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의 기술_레베카 라인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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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방황을 가로막는 것(재료) → 방항을 위한 생각 도구(현상)


[재료]
①불확실성 시대의 확실성

전문가: 불확실성을 다소 줄일 수 있는 나의 판단의 의탁 대상

실제 위험<가능 위험

우리가 신경쓰는 실체(이것이 옳다고 아는 것X, 믿는 것O)


#1 하이데거

: 불안은 인간의 기본처지다.

not deflation(하방의 방향성x) → 상방의 가능성을 인지하라는 의도

조심성(불안과 다름)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인생에 대한 통제력의 확장

우리는 우리를 믿지 않기 시작. 전통이 해체된 지금 할머니는 우리에게 행동 지침을 주치 못한다.

결국, 우리는 전문가의 의견을 듣더라도 우리가 해석하여 결정한다.


Alternative

1. 불안을 주는 고독과 불쾌하고 섬뜩한 성찰의 공간을 이용하여 자기 인생을 control

2. 사람들이 우리를 책임지는 공공의 보호 공간으로 귀의. (자기 삶을 통제하고 싶었던 불가능한 욕구 발현)

="각자는 타인이고, 결코 자기 자신이 아니다"


②나르키소스 2.0 ('나'를 너무 사랑하는 나에 대하여)

빨리빨리의 현대에 자신의 정체성을 식별하는 것은 어렵다.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어라

→요즘 우린 SNS를 통해 쉽게 보여줄 수 있음 (나르시즘은 이상이 없는 현대인들이 믿는 대체신앙)

*우리에겐 이상이 소멸했다. 우리의 현실은, 전통, 집단 등과 분리되었다.


허무주의는 유사 기독교를 무효화시키고, 우리가 더 이상 믿지 않는 가치에 위선적으로 집착하는 현상 (by 니체)

→이상(과거엔 신의 구원)이 없기에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탄생과 소멸의 끝없는 공회전

초인은 동일한 것의 무가치에서 충만을 발견할 것이다. (철저한 인생 긍정)


나르코시스(마취)

나르키소스=자기애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한 얼굴에 사랑에 빠짐.

*우리의 사진과 동영상은 자신의 우연한 편린, 단순한 재생산이다.

우리는 가상적 '나'(instagram)를 실제의 '나'로 생각하지 않고, 적어도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but, '나'가 복제되고, 독립할수록 원본과 복사본을 구분하기 힘들어진다.

→이것을 알아내기 위해 개별 상담 신청. (자신의 열정, 근심, 두려움에 집착할수록 더 불확실)


영원회귀 벗어날 수 없음

→만족감 대신 피로감 엄습

→다른 사람이 되고싶다.

→쉽게 변할 수가 없다.

→갑자기 자기 자신이 되고싶음. (그토록 거부했던)

→자의식을 갈고 닦음.

→자신감이 오른다.

→but, 그렇게 얻은 자의식과 자존감에는 끝없는 안전대책이 필요하다.


인생엔 탐구해야 할 비밀과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자신에 대한 생각, 평가를 차단하려 애써보고 '나'에 대한 질문을 해보자.


③과도한 이분법적 사고(선과 악을 구분하는 일에 대하여)

착한 사람. 확실한가? 기준은 무엇인가? 그 기준을 정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환경 탓? 트라우마 탓? (무한역행의 문제. 피해자는 산더미인데 가해자는 없다)

근본적으로 자유의지가 있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 어떻게 대처할 지 선택 가능하다.


중세: 악행은 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

근대(칸트): 악덕은 도덕적 규범으로부터의 일탈.

현대: 정신병리학(도덕, 신학x)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선한가?

허영심>도덕심이진 않았을까?


선과 악을 구분하는 올바른 척도에 대한 감각을 잃었다.

악과 죄는 낯선 것이 되어버렸다.

→도덕적 상대주의(현대에 일반적 임의성)

→최종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책임의 위험도 없다.

→도덕을 우연에 떠넘긴다. (이게 싫다면 우리는 불편해져야 한다)


1. 악한 사람이 모두 병은 아닐 것.

2.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 있을 수 있다.

3.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가?

4. 나쁜 사람도 좋은 구석은 있을 것이다.

→과감히 판단해야 한다. 


과정과 결과의 공정성 인식


④모든 것이 당연해진 일상(빈곤해진 상상력에 대하여)

악행의 이유를 정신적 장애에서 찾는 것은 근시안적이다.

악인으로 만드는 것은 공허 때문이다. 우린 능력을 강조하여 맹목적으로 많은 능력만 추구한다.

질문하지 못하는 세태에서 부조리함이 나타난다.

일상생활의 부조리는 "틀에 박힌 생활을 아무 의문없이 받아들이는 것"

→습관이 들어도 부조리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시지프스 신화(알베르 카뮈)

: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사람은 질문을 그만둘 수가 없다.

중세: 시지프=속죄자

그 이후: 일, 인간관계, 작품, 정치적 이상을 위해 지치지 않고 노력해도 소용이 없는 무력한 인간.

시지프스: (산을 내려오면서) 자신의 고통을 초래했던 지식은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한다. 경멸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운명이란 없다.


카뮈는 감탄의 눈길을 보낸다.

부조리를 깨달았다면 자살or살인보단, 의미있는 일을 해라.

상상력으로 세상과 부딪쳐라.


한나 아렌트

기술시대→악의 평범성(인간의 사적공간 소멸)


내가 했던 발제문

1. 합리론에 입각하여 창조된 관념(ex. 남녀, 선악 등의 배중률에 종속된 개념)이 현실에선 오히려 우리의 판단기준을 왜곡하고 있다.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가?

2. 모두가 피해자인 세상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선과 악'의 도덕적 범주를 결정짓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 나눠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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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선

경제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만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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