 신탁회사였지만, 속은 썩을 대로 썩은 투기꾼들의 집합소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돌프 아스토리아 호텔 바로 옆에 번듯한 사무실을 두고 있던 이 회사가 주가하락으로 큰 손해를 봐서 파산할 위험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예금주들이 몰려들어 경쟁적으로 돈을 인출해나갔다. 자금인출사태는 곧 맨해튼의 모든 신탁회사들로 번졌다. 1907년 금융공황으로 1914년 중앙은행이 다시 만들어지고 지급준비제도가 도입되었으며, 지급결제제도에는 은행들만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J.P.모건이 나서서 수습했던 약 6개월간의 금융공황 치유기는 정말 고통스러웠다. 뉴욕의 신탁회사에 돈을 빌려주었던 서부 은행들과 서부의 농민들은 금융공황의 고통을 함께 겪으면서 동부의 추악한 금융인과 금융계를 원망하고 원망했다.

 

-지아니니는 금융공황으로부터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지아니니는 이 사건을 통해 배운 것이 하나 있다. 지역마다 실물경제와 자금사정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여러 지역으로 지점을 분산해놓으면 자금관리가 쉬워지고 대출의 위험성은 낮아진다는 것이었다. 당시 규제를 고려하여 지아니니는 지점확대와 방크이탈리, 리버티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와 같은 주법은행을 3개 더 만들었다. 그리고 맥패든법이 제정되면서 지아니니는 19273월 뱅크오브아메리카라는 하나의 국법은행을 세웠다. 이로써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은행이 탄생했다.

 

-지아니니는 J.P.모건의 아들인 잭 모건과 충돌을 일으켰다. 인종차별주의자였던 잭 모건은 유태인과 독일인 그리고 가톨린 신도들을 무시했었다. 지아니니 자신도 가톨릭 신자였지만, 이를 무시하고 저자세로 전략적 제휴를 요청했다. 하지만 동부 금융계에서 막강한 힘을 가졌고 미 연준 안에 심어놓은 사람들이 많았던 모건은 불합리한 요구를 계속 하였다. 모건이 임원진을 교체하고 인사문제에까지 개입하는 것을 보고 지아니니는 모건을 이용해서 연준을 움직이려고 했었는데, 모건이 오히려 연준을 이용해서 자신의 재산을 넘보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지아니니는 모건 측 임원을 모두 털어내었다.

 

4. 시스템 개혁을 향한 연준의장의 무한도전 (에클스)

-상상의 오류, 프레게의 말처럼 자연언어에는 확실히 논리적 함정이 많다. 은유, 비유, 과장, 풍자, 반어법 등 다양한 수사학적 표현들은 언어적 상상을 불러일으켜 대화의 맛을 높여주지만 엉뚱한 결론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1913년 연방준비제도법을 상원 상임위원회에서 통과시킨 6인의 공화당 위원은 연방준비제도라는 애매한 이름 덕분에 이를 중앙은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연방준비이사회 Board of Governors라는 이름과 달리, 연방준비아시회의 위원들의 명칭은 평위원member. 이런 엉성함을 가진 연준이 어떻게 막강한 독립성을 가진 세계의 중앙은행이 되었을까?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라는 가난한 지역에서 잡동사니를 팔며 살았던 윌리엄 에클스 부부는 생필품을 보조받기 위해 몰몬교도가 되기도 하였다. 윌리엄의 둘째 아들인 데이비드는 가장 똑똑했다.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벌목꾼, 철도인부, 건축인부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이후 그는 스물 한 명의 자식을 가졌고, 후반부에는 매우 윤택한 삶을 살았다. 은행, 호텔, 건축업뿐만 아니라 유통업과 발전소 사업 등 손을 대지 않은 것이 없었고 대부분 실패하지 않았다. 둘째부인이 낳은 첫아들인 매리너는 가장 부지런했다. 데이비드가 죽고 꽤 많은 재산이 상속되었지만 아버지가 남긴 재산 중 은행은 일이 가장 힘들었다. 그래서 오래건 주의 대부호 브라우닝 집안과 손을 잡고 은행지주회사를 만들었다. 존 브라우닝은 아버지 데이비드가 일자리를 찾아 서부를 전전할 때 오레건 주에서 만난 친구였다. 브라우닝과 에클스는 은행들을 하나씩 합병해나갔고, 매리너 에클스는 이때까진 아버지의 영향으로 보이지 않는 손을 믿었다. 노력만 하면 누구든지 성공하고 세상은 발전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매리너 에클스가 마흔을 바라볼 즈음에 대공황이 터졌고, 에클스는 정부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경제가 어려울 때 혼자만 살겠다고 자금을 회수하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는 적자재정의 불가피성을 요령 있게 설명할 기업인이나 금융가들이 필요했고, 사업가이자 은행가로 성공했으면서도 정부의 개입을 지지하는 에클스는 이에 적합했다. 루스벨트 행정부의 2년차인 1934년에 제정된 연방주택건설법은 주택경기의 침체와 담보로 잡힌 집을 잃은 서민들의 주택마련을 지원하기 위한 법이었다. 에클스는 이 법에서 공공주택건설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주택은 개인의 소유물이지만 이의 구매를 정부가 도와주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에 근거한 개념이다. 물론 연방정부의 적자도 덩달아 확대되었다.

 

-대공황 당시 연준은 하는 일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무기력한 조직이었다. 그 연준의장을 재무장관인 모겐소는 에클스에게 제의했다. 에클스는 처음엔 끌리지 않았지만, “필요하다면 연준법도 바꿔보라면서 연준의장직을 거듭 모겐소가 권고했고, 에클스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참모인 로클린 커리를 연준의장 보좌관으로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고 이후 연준의장직을 수락하면서 비밀리에 연준법 개정안을 연구했다. 커리와 에클스는 12명의 지역 연준총재가 결정하는 공개시장조직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고 이를 연준법에 반영하고 워싱턴 DC의 연준이사회가 이를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35년 하원에 연준법 법률개정안이 발의되었고, 맨해튼 금융계는 일제히 경악했다. 개정안에서는 연방준비제도의 성격과 지배구조가 강력한 연방정부를 지지하는 에클스의 생각을 그대로 담고 있었는데, 이는 월가가 동의하기 힘든 것이었다. 과거에는 통화정책의 목표가 상공활동의 지원에 필요한 적절한 통화의 공급과 은행인수어음 시장의 육성에 있었다. 진성어음주의에 입각하여 경제활동을 반영하는 어음을 차질 없이 할인해주는 것이 연준의 존재이유라고 본 것이다. 이런 사고의 틀에서는 대공황기에 연준이 특별히 할 일이 없다. 그러나 에클스가 만든 법안에서는 연준이 물가아정과 설장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목표를 추구하도록 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때까지 회원은행들이 임명하던 지역 연준총재와 부총재를 연준이사회가 임명토록 함으로써 지역 연준에 대한 연준이사회의 지배력을 높였다. 또한, 그때까지 12명의 지역 연준총재들 간의 협의기구였던 공개시장위원회를 연방공개시장위원회라는 법정기구로 격상시키면서 의장과 2명의 연준이사회 위원 그리고 지역 연준총재 2인 등 5인으로 구성토록 했다. 보수파와 금융계는 맹반격을 했다. 동부 금융계의 반대를 이유로 글래스 위원장이 시간을 계속 끌자 루스벨트 대통령이 나섰다. 글래스에게 유화 제스처를 보이고 이후 개정안이 처리되었다. 글래스에 의해 FOMC의 위원은 7인의 연준이사회 위원 전원과 5인의 지역 연준총재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뉴욕 연준총재를 FOMC의 당연직 부의장으로 격상시켰다. 글래스 위원장은 신설된 FOMC에서 어느 정도 지역 연준총재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고 보고 이를 견제했다. Governor라는 직위를 따로 만들지 않는 것 역시 글래스의 아이디어였다. Gonvernor는 식민시절 영국의 총독이나 주지사를 일컫는 권위적인 말이다. 따라서 연준이사회의 권한이 잔뜩 강화된 상태에서 그 구성원들에게 Governor라는 타이틀을 붙이면 지역 연준의 반발강도가 더 커질 수 있었다. 그래서 Governor라는 표현을 법률에서 삭제했다. Governor를 총재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대단히 민주적인 명칭이다. 이는 조선 초 한시직이었던 총재관에서 비롯되는데, 총재관은 왕이 죽고 난 뒤 실록을 작성하기 위해 육조에서 소집한 사람들 중 대표자였다. 총재관은 왕이 남긴 각종 기록을 점검하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은 뒤 실록에 기록될 내용에 최종결정을 내리는 일을 담당하기 때문에 문장력, 판단력 그리고 소통능력이 뛰어난 사람 중에서 뽑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합의제 의결기구의 장으로서 총재라는 직위명칭은 대단히 훌륭하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연임 무렵 새로운 국정목표를 찾지 못하고 있었고, 국민 사이에는 개혁 피로감이 커져 뉴딜정책의 위헌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에클스는 대공황에서 벗어난 뒤 찾아온 더블딥, 1937~1938년의 경기둔화에 대응하여 금리정책과 지급 준비율 조절을 구상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감독정책을 통해 미조정하는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거시경제를 위해 금융감독 수단을 활용하는 이 방법을 오늘날 거시 건전성 정책이라고 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IMF 등을 중심으로 심도 있게 논의되는 신개념인데, 학술적 배경이 약한 에클스가 이미 1940년대에 제안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우리나라와 같이 통화정책과 감독정책을 이분법으로 접근하는 나라에서는 거시 건전성 정책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집행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은행감독체계가 너무 복잡해서 감독업무에 관한 연준의 입지는 넓지 않았고, 에클스는 은행감독 권한을 연준으로 집중하는 방안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에클스의 제안에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사상 유례없는 은행의 연쇄파산 사태 속에서 취임한 대통령으로서 영세규모의 주법은행들이 국법은행들과 똑같은 감독을 받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통령은 모겐소에게 협의하도록 지시했고, 모겐소는 이에 대해 반대했다. 에클스의 말대로 금융감독체계를 개편하게 되면, 재무부 산하기관인 통화청, 연방예금보험공사 등의 힘이 약해지는 것이 명약관하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에 메카시즘, 반공주의 성향이 강한 집단에서 정치적 반대자나 집단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려는 태도가 불기 시작했다. 에클스 연준의장이 개인 보좌관으로 두었더 커리도 이 의혹으로부터 의심받았고, 혐의를 입증하기에 증거가 빈약해서 히스나 화이트처럼 기소되지는 않았다.

 

-1949년 경기가 침체되자 에클스는 그것이 트루먼 행정부가 그동안 돈을 너무 많이 푼 후유증이라며 비판했다. 특히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국채발행이 늘어나는데도 재무부가 계속 연 2.5%의 금리수준이 유지되도록 연준에 압력을 가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당시 물가수준을 감안할 때 장기국채 금리가 연2.5%라는 것은 실질금리가 마이너스라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스나이더 재무장관은 상당히 권위적인 사람이었다. 에클스를 비롯한 그 누구도 재무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1951년 초 의회에서 국채발행 정책에 관해 스나이더가 설명하였고, 스나이더의 답변태도와 내용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전 언론이 비판하였다. 125일에는 에클스가 의회에 출석하여 재무부의 국채발행 정책에 동의했다는 스나이더의 말이 새빨간 거짓이라고 잘라 말했다. “재무부 말을 들어야 하는 이상, 연준은 물가안정의 파수꾼이 아니라, 인플레이션의 주범일 뿐입니다.” 협의에서 재무부와 대통령 그리고 연준은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고, 스나이더 재무장관은 금리수준을 계속 유지하겠다고 보도했다. 이에 에클스는 비공개 석상에서 나눈 대화를 언론에 흘렸고, 행정부를 향한 언론의 비판 수위는 높아지고, 학계까지 나서서 연준을 거들었다. 그래서 219일 국채금리에 관한 재무부의 지시를 더 이상 따르지 않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맥케이브 의장 명의로 스나이더에게 발송했다. 그리고 공개시장조작을 통해 금리를 살짝 올려버렸다. 스나이더 재무장관은 32일 화해하는 뜻으로 연준건물을 방문했다. 7인의 위원들은 제각기 그동안 재무부가 해왔던 잘못들을 성토했다. 여러 시간에 걸친 긴 토의 끝에 보도자료 문안이 완성되었다. “재무부와 연준은 연방정부의 원활한 자금조달의 필요성과 함께 물가를 자극하지 않는 재정정책의 중요성에 관해서도 인식을 같이했다. 이에 양 기관은 정부의 기채활동과 통화정책 운용에 있어 상대기관의 독립성을 상호 존중하기로 했다.” 이것이 소위 화해협정(Treasury-Fed Accord)이라는 것이다.

 

-에클스의 가장 큰 공로는 역시 1935년 완성된 일련의 금융개혁법, 즉 옴니버스법(Omnibus Act)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연준법뿐만 아니라 예금자보호법, 모기지법 등도 제정되지 않았거나 지금보다 상당히 완화된 모습을 띠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통화정책이든 재정정책이든 재무부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자기 의견을 밝히고 추진하는 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연준이 행정부와 가까워야 한다고 믿고 연준으로 첫 출근하던 때의 자기 생각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은 셈이다.

 

-중앙은행의 자주성이라는 미사여구가 법조문에 있다고 이것이 당연히 지켜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상상의 오류. 오늘날 모든 중앙은행들이 부러웧나ᅟᅳᆫ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자주성과 독립성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에클스의 고독한 검투사 정신이 없었다면 1935년의 연준법도 공염불이거나 박제가 될 수 있었다. 에클스는 말한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남이 주는 공짜선물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노력과 실력으로 쟁취하는 전리품이다.”

 

5. 금융시장 능멸에서 비롯된 귀금속 투기 (헌트 형제)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재정사정이 빠듯해진 연방정부는 186112월 금태환을 중단하고 18622월에는 법정통화법을 통해 금이나 은으로 교환되지 않는 종이돈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1863년에는 사상 최초로 소득세를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세금을 아무리 걷어도 전비는 부족했다. 그래서 국채발행을 늘렸는데 국채가 잘 팔리게 하려면 국민이 이것을 강제로 사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1863년 국법은행법이었다. 이 법에 따라 연방정부가 허가한 상업은행들은 자본금의 3분의 1을 국채로 보유해야 하고 은행권 발행도 국채 보유액의 90%를 넘지 못했다. 결국 금광과 은광의 발견이 전쟁으로 연결되면서 화폐제도와 은행제도는 물론, 채권시장의 틀까지 몽땅 바뀐 것이다.

 

-남북전쟁 이후 연방정부의 최대과제는 화폐제도를 정상화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기존의 금과 은의 비율 즉, 1:15~16의 비율은 지켜질 수 없었다. 시장에서의 비율이 어느덧 1:30에 근접해 있었기 때문이다.(시장은 은이 평가절하) 과거의 비율을 지키다보면, 그레셤의 법칙에 따라 은본위제도가 될 것이 뻔했다. 빚을 진 사람들이 싼값의 은을 사서 주조한 뒤 그 돈으로 은행 빚을 갚는 것이 법으로 보장되기 때문이다. 빚을 많이 진 서부의 농민과 은광을 가진 서부의 부자들은 과거 주조법을 통해 정한 금과 은의 교환비율을 지키면서 자유로운 주조를 보장하라고 주장했다. 반대로 대부분 채권자였던 동부의 상인과 부자들은 물가안정을 생각하거나 당시 국제적 조류를 생각할 때 금본위제도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율리시스 그랜트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동·북부 부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즉 국제교역의 증진과 물가안정을 위해 1873년 새로운 화폐 주조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금을 준비금으로 새로운 달러화를 발행하도록 하고 기존에 발행된 불태환 지폐 그린백은 퇴장시키는 것을 골자로 했다. 이로써 미국 사회는 법률적으로 복본위제도에서 금본위제도로 이행했다. 서부에서는 이 법을 동부인들의 범죄(Crime of 1873)'이라고 불렀다. 그 무렵 1871년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하면서 평화가 찾아왔고 투기광풀이 몰아닥쳤다. 그러다가 주식시장의 버블이 붕괴되면서 1873년 비엔나 증시가 폐장하는 사태가 닥쳤다. 그에 따라 유럽의 부자들이 미국에 투자했던 자금을 회수하는 소동이 벌어졌는데, 대서양 양쪽에서의 이런 사태는 심각한 불황으로 이어졌다. 사상 최초의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금본위제도로 전환되면 경기가 위축될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공교롭게 유럽의 버블붕괴와 겹치면서 미국 경제는 깊은 수렁으로 빠졌다. 1879년 금태환이 시작되기 전, 의회는 서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블랜드-앨리슨법을 제정했다. 연방정부가 일정량의 은을 매입하여 금화와 함께 은화를 발행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시 복본위제도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당시 독일의 금본위제도 이행으로 유럽 전역에 걸쳐 은가격의 폭락사태가 발생했다. 이것은 복본위제도와 은본위제도를 채택하고 있던 나라들에게 골치 아픈 문제였다. 1880년 이후에는 은을 화폐로 쓰거나 자유주조를 허용하는 나라들이 자취를 감췄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만 은화를 계속 발행한다는 것은 국제조류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의회는 1876년 화폐소위원회를 구성하고 논의한 끝에 복본위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었다. 그런 점에서 백악관과의 맞대결을 불사하고 제정된 블랜드-앨리슨법은 의회가 이미 내렸던 결론을 뒤집는 것이었다.

 

-독일 통일 이후 평화 속에서 상업적 농업이 팽창하면서 전세계적으로 농산물의 가격이 폭락했다. 물가하락으로 채무부담이 크게 늘어난 미국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정부는 1890년 은매입법을 통해 매달 일정 수준의 은을 매입하고, 민간에서는 은화를 자유 주조하지 못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문제가 없는 듯 했으나, 재무성 화폐를 회수할 때가 오자 모든 사람들이 은이 아닌 금으로의 태환을 요구했다. 전국적인 금태환 요구 속에서 정부의 금보유액은 빠르게 감소하고 이는 금태환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켰다. 연방정부의 금태환 준수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면서 시중에서는 금이 퇴장하고 금투기가 시작되었다. 정부는 J.P.모건이 이끄는 부자 그룹들에게 국채를 대량으로 매각한 돈으로 다시 금을 사들여 금보유액을 늘렸다. 금에 대한 위기의식이 가라앉고 시장금리가 정상화되자 헐값으로 국채를 사들였던 J.P.모건과 다른 재벌들은 거액의 투자이익을 챙겼다. 결국 당장의 생활고 탈피를 위해서 은화유통을 통한 인플레이션을 기대했던 서부 사람들은 기업 부도로 인한 실업난 가중이라는 부메랑을 맞았다. 이런 역설적인 사태의 원인과 해결책을 두고 미국 사회는 남북전쟁 직전처럼 완전히 두 조각이 났다. 코인의 금융학교라는 윌리엄 하비라는 사람이 익명으로 발간한 책에선 부자와 서민,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 속에서 미국 경제의 어려움은 순전히 금본위제도 대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책은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물러나는 189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화폐제도가 최고쟁점이었다. 민주당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후보는 대단히 급진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의 대표적인 대선공약은 복본위제도 복귀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오즈의 마법사가 발표되었다. 프랭크 바움이라는 지방신문 발행인이 쓴 이 동화는 당시 지역정서를 대변하는 브라이언을 열렬히 지지하는 내용이었다. 이 동화는 복본위제도를 통해 서민 중산층의 민생고가 해결되고 모든 산업이 잘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는 공화당의 압승으로 끝난다. ·북부에서 반기업적 정서를 가진 브라이언을 공산주의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브라이언이 당선되면 회사 문을 닫겠다고 위협을 하면서 노동자들에게 공화당의 윌리엄 매킨리 후보에게 투표할 것을 강요했다. 복본위제도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한 일만 생겼다. 남아프리카와 호주 등지에서 새로운 금광이 연속적으로 발견되고 금을 쉽게 추출하는 새로운 공법이 개발되면서 금의 생산량이 세계적으로 크게 늘었다. 즉 은을 돈으로 쓰지 않는데도 인플레이션이 생길 정도로 화폐공급이 늘어났다. 1893년의 지독했던 불황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점점 사라졌다. 이런 변화 속에서 매킨리 대통령은 1900년 마침내 금본위법을 자신 있게 제정했다. 이후 복본위제도를 주장하는 정치세력들은 미국 사회에서 영원히 종적을 감추게 되었다. 그것은 좌파의 멸종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미국의 급진세력들은 이후 진보당, 노동당 등 다양한 군소정당을 결성했지만 전부 지리멸렬했다. 이후 미국은 3억 인구가 살면서도 노동당이나 사회당이 의회에 진출하지 못한 채 보수성향의 양당 정치가 지배하는 매우 특이한 구조로 발전했다.

 

-이후 대공황으로 금본위제도는 다시 중단되었다. 193334일에 취임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35일 아침 예금인출사태를 막기 위해 은행휴무를 선언했다. 45일에는 100달러 이상의 금은 전부 정부로 집중하도록 하는 대통령 긴급명령이 내려졌다. 이어서 420일에는 재무부 장관의 허가를 받지 않는 이상 모든 금의 거래와 수출이 금지됐다. 미국 사회에서 이런 식의 재산권 통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는데도 일사천리로 추진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금본위제도는 완전히 사망했다. 하지만 브레튼우즈 체제 역시 30년 만에 또다시 중대한 고비를 맞았다. 일찍이 연준의 경제학자 로버트 트리핀은 재무부의 화이트 차관보주도로 브레튼우즈 체제가 만들어질 때부터 이 체제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미국의 무역적자로 달러 공급이 늘면 달러화의 신인도가 떨어지고, 무역적자를 줄이면 세계의 유동성 공급이 부족해지는 딜레마를 지적했었다. 1960년대 초반부터 달러화에 대한 의구심이 조금씩 커지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미국의 인플레이션과 함께 달러화 투매현상이 벌어졌다.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겪던 미국은 197189일 일요일 저녁, 닉슨 대통령의 성명을 통해 세계를 상대로 한 달러화의 금태환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미국의 건국 당시 화폐라고 선언했던 은과 금이 차례대로 떨어져나갔다. 20세기 들어 화폐제도에 관한 논란의 핵심쟁점은 금본위제도였지만, 처음에는 은화의 자유주조가 이슈였다. 중요한 것은 미국 사회에서 은은 금속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서민들의 눈물과 정치가의 야망과 농민들의 한숨이 담겨 있었다. 헌트 형제는 이런 것을 알 리가 없ᄋᅠᆻ다. 은 선물시장에서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고 무작정 돈을 쏟아부었다. 물타기 전략을 통해 1979년 초 온스당 6달러 하던 은 시세는 여름에 이르러 48.7달러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19798월에 취임한 제12대 연준의장 폴 볼커는 취임 직후 통화주의를 선언했다. 닉슨 대통령의 금태환 중지로부터 정확히 8년 뒤였다. 통화량 관리체제하에서는 돈줄을 일정하게 죄기 때문에 물가가 잡힌다. 대신 시장금리가 뛰고 경기가 침체되는데, 볼커 의장은 미국 경제의 최우선 과제가 물가안정이기 때문에 다른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겠다는 뚝심을 보였다. 예상대로 경기가 크게 둔화되면서 국제 은가격도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세계 최대 선물거래소인 시카고상품거래소와 시카고선물거래소에서 계약 불이행 사태가 발생한다면 후진국의 모라토리엄 이상의 충격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선물거래 참가자들에게 거래소가 요구하는 이행보증금 수준을 연속적으로 올리는 한편, 여러 가지 까다로운 조건을 붙여 기존 게약자의 추가적인 계약확대를 막았다. 선물거래가 지니는 공매도적 속성과 거기에 따르는 위험성을 낮추려면 보다 철저한 이행보장 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렇게 되면서 헌트 형제의 무식한 물타기가 어렵게 되었다. 헌트 형제의 추가매입 여력이 바닥났다는 소문이 돌자 급격한 가격 하락이 이어졌다. 헌트 형제가 나가 떨어지자 이행보증금을 원래 수준으로 돌려놓았다. 그만큼 세상은 헌트형제에게 적대적이었다.

 

-미국에서는 중앙은행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링컨 대통령도 중앙은행을 만들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미국의 금융시스템이 일개 투기꾼 때문에 흔들리거나 부자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일이 없으려면, 평소 지급준비금을 관리하고 최종대부자 기능을 수행할 중앙은행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런 각성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의 연준이다. 투기꾼한테서 배운 교훈이었다. 따라서 금투기와 동투기에 이어서 20세기 후반부에 또다시 은투기 조짐이 나타났을 때 정부건 시장이건 그것을 방치할 리가 만무했다. 헌트 형제는 그 점을 간과했던 것이다.

 

-헌트 형제와 민페코사 간의 소송이 진행될 때 로스 교수는 변호인 측 증인이었다. 그의 조교였던 제프리 윌리엄스는 통계분석에 따라, 헌트 형제의 선물가격 조작 때문에 큰 피해를 받았다는 민페코사의 주장이 근거가 미약하다는 것을 보였다. 엄밀한 수리적 기준을 요구하는 금융공학 차원에서 보자면 직관에 의존하는 세상 사람들의 감정과 판단이 어설플 수 있다. 복잡한 금융공학 이론을 동원할 것도 없이, 그들이 평소에 선행을 베풀었거나 인심을 잃지 않았다면, 그래서 사람들의 냉소적인 적개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면, 헌트 형제는 그들이 가졌던 많은 것을 아직까지도 상당 수준 지킬 수 있었다. 항상 그렇지만 모든 일에는 마음씀씀이가 머리 굴리는 것보다 우선한다.

 

6. 금융시장 맹신에서 잉태된 글로벌 금융위기 (아인 랜드, 그린스펀, 볼커)

-미국의 소설 작가인 아인 랜드(Ayn Rand)는 인간 의지의 강인함과 이성의 완벽함을 주장하고, 운명론이나 불가지론을 거부하는 대신, 인간의 의지와 이성으로 미래를 충분히 개척할 수 있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그녀는 자유의지론자(Libertarian)으로 분류된다. 그녀의 소설 마천루에는 이러한 대목이 나온다. “선택은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도 아니고 남에게 지배당하는 것도 아니다. 선택은 아주 독립적이다. 개인의 능력은 차이가 있지만 어떤 일에는 분명한 원칙이 있다. 한 사람의 자주성과 일에 대한 열정이 곧 그 일을 추구하는 사람의 능력을 좌우한다는 점이다. 지구상에 단 한 가지 권리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권리다. 한 가지 의무가 있다면,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다. 인간의 도덕률은 자기의 최고목표를 다른 사람에게 맞추지 않는 것이다. 자기의 꿈이 다른 사람에게 지배당하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의 꿈을 달성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도덕률이다.” 아인 랜드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생하여 열두 살 때 볼셰비키 혁명을 맞았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태계 중산우이었던 그녀의 집안은 사유재산을 몽땅 빼앗기고 풍비박산했다. 이때부터 그녀의 마음속에는 집단주의에 대한 히스테리적 거부감이 자라기 시작한다.

 

-마천루를 통해서 그녀는 부와 명성과 함께 열렬한 추종자들을 얻었다. 거처를 뉴욕으로 옮긴 그녀는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을 모아 토론회를 조직했고, 집단주의를 배격하고 개인주의를 추구하는 그 모임의 이름을 역설적으로 집단(Collective)’이라고 지었다. 그 모임엔 훗날 제13대 연준의장이 되어 1987년 블랙먼데이를 잘 대처했다는 찬사와 함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한 주범이라는 비난을 동시에 받은 앨런 그린스펀도 있었다,

 

-아인 랜드는 자신의 철학을 객관주의라고 불렀다. 그 모티프는 인간의 의식과는 별개인 객관적인 실체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서 출발한다. 과연 객관주의가 올바른 철학일까? 유럽이나 아시아의 철학에는 객관주의라는 말이 없다. 20세기 세계 철학의 흐름은 오히려 객관주의와 정반대 쪽으로 흘렀다. 20세기 철학의 가장 큰 특징은 불확실성과 불완전성에 대한 이해다. 인간의 이성은 불완전하고 인간의 관찰은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 불완전하다는 것이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다. 논리는 그 자체 내에 반드시 모순이 있으며 주어진 논리체제 안에서는 그 모순을 결코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불완전성 정리의 결론이다. 수만 개의 명령어로 이루어진 컴퓨터 프로그램들이 충돌하여 컴퓨터가 작동을 멈추는 현상이 그 증거다. 부분적으로는 완전하지만 여러 명령어 집단이 만나면 그 가운데서 충돌이 생기기 때문에 컴퓨터가 정지한다. 이것을 사전적으로 예방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괴델의 결론이다. 아울러 20세기 초 물리학에서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제시하여 인간의 인지능력의 한계를 다른 차원에서 확인해주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인간의 관찰행위 자체가 물질의 상태나 위치를 결정적으로 바꿔놓기 때문에 관찰자와 관찰대상은 분리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의 관찰행위 이전에는 과연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영원히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소위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유명한 퍼즐이다. 국제결제은행 BIS에서는 지금도 조기경보 시스템이나 스트레스 테스트니 하면서 계량모형을 통해 금융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 방법을 열심히 연구 중이다. 그러나 어떤 알고리즘을 통해 금융시스템 내부에서 발생하는 위기를 미리 감지하겠다는 것은 몽상가적인 말이다. 외부에서 주입되는 컴퓨터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프로그램은 있어도, 내부에서 발생하는 컴퓨터 오류를 예방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괴델이 말한 불완전성 정리의 요지다. 계량적 분석을 통해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리스크를 탐지하겠다는 믿음은 아인 랜드가 주장했던 객관주의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BIS 회의에 참가하는 사람이 읽어야 할 것은 경제학이나 통계학 서적이 아니라 철학책일 것이다. 위기의 본질이 사람이므로 위기를 막는 것도 숫자가 아닌 사람이라는 점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기계나 수리모형은 사람을 대신할 수 없다!

 

-아인 랜드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영감을 얻었다는 인간의 의식과는 별개인 객관적인 실체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명제는 그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를 넘어선 이데아를 강조했다. 그림자처럼 그때그때 달라지는 현상을 보지 말고 영원불변의 형이상(metaphysics)'을 보라는 말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슷한 의미로 에이도스(eidos)‘라는 말을 썼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적 질료(matter)에 현혹되지 말고 변하지 않는 현상(form)으로서의 에이도스를 보라는 말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나 에이도스가 있다, 없다; 식의 실재론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를 강조했을 뿐이다. 그런데 아인 랜드는 플라톤의 불변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이라는 말을 결합하여 이들이 말하는 개념을 마치 무슨 물건인 것처럼 잘못 이해하고 있다. “인간의 의식과는 별개인 불변의 객관적 실체가 존재한다또는 객관적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정심이나 이타심이라는 변덕스러운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는 생각은 고대 철학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이상한 결론이다. 왜냐하면 이데아나 에이도스는 추상적인 개념이지 아메리카 대륙처럼 발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추상명사를 물짊여사로 이해한 아인 랜드는 실제로 유물론자였다.

 

-철학 코너에서 그녀의 저서와 평전들이 한 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공화당 또는 보수세력의 입장을 대변하는 아인 랜드는 작은 정부, 규제완화, 시장의 자율, 개인의 이기심 등을 옹호한 보수세력의 수호천사이기 때문이다. 그린스펀의 시장에 대한 지나친 신뢰는 금융위기를 낳았고, 그 결과는 그들이 그토록 혐오했던 큰 정부와 금융규제 강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아이러니다. 지금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듯이 금융위기 이후 초래되는 정부의 강력한 개입과 통제는 경제의 역동성을 분명히 약화시킨다. 앞으로 여러 분야에서 민간의 혁신은 크게 위축될 것이다. 이것이 위기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불하게 될 지정한 비용일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그린스펀의 자신감은 사라졌고 의회증언을 통해서도 자기의 판단실수를 인정했다. 2008년 가을, 의회 증언대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어깨를 움츠린 앨런바로 그것이었따. 그에게는 굴욕이었으리라. 하지만 그가 진정 유감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산업과 전망에 대한 오류가 아니라 아인 랜드에게서 배웠던 잘못된 철학일 것이다.

 

-볼커의 통화주의로 말미암아 수십 년간 미국 경제의 고질적인 병폐로 여겨졌던 인플레이션은 빠르게 사라졌으나 대신 경기침체가 찾아왔다. 볼커는 아랑곳하지 않고 긴축정책을 계속 밀어붙였다. 볼커의 초긴축 정책은 경제분야 밖에서 의외의 소득을 가져다주었다. 미국의 경기침체로 인한 국제유가의 하락은 소련의 급격한 석유 판매수입의 감소로 이어졌다. 게다가 세계적인 고금리 현상이 계속되니 국제금융시장에서 자금조달비용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당시 소련은 폴란드와 동독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을 거두어 먹이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금리 급등은 소련 경제에 내출혈을 일으켰다. 구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힘에 겨운 나머지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마침내 독구권 위성국가들에게 소련에만 의존하지 말고 개혁과 개방을 통해 스스로 살길을 찾으라고 요구했다. 이것은 소비에트 블록의 와해로 이어졌다. 이처럼 볼커의 조치들은 국가안보는 물론, 경제 면에서도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미국 경제의 체질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1980년대 중반 미국은 저축대부조합의 부실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촉발된 저축대부조합의 부실은 결국 1990년 신용경색으로까지 이어졌다. 만일 그 당시 저축대부조합들의 수신상품이 예금자보호대상이 아니었다면 금융시장의 혼란은 더욱 심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볼커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통화관리법에서는 저축대부조합의 수신상품도 예금자보호 대상으로 지정했기 때문에 금융시장의 충격을 훨씬 줄일 수 있었다.

 

7. IMF 설립을 둘러싼 스파이 논쟁 (해리 화이트)

-해리 화이트는 케인즈와 함께 IMF와 세계은행을 설계한 사람이다. 당시 케인즈는 과도하게 금울 모아 국제적 균형을 깨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오늘날 벤 버냉키 의장이 우려하는 과도한 저축성향을 제재하는 것과 같다. 케인즈가 이르 걱정한 이유는 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행적 때문이었다. 프랑스는 거의 광적으로 금을 모았는데 이는 국제무역 회복과 독일의 전쟁배상문제 해결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1964년 달러화 위기 때도 프랑스는 미국을 상대로 금태환을 요구하는 바람에 달러화 폭락이 가속화될 정도로 금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었다. 하지만, 미국이 세계에서 금을 가장 많이 보유한 국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미국이 당장 큰 폭으로 달러화 환율을 절상하지 않으면 과도한 저축성향 때문에 제재를 받게 되므로 화이트는 케인즈의 주장에 반대했다. 그래서 제재권한과 발권력을 가지는 국제기구를 만들기보다는, 국제수지에 문제가 있는 국가에 대해서 특별인출권이라는 가상의 통화로 부분적으로 수습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제안했다. 이것이 화이트안의 골자다. 화이트안은 국제 중앙은행을 만들되 각국의 자율성을 감안하여, 신설되는 국제 중앙은행의 최종대부자 기능과 금융감독권한(국제 수지불균형 조정권)은 상당히 약한 형태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화이트 사건은 히스 사건과 함께 1950년대 매카시즘을 대표하는 유명한 사건이다. 한때 미국 사회를 휩슨 매카시즘은 18년을 집권한 민주당이 썩을 대로 썩어서 이제는 연방정부의 중추신경에까지 공산주의가 파고들었다는, 보수파의 공격으로 시작된 일종의 사회정화 운동이었다. 공산주의자로 지목된 대표급 고위 공무원이 재무부의 해리 화이트와 국무부의 앨저 히스였다. 화이트는 청문회 도중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요양을 갔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히스는 온갖 증거조작과 위증, 광기로 인해 5년 형을 살게 되었다.

 

-히스에 비하면, 화이트는 갑자기 사망하여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화이트에 대한 평가는 정확히 둘로 그리고 극단적으로 갈린다. 보수진영에서는 지금도 그를 틀림없는 소련의 스파이로 본다. 러시아계인 화이트가 소련에 심정적으로 동조한 나머지 미국의 국익을 해치는 행동을 저질렀다는 혐의는 꽤 많다. 반면, 그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그가 국제주의자였다는 것이다. 크고 작은 실수는 있었겠지만, 화이트는 기본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며 냉정시대의 국제관계를 미국 사람이 아닌 지식인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화이트 자신도 죽기 얼마 전 청문회에서 소련과의 관계개선은 전쟁을 종식시키려던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의 외교노선이었고 소련과 잘 지내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나의 소신이라고 밝혔다.

 

-1944년 브레튼우즈 회의에 소련 대표단이 참석한 것은 순전히 화이트의 노력 때문이었다. 케인즈는 너무 많은 나라들이 IMF에 참여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국제사회에 별로 기여하지 못하는 후진국들이 많아지면 "IMF가 거대한 원숭이 우리로 전락할 것이라며 그들을 비하했다. 고매한 집안 출신인 케인즈가 그런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서민 출신이었던 화이트는 새로운 국제통화제도의 정착을 위해서는 크고 작은 나라들이 가급적 많이 참여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참가국을 늘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우리나라는 간접적으로 그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 뒤 한국은 한미경제조정협정(마이어 협정)을 근거로 미국 측에 대출금 상환을 요구했고 미국은 나중에 귀찮은 듯이 8650만 달러를 갚았다. 한국은행이 받게 될 그 돈의 용도를 두고 정부에서는 이견이 분분했다. 이 때 김유택 한국은행 총재는 그 돈으로 IMF와 세계은행에 가입하자고 건의했다. 당시 정부인사 중에서 이 말에 귀 기울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케인즈의 눈으로 보자면, 거대한 원숭이 우리 속의 원숭이 한 마리가 50여 년 만에 눈부시게 변하여 2009년 연차총회에서 한국은 지분확대와 IMF의 구조개혁을 당당하게 요구했다. 그리고 한국은 이듬해인 2010년에는 G20 회의 의장국으로서 선진국들과 신흥 시장국들의 가교역할도 했다. 그래서 필자는 감격한다. 그리고 그런 문호를 제도적으로 마련해준 화잍르르 생각한다. 화이트가 주창했던 IMF 문화개방 원칙에 의해 우리나라가 국제통화제도의 이방인이 아닌 당사자가 되었던 데에 힘입은 바가 크다.

 

-‘애국과 매국의 차이가 과연 무엇이냐’. 사람을 평가할 때 눈에 보이는 행적을 우선하느냐, 보이지 않는 의도를 우선하느냐에 따라 결론은 달라진다. 우라나라의 햇볕정책과 대북송금문제도 행동을 보느냐, 그 의도를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남을 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8. 한국은행 설립에 관한 관방주의적 견해 (강만수, 김병국)

-[비밀노트]

콘스탄티누스는 337년 사망하기 직전 세례를 받은 기독교 신자이다. 그는 당시 교황을 불러 자기가 통치하던 광활한 로마제국을 반으로 뚝 잘라 그중 절반을 교황에게 봉헌한다는 어마어마한 유언장을 전했다. 오늘날 서로마제국이라고 말하는 땅이었다. 어느 날 교황청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사제가 우연히 750년경이 되어서야 그 문서를 찾아냈다. 이른바 역사에서 말하는 콘스탄티누스 기진장(Donation of Constantine)이라는 문서다. 그런데 15세기 초 학구열이 넘치는 로렌초 발라라는 학자가 이 문서를 검증했고 가짜임을 증명했다. 교황청 문서관리국 소속의 사제 또는 그의 동료는 형이상학적 이유와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가짜 문서를 만들어낸 것이다. 형이상학적 이유는 삼위일체론(Trinity)을 둘러싼 논쟁에서 바티칸이 우위를 차지하려는 계산을 말한다. 로마 가톨릭은 성령은 성부와 성자 모두에게서 나온다고 말한다. 아리우스파는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온다고 보았다. 로마교회와 동방교회(그리스 정교)는 이 문제를 두고 아주 오랜 기간 반목했다. 심지어 1453년 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했을 때 로마교회는 형제인 동방교회의 환란을 도와주지 않았다. 결국 동로마제국이 하루아침에 멸망하고 콘스탄티노플은 이교도인 이슬람의 영토가 되어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에서는 죽어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말끝마다 삼위일체를 강조하고 있었다. 로마제국이 동서로 갈리기 전부터 로마를 통치했던 황제가 바티칸이 주장하는 삼위일체론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는 기독교 세계에서 로마교회의 주장이 동방교회의 주장보다 정통성을 가진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가짜 유언장을 작성한 현실적인 이유는 교황이 행사하는 각종 세속적 지배권의 법적 근거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 근처의 교황령이라는 영토를 지배하고 지냈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그 근거가 분명치 않았었다. 그래서 기진장을 통해 그 근거를 확고히 한 것이다. 마틴 루터가 주도한 종교개혁이 교황청을 향해 먼 나라에서 이의를 제기한 사건이라고 한다면 발라의 연구는 이탈리아 내부에서 이의를 제기한 사건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을 둘러싼 거짓말의 본질은 권위에 의존한다는 데에 있다. 오늘날 직장에서도 윗사람의 이름을 쉽게 들먹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까 갑자기 발견된 비밀 노트라는 것에 지나치게 흥분해선 안 된다. 이런 것은 대개 가짜거나 주의력을 흩뜨리기 위한 함정에 불과하다.

 

-[타인의 증거]

기독교 교리에서는 부자들이 결코 축복받지 못한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동방박사(Magi)정도가 있다. 메디치 집안에게는 돈이 많다고 반드시 저주받는 것은 아니라는 한 가닥의 구원의 가능성이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잠시 머물다가 자기 나라로 돌아간 세 명의 동방박사들은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에 대해 막연하고도 아련한 향수를 가지고 탄생한 것이 성 요한(Prester John)이라는 가공이 인물이다. 성 요한은 12세기에서 17세기까지 유럽 지역에서 구전되었던 전설의 왕이다. 그는 모슬렘의 어느 지역 또는 아시아 어느 지역을 토이하는 기독교도라고 믿어졌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기특하기 짝이 없는 나라다. 하지만 칭기즈칸의 점령이 끝난 뒤에는 성 요한의 나라가 오늘날 에티오피아 아래의 중앙아프리카 지역으로 슬쩍 바뀌었다. 성 요한의 땅은 지상낙원이라는 설, 영원히 늙지 않는 샘이 있다는 설, 알렉산더 대왕이 세웠다는 난공불락의 성벽은 바로 그의 왕국에서 가져온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설 등, 어차피 믿기 힘든 전설들이 성 요한의 왕국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성 요한과 그의 왕국에 관한 모호한 전설들은 기독교의 범재론(universality)과 부합하는 면이 있었다. 그래서 성 요한의 왕국에 대한 전설이 많을수록 오히려 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비쳤다. 그가 보냈다는 편지가 등장하는 등 성 요한의 존재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1177년 전도사 필립을 동방으로 파견 보낼 때 편지를 썼다. 13세기 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더욱 사실적이다. 동양세계에 관해서 말할 때 성 요한의 이야기를 쓰지 않으면 독자들이 크게 실망하거나 그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일 것이기 때문에 성 요한에 대한 이야기를 담기도 했다. 또한, 17세기 이전 유럽에서 제작된 세계지도에는 반드시 성 요한의 왕국이 그려져 있었다. 유럽인들이 가지고 있던 미지의 세계에 대한 정복욕과 보물섬에 대한 판타지가 결합하여 500년 이상 세계지도에 성 요한의 왕국을 존재하도록만든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히오브 루돌프라는 서지학자가 성 요한이 우호의 징표로 에티오피아에 남겼다는 지도를 면밀히 분석했고, 그 지도가 상상화에 불과한 것임을 증명했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 사회는 오랜 꿈에서 깨어났다. 1684년의 일이었다. 성 요한의 전설은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았지만, 유럽 역사에서 가장 생명력이 길었던 거짓말이었다. 루돌프의 증언 이후, 교황청은 성 요한의 편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성 요한의 편지와 지도를 둘러싼 거짓말의 본질은 권위에 복종하는 데에 있었다. 그런 거짓말이 통할 수 있었던 것은 동방박사를 둘러싼 권위에 복종하려는 사람들의 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잘못된 믿음이 잘못된 물증을 탄생시킨 것이다. 성 요한의 편지가 주는 교훈은 타인의 증거에 관해 한번쯤 의심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뿌려지는 주장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그 주장을 말하는 사람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기 쉽다. 직장에서도 윗사람 한마디에 자기주장이나 철학을 쉽게 바꾸면서 그 말이 맞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28년간의 고독]

모든 수도회는 기도를 중시하여 청빈한 생활과 순결을 강조한다. 청빈한 생활을 특히 강조했던 도미니코 수도회는 교황과 추기경들도 눈치를 볼 정도였다. 1497년 피렌체에서 메디치 집안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뒤 사치품은 물론, ‘정신을 타락시키는책과 예술품까지 몽땅 불태우고 중세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유럽에서는 허영의 불꽃(Bonfire of Vanities)' 사건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수도회 소속이었던 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지독한 비판과 도전에 시달리던 교황청은 지독한 청빈을 강요받는 피렌체 시민들의 불만을 이용해서 그를 권좌에서 밀어냈다. 교황은 그를 종교재판에 회부한 다음, 그가 책을 불살랐던 피렌체 광장에서 그를 화형시켰다. 허용의 불꽃 사건이 있었던 다음 해인 1498년이었다. 피렌체는 공화국에서 군주국으로 환원되고 메디치가의 지배가 다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서강대학을 세운 예수회는 교황청과 사이가 좋은 수도회다. 예수회 소속 선교사였던 이마두 선생은 자기 고향 이탈리아에서는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라고 불린다. 그는 마카오에 도착하여 황제의 환심을 사 1605년 선무문 안에 천주교당을 세웠다. 이것이 아시아 최초의 가톨릭 성당이었다. 그는 황제의 교화에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최측근들이 이마두를 견제했기 때문인데, 그가 가져온 곤여만국전도라는 세계지도에는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의 집요한 질문에 교황청을 지시를 따라야 했던 이마두는 지구가 둥글다는 지동설에 대해 설명할 수 없었다. 지동설에 관해 침묵하여 불가피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이마두의 모습을 보고, 중국의 고위관리들은 그의 정체와 의도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마두가 지키려던 침묵의 본질은 권위를 지키려는 데에 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라는 성경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교황청의 세속적 위신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이마두의 실패가 주는 교훈은, 무엇을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엇을 말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직장에서도 자기가 아는 정보를 혼자 알겠다고 시침 떼거나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번 알려지면 그 뒤로는 두 번 다시 신뢰를 회복하기 힘든 위험한 곡예다. 세계사를 뒤바꿀 수도 있었던 그의 노력, 즉 중국에서 인내심으로 보낸 ’28년 간의 고독은 의도된 침묵이 망쳤다.

 

-[삼류소설]

외환위기 이후 공직에서 물러나 있던 강만수 님의 현장에서 본 30(2005)1980~1990년대의 한국은행법 개정논의를 다룬 글이다. 그의 중대 전환점은 미국에서 강의를 들으며 The Federal Reserve Ssytem, Purpose&Function(1939)이라는 책을 입수하는 순간과 블룸필드 보고서라고 불리는, 한국은행 설립을 위한 검토 보고서의 사본을 얻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제시한 2개의 결정적인 증거를 계기로 한국은행법 개정 논의에서 전세가 역전되고 한국은행의 입지는 논리에서 점점 멀어졌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이나 성 요한의 편지를 기억하는가? 갑자기 등장하는 비밀 노트에 흥분하거나 남이 불쑥 제시하는 타인의 증거를 덥석 믿어서는 곤란하다. 거기에는 반드시 함정이 있게 마련이다. (이후 자세한 후막은 책을 통해 보는 것이 정확하기에 여기선 생략한다)

 

-상대의 논리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할 수는 있지만, 그런 노력이 무의미하기도 하다. 강만수 님은 서울대학 법과대학을 나오신 분으로서 그분의 학식과 논리로 말하자면, 아무도 따라갈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더 훌륭한 학식과 논리를 가진 사람도 강만수 님의 굳어진 생각을 바꾸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지식(knowledge)이나 논리는 진실(truth)과 믿음(belief)의 교집합이라서, 믿음이 다르다면 아무리 진실을 이야기해도 소화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대 인식론의 기본명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논리는 믿음 위에서만 작용한다는 사실, 그것이 논리의 한계다. 이는 에드먼드 게티어의 Is justified true belief knowledge에서 잘 설명한다. 강만수 님은 19세기 독일 관방주의에 입각해 관존민비 또는 정부 주도형 사회를 이상향으로 삼는 이상, 그리고 진입장벽을 통과하여 공무원 연금을 받는 직업 공무원만이 정부의 유일한 구성원이라고 믿는 이상, 그분은 공익을 지향하는 근대 중앙은행제도와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는 개념을 영원이 이해할 수 없다. 윤리는 논리와 다르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판단하는 문제이며 지적 능력이나 수용 가능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강제로 적용되는, 준엄한 잣대다. 그 잣대는 강만수 님도 피해갈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논리가 아닌 윤리를 짚어보기로 했다. 본문은 그런 자세에서 나온 결과다. 김병국 교수의 주장은 윤리뿐만 아니라 논리 면에서도 준엄한 심판을 면할 수 없다. 김병국 교수는 재무부가 공익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면 영란은행에 필요한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영란은행법 제4조를 소개한다. 소위 지시권이라는 것인데, IMF는 이것을 독소조항이라고 평가한다. 영란은행의 독립성은 이 조항 때문에 세계에서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이는 일본과 히틀러 정권의 라이히스방크법과도 유사하다. 영국와 일본의 특이한 경우를 중앙은행제도의 일반적 조류라고 믿는 김 교수는 결국 시대착오적인 결론을 제시했다.

 

9. 한국은행 설립의 진실과 의미

-당시 미국에선 재무부가 금리정책의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고 해서 연준 제도의 취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ECA도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어 김도연 재무부 장관에게 미국 재무부가 아닌 연준과 직접 상의하라고 조언했다. 만일 김도연 장관이 스나이더 장관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면, 미국 재무부 직원이 파견되어 정부가 매일 금리를 결정해주고 통화신용 정책을 최종 책임지는 스나이더 장관식 중앙은행제도가 탄생했을 것이다. 과거 일본이나 소련에 비해 결코 다를 것이 없는 시스템이다. 거기에 더하여 원래 금융계 인사가 아니었던 김도연 장관, 최순주 총재가 개입하고 학자풍의 젊은 박사 블룸필드까지 합류했다. 그런 우연한 조건이 결합되어 한국의 중앙은행제도는 기득권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논의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중국과 일본을 훌쩍 뛰어넘어 훨씬 진보적인 모습을 취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화폐제도의 열등생 한국이 중국과 일본의 장벽을 극복하고 민주적 중앙은행제도를 먼저 채택한 것은 행운이었다. 하지만 블룸필드가 남긴 최초의 한국은행법은 5·16 군사정변을 계기로 처음의 모습과는 크게 다르게 성형수술되었다. 어떤 때는 관방주의나 군국주의의 찌든 구시대적 행정이론 때문에 한국은행법 자체가 위헌이니,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느니 하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당시 주변국들과 과거의 관행만 보고 중앙은행을 만들었다면 나치즘이나 군국주의 성향의 후진적 제도가 채택될 확률이 훨씬 높았다. 그랬으면 재정난을 겪는 정부에 돈을 풀면서 인플레이션으로 고생하는 후진국들의 고질병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한국은행이 19506월까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일제강점기의 금융제도로 한국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발권기관이 상업은행 업무까지 수행하면서 은행감독기능은 없는, 후진적 시스템으로 전시업무를 수행했다면 국난 극복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한국은행의 설립은 근대화된 중앙은행과 화폐제도를 통해 대한민국의 국가주권이 완결성을 갖게 된 사건이기도 했다. 그렇다! 이제 그 옛날 조선은행 직원들의 소아적 성취감이나 그것에 무조건 반대했던 재무부의 소아병적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금융법 제1호에 담긴 정신과 의미를 똑바로 기억해야 한다. 지난날 이해 관계자들끼리 카인의 후예들이 되어 드러냈던 갈등과 반목을 극복하지 않는다면, 21세기의 대한민국 금융은 또다시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10. 한국은행을 사랑한 어떤 재벌(수재 민병도)

-일요일 저녁 집에서 쉬고 있던 민병도 총재를 호출한 박정희 의장은 대뜸 잠시 후 화폐개혁을 단행할 것임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주요 정책결정과정에서 한국은행 총재가 철저히 소외되었다. 결국 화폐개혁은 내자조달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국민의 심리적 위축만 초래한 채 실패했다. 화폐개혁에 실패한 혁명정부는 새로운 궁리를 했다. 수출을 늘리기 위해 외국 중고선을 수입하여 통조림을 만들어 팔겠다는 계획이었다. 위기감을 느낀 민병도 총재는 외환담당 김성환 이사에게 보고서를 작성토록 하고 정부의 경각심을 촉구했지만, 정부에서는 별로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국무회의에 참석한 민병도 총재는 어업차관은 현재의 수산기술과 인원을 가지고는 도저히 원리금 상환이 불가능합니다. 외환사정을 생각해볼 때 제가 한국은행 총재로 있는 한 이 차관은 절대로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총리 이하 관계 장관께서는 이 계획을 재고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단호히 말했다. 1963년 정부가 한국은행법을 개정했지만 당시에 회수하지 못했던 은행감독권한을 1년도 되지 않아서 그것을 회수하기 위한 개정을 진행하고 있었다. 민병도 총재는 개정에 반대한다는 자문 답신서와 함께 사직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기자회견에서 민병도 총재는 금융의 정치적 중립과 민주화를, 혁명정부가 민정이양에 앞서 이루어놓기를 바랍니다.”라고 비장한 항변을 내비쳤다.

 

-민병도 총재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에 자기가 번 돈까지 남이섬에 몽땅 투자하여, 아무도 돌보지 않는 이 볼모지를 국제적 관광지로 만들었다. 친일파의 후손이 한류열풍의 소재를 제공함으로써 일본인들이 한국의 문화와 풍광에 스스로 푹 빠져들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극적인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친일파의 후손이 우리 국민에게 속죄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가장 훌륭하고 완벽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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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만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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