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별곡_차현진



이 책은?




-피에타 법: 메디치 가문 출신인 교황 레오 10세가 1515년에 발표. 독일의 요하네스 에크(Johannes Eck)라는 신학자가 계약에 관한 연구라는 책을 통해서 연5%의 금리는 하나님께서 용서할 수 있는 합리적인 상한선이라고 주장. 교황 레오 10세는 이를 반영하여, 가난한 사람을 위한 대부업법인 피에타 법으로 서양 역사에서 금융업을 합법화한 최초의 사건.

 

-볼셰비키 혁명 이후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본주의를 붕괴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돈을 타락(debauch)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가짜 돈은 요즘과 같은 불태환 화폐제도뿐만 아니라 금속화폐 제도하에서도 골칫거리였다. 금속화폐의 성분을 조작하는 방식으로.

 

-1550년경 인쇄기술에서 파생된 압축 공법이 개발되어 과거보다 훨씬 단단하고 정교한 모양의 돈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때마침 남미대륙에서 거대한 은광을 발견한 스페인은 국왕 펠리페 2세가 통치하던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독일 지역에서 압축 기계를 가져와 은화 제작에 적용했다. 이 은화를 정교함과 단단함, 균일함 면에서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었기 때문에 스페인 은화가 자연스럽게 기축통화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스페인의 은화는 톨라르라는 이름으로 유럽과 신대륙에 퍼졌다. 이것이 오늘날 달러(dollar)'의 발단이었다. 그리고 이 은화는 임진왜란 이후 필리핀과 일본을 거쳐 한국과 중국에까지 유입되었다. 중국인들은 스페인 은화를 은원銀圓이라고 불렀다. 가운데가 뚫린 엽전과 달리, 가운데가 막혀 있어 둥그런 은쟁반과 같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둥글다는 뜻의 한자가 한중일 3개국의 화폐단위로 쓰이게 된 계기였다. 이 모든 것이 16세기 독일의 인쇄술에서 출발한 사건이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하고, 인천항에서 경인선을 타고 서울역에 도착한 일본인들의 서울 생활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그 주변에는 조선은행(오늘날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을 포함한 주요 국가시설들이 밀집했다. 일본은 조선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태종의 딸(경정공주)이 살던 동네의 이름을 작은공주골(소공동)’에서 하세가와마치로 바꿨다. 이는 조선총독의 이름이었다.

 

-해방 후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 있던 100원짜리 인쇄 원판을 일본인 간부들이 빼돌렸다. 이를 이용하여 몰래 지폐를 인쇄한 뒤 철수하기 바쁜 일본인들 속에서 인쇄 원판을 조선공산당 당원이 빼돌렸다. 해방 직후 남조선에서는 공산당이 합법 단체였다. 조선공산당은 근택인쇄소를 조선정판사로 개명한 뒤 공산당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인쇄했고, 건물 지하에서 몰래 대량의 위조지폐를 제작했다. 이후 인쇄 원판을 이용해 공작금으로 사용한 사실이 적발되었고 이를 계기로 조선공산당은 철저히 외면 받았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남송시대부터 교자라는 종이돈을 발행하며 금융업을 펼친 상인들이 있었다. 청나라 때는 전장이라는 금융기관이 조선에서도 영업을 했다. 그 주인을 장궤이라고 하는데, 이는 손금고라는 뜻이다. 그들 옆에 항상 작은 금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금융업이 생소했던 조선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을 짱께라고 불렀다.

 

-일본 무사 정권은 은화와 금화의 교환 비율을 4.58:1로 정하고 료가에(허가받은 금융업자)’들이 이를 따르도록 명령했다(복본위제도). 이 비율은 미일수호통상조약(1858)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으나 당시 국제 시세인 15:1과는 너무 달랐다. 결국 저평가된 금화가 개항 이후 급속히 해외로 유출되고, 일본 국내에는 저질 금화만이 남겨졌고,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은본위제도가 뿌리를 내렸다. 이는 미국에 엔고를 약속했다가 장기 불황을 초래한, 1985년 플라자 합의와 비슷한 모습이다.

 

-중앙은행에 대한 과세 문제는 오늘날에도 정해진 해답이 없어 나라마다 처리 방식이 다르다. 한국은행도 처음에는 비과세기관이었으나 1981년 소득세법과 조세감면법 개정을 통해 과세 대상이 되었다.

 

-조선은행 총재였던 쇼다의 생각에 따르면, 조선은행은 일본의 대륙 진출을 위한 금융적 도구다. 따라서 조선은행은 조선을 넘어선 존재여야 했다. 이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총독의 생각과도 같았다.

 

조선은행의 문란

-2015122ECB는 유럽이 당면한 디플레이션 위험에 맞서서 양적완화를 결정했다. 각국의 경제 규모에 맞추어서 회원국 중앙은행들이 매월 일정량의 자국 채권을 지속적으로 매입하기로 한 것이다. 그 결정에 분데스방크(독일 중앙은행)가 그리스 국채를 사는 일은 포함되지 않았다.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외국 정부를 돕는 것은 대부분 정상이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중앙은행의 정부 대출이나 국채 인수를 법률로 금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러 군벌이 한 치 앞을 모르고 각축할 때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것은 결국 외채를 제대로 갚는 정권이다. 일본은 정치차권을 지원해 외국 빚을 상환하고 타국에 친일 정권이 들어서게 하였다. 이것은 일본이 유럽을 제치고 각종 이권과 자원을 먼저 확보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데라우치 조선총독은 쇼다 가즈에 조선은행 총재를 대장상으로 임명했고, 이를 조언한 사람은 니시하라 가메조다. 오늘날 니시하라에 관해 남아 있는 기록이 거의 없으나, 그의 역할이 그만큼 가볍지는 않았다.

 

-대중국 자원외교를 니시하라 차관이라고 한다. 쇼다는 자금을 마련하고, 니시하라는 철도, 석탄, , 식량 등 온갖 이권을 흥정했다. 자금책을 맡은 쇼다는 우선 조선은행과 대만은행을 끌어들였다. 중국의 발권은행인 교통은행이 과도한 정부 대출로 발권 여력을 상실한 채 파산 지경이었다. 이 은행이 파산하면 조선과 대만의 화폐제도와 경제도 타격을 받는다는 쇼다의 설명과 함께 조선은행과 대만은행은 각각 500만 엔을 대출하였다. 이후 다른 대화 지원 사업에도 계속 끌려들어갔다. 니시하라 차관은 철저한 실패로 끝났다.

 

-오늘날 중앙은행은 통화스왑 계약을 통해 돈을 주고받는다. 이는 과연 최선인가, 탈선인가. 2008년 국제금융시장의 안정을 위해 추진된 한미통화스와프 계약은 당시 상황에서 최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그보다 90년 전에 추진된 동북아 국제통화질서의 안정을 위해 조선은행이 교통은행을 도왔던 대출 계약은 탈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위기에 처한 외국 중앙은행을 돕는 것이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 둘은 다르지 않다. 다만, 전자는 발권 기관들끼리 자발적으로 진행했고 후자는 정부의 지시에 따라 진행되었다. 그것이 최선과 탈선의 차이였다.

 

-화폐국정설(The State Theory of Money. 1905) 독일의 게오르크 크나프가 발표한 저서로, 국민들은 좋든 싫든 세금을 내야 하고, 국가 또는 통치자가 특정 지급수단으로 세금을 걷는 순간 그것이 사회적 통용력을 얻기 때문에 결국 화폐의 존립 근거는 국가 또는 통치자의 명령에 있다는 것이 골자다. 화폐의 소재가치는 무의미하며 국가가 정한 명목가치만이 중요하다. 따라서 명목주의라고도 한다. 20세기 초반의 주류 경제학자들은 화폐가 거래의 편의를 위해서 고안된 민간인들의 발명품이며, 국가의 명령이 아니라 소재가치에 의해 존재한다고 본다. 화폐국정설에 대립되는 주류 경제학자들의 견해를 금속주의라고 한다. 케인즈는 화폐국정설의 영향을 받아, 주류 경제학자들이 금본위제도에 집착하는 것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출발한 금화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며 이를 바빌론의 광기라고 혹평했다.

 

-1907년 금융공황은 오늘날 연준 설립의 계기가 된 큰 사건이었다. 그 발단은 뉴욕에서 세 번째로 큰 니커보커 신탁회사가 콜시장에서 거액의 자금을 빌려서 주식 투자에 나섰다가 파산한 데 있었다. 당시 사건의 주범 찰스 모스는 공금 유용과 주가조작으로 15년 형을 선고받으나 돈의 힘으로 3년 만에 출소했다.

 

-20세기 초 미국 연방정부는 모든 군함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면서 국유지의 유전관리권을 해군에 맡겼다. 그런데 1921년 워런 하딩 대통령은 취임 직후 헌법상의 행정명령권을 발동해 유전관리권을 내무부로 옮겼다. 대통령의 포커 친구 앨버트 폴 내무장관이 졸랐기 때문이다. 권한을 넘겨받은 폴은 기다렸다는 듯이 티포트 돔(Teapot Dome)이라는 유전을 포함한 몇 개의 국유지의 독점개발권을 특정 업체에 헐값으로 넘겼다. 입찰도 거치지 않았던 이 수상한 거래를 티포트 돔 스캔들이라고 한다. 여론의 압박 속에서 수사가 시작되자 현직 검찰총장의 최측근이 자살하고, 독점개발권을 넘긴 폴 장관은 수뢰 사실이 밝혀져 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국민의 지지도가 땅에 떨어진 하딩 대통령은 재선을 의식하고 1923년 전국순회여행에 나섰으나, 객지에서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19239월 간토대지진이 발생했다. 지진 직후 일본 정부는 발권력을 통해 재해 복구에 나섰다.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기업의 어음을 거래 은행들이 할인하면, 일본은행이 이를 다시 할인토록 한 것이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일본은행의 손해는 정부가 1억엔 이내에서 보상하기로 했다(일본은행 진재어음 할인손실보상령). 하지만 실상은 구제 대상으로 지정된 스즈키상점, 구하라상사, 하라합명, 다카다상회 등은 지진 피해 기업이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중 투기적 경영과 과도한 배당으로 부실을 키운 독점재벌들이었다. 반동공황으로 파산 위기에 있엇던 그 회사들에, 지진은 오히려 호재였다, 그리고 이 지원 자금은 조선은행과 대만은행을 통해 나갔다. ‘진재어음 문제’, 즉 지진을 빌미로 시작된 금융기관의 심각한 부실은 일본 경제의 만성적인 불안 요인이 되었다. 3월이 되자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 예금 인출 요구에 시달리던 도쿄 와타나베은행은 대장성을 찾아가 은행이 자금 부족으로 어음결제가 자꾸 지체되고 있어 곧 휴업해야 할 판이라고 실토했다. 하지만, 그날의 어음교환결제는 무사히 넘어갔다. 하지만, 가타오카는 이를 모른채, 야당을 압박하기 위해 도쿄와타나베 은행도 지금 어음결제불능 사태다라고 폭탄선언을 했다. 이튿날 44개 은행이 휴업에 들어가고, 이후 파산하는 은행들이 속출했다.

 

-이노우에 대장상은 재정긴축과 산업합리화 조치에 과감히 나섰고, 192911월 금 수출 해금을 발표했다. 하지만, 하필 한 달 전 뉴욕 증시가 폭락하면서 전 세계가 대공황의 늪에 빠졌다. 돌아보면, 금본위제도로 복귀하기에는 가장 부적절한 때였다. 영국의 금본위제도 복귀 역시 노르만 정복이라는 야유를 받는다. 고용 안정을 해친 그 결정은, 처칠이 영란은행 총재 몬터규 노먼에게 조종당했기 때문이라는 원망이다. 이것은 금본위제도를 야만의 유산이라고 비난했던 케인즈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금본위제도 복귀는 자유무역 확산과 국제 평화를 바라는 당시 세계주의자들의 요구였다. 화폐 문제에서 정부의 영향력을 줄여야 한다는 것은, 볼셰비키 혁명과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목격한 그 시대 지성인들의 공통된 결론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노우에와 노먼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인물과 사건을 평가할 때는 다면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어렵다. 과거의 해석은 결국 현재의 해석이며, 과거를 보는 눈이 미래를 결정한다.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은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 있을 수 있었던 일과 있었던 일은/한끝으로 모이고/그 끝은 언제나 현재니라(4개의 사중주)”라고 하지 않았던가!

 

-후발 산업국가인 독일과 일본, 그리고 조선에서는 보증발행한도와 발행세율이 통화량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정부가 중앙은행의 발권업무에 영향을 미치는 이런 제도를 굴신제한제도라고 하는데, 이는 금본위제도에 관리통화제도(불태환제도)를 접붙인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금본위제도가 퇴조하고 관리통화제도가 자리잡으면서 통화량 조절의 작동 원리는 굴신제한제도에서 지급준비제도로 대체되었다.

 

-동태적 비일관성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사태의 정도가 심각하면, 정책의 일관성보다 패러다임 시프트를 모색해야 한다. 대공황이 바로 그런 때였다. 미국의 하버트 후버 대통령은, 경기 회복을 시장에 맡기자는 앤드루 맬런 재무장관의 권고를 무시하고 재정지출을 파격적으로 늘렸다. 당시 미 연준의 최종대부자 기능은 시원치 않았다. 연준이 스스로 한게를 긋고 돈을 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실수도 있었다. 후버 대통령은, 균형재정을 위해 소득세율과 법인세율은 인상하고, 수입관세율을 사상 최고 수준으로 올렸다(스무트-홀리법, 1930). 그 실수를 후임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케인지안들이 놓치지 않고 과장해서 비판했고, 후버는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긴축만 추구했던 무능한 인물이라는 오해를 받는다. 일본의 대응은 훨씬 긴축적이었다.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은 대공황 즉, 쇼와금융공황을 맞아 재정 긴축, 관세 인상과 함께 산업합리화로 대응했다. 19306월 상공성에 임시산업합리국을 설치하고 한계기업들을 정리했다. 여기서 살아남은 수출 대기업들은 절약과 신축을 택했다.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과 제품 가격 인하를 통한 기아 수출, 덤핑 수출로 버텼다. 그러나 대공황이 가격 조절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공급과잉이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화폐가 실물경제로 잘 흘러가야 한다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래서 한때는 국채를 포함한 일체의 유가증권이나 융통어음의 매입(공개시장조작)가지 금기시되었다. 화폐공급과 실물경제가 강력하게 연결되려면, 생산과 유통과정에서 발행된 어음만 중앙은행이 할인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를 진성어음주의(real bills doctrine)라고 한다.

 

-다른 금융기관들은 조선총독부령을 근거로 설립되어 조선총독부의 감독을 받았으나, 조선은행은 일본법(조선은행법)을 근거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의 지휘계통을 벗어났다. 따라서 조선은행의 감독권은 일본 대장성으로 이관되었고, 조선총독부는 조선은행(선은) 대신 조선식산은행(식은)을 금융정책의 창구로 활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의 금융기관들은 선은계식은계로 구분되었다. 선은계는 조선은행이 일본 콜시장에서 조달한 자금을 공급받는 보통은행들이었고, 식은계는 그 나머지였다. 식은계는 일본에서 직접 자금을 조달(동양척식주식회사)하거나 일본에서 자금을 조달해온 식은에 의존했기 때문에 감독권이 없는 조선은행을 소 닭 보듯했다. 그런데, 임시자금조정법의 일환으로 일본 정부의 국채 발행과 차입금 조달을 지원하는 조선금융단이 발족되었다. 오늘날 전국은행연합회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조직의 단장은 조선은행 총재가 맡았다. 조선은행은 솔선수범해 일본 국채를 인수하면서 다른 금융기관들을 독려했다. 과거 경쟁 상대였던 식은에게까지 국채 인수 자금을 듬뿍 융자했다. 그때부터 식은계가 조선은행을 비로소 맏형(primus inter pares)으로 대접하기 시작했다.

 

-고종 황제가 대한중앙은행이라는 이름으로 세우려고 했던 최초의 중앙은행은 일본의 저지로 수년간 출범이 늦어졌고, 결국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로 구한국은행이 대한제국의 중앙은행으로 세워졌다(1909). 구한국은행 출범을 며칠 앞둔 19091026일 이토는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고 숨졌다. 그가 죽은 뒤 대한제국은 사라지고 구한국은행은 조선은행으로 바뀌었다. 출범 초 조선은행은 조선총독부의 충실한 자금줄 역할을 했다. 하지만, 군 출신인 데라우치가 물러나자 상황이 급변했다. 특히 대장성 출신의 총리인 하마구치는 조선은행 폐지법률안을 추진하거나 조선은행과 견원지간인 요코하마정금은행의 스즈키 사마키치를 조선은행의 총재로 임명하고, 기구 축소와 인원 정리를 채근했다. 시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선은행은 만주국 중앙은행을 목표로 열심히 정부를 도왔으나 막상 만주국이 설립되자 그 지역에서 축출되었다. 그 시련은 중일전쟁을 계기로 끝났다. 일본의 화폐제도와 금융시스템 안정을 명분으로 일본은행을 놔두고 조선은행이 전쟁에 동원된 것이다. 조선은행의 조직과 이익은 다시 확대되었으나 그만큼 군부의 입김도 세졌다. 조선은행은 임원을 내부인사에서 발탁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에 반해, 조선식산은행은 임원의 절반을 내부승진자로 채웠다. 그래서 수석 졸업생은 식산은행으로, 차석 졸업생은 조선은행으로 간다는 소문이 조선의 상업학교 학생들 사이에 퍼졌다. 조선은행에 그나마 구심점이 있다면, ‘쇼다 인맥이었다. 쇼다 가즈에는 대장성차관 출신의 제2대 총재인데, 그는 니시하라 차관을 총지휘했다. 그것 때문에 조선은행이 자본잠식 상태에 빠지자 국고금으로 조선은행에 특별융자 실시를 결정하고 그다음 날 대장상직을 사임했다. 조선은행 입장에서는 병 주고 약 준 셈이다.

 

-구형서의 동생으로 태어나 도쿄상대를 졸업하고 1925년 조선은행에 취직한 구하라 이치로는 바로 구용서 한국은행 초대 총재였다. 그의 아버지 구연수는 경복궁을 지키는 군인이면서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적극 가담한 친일 역적이다. 구용서는 그런 배경 때문에 조선은행에 특채된 듯하나 자신은 일제의 일방적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방대한 친일인명사전에도 구용서는 빠져 있다.

 

-해방과 더불어 롤런드 스미스 미 해군 소령이 조선은행의 새 총제로 임명되었으나, 그는 은행업을 잘 몰랐고 출근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반공이념이 투철한 조선은행 직원들의 집단자율지도체제를 상당 수준 인정해주었다. 거액 대출을 일일이 승인했던 조선총독부의 권한이 이후 미 군정청의 재무국장인 찰스 고든 육군 중령에게 넘어갔다. 조선은행 간부들은 출근길에 스미스 총재가 아닌, 고든 재무국장을 만나 군정이 대출을 보증한다는 쪽지와 함께 특정 기업 대출을 지시받았다. 이런 실상이 알려지면서 쪽지 대출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한남동 미군 부대 앞에 문전성시를 이뤘다.

 

-해방 직후 미군 통역은 굉장한 권력이었다. 일본인 소유 재산 일체를 미 군정청이 압류하자, 소위 적산이니 귀속재산의 불하를 바라는 사람들은 통역관들에게 뒷돈을 주고, 그것을 받은 통역관들은 미군 관리들을 설득해 소유권이나 경영권을 넘겼다. 여기서 통역 정치모리배라는 말이 생겼다. ‘’, ‘사바사바(속닥속닥의 비속어)’, ‘새치기(일본어 요코도리의 직역어, 원래 뜻은 횡령)’도 이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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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선

경제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만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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