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사유의 시선_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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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국내의 전반적인 위기를 인지하고 해결책의 하나를 제시해준다. 사건·사고를 총체적으로 묶어서 하나의 시선으로 해결 방향을 확인할 수 있다. 글이 어렵지 않아,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대한다면 생각보다 쉽게 읽혀지는 통찰력에 재미를 느낄 것이다.




종은 지켜야 할 것이 많다지켜야 할 그것은 자신이 만들지도 않았다.

자신이 만들지 않은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인도하는 모순적 상황은 내면의 불균형을 가져온다.

그 분열적 상황을 이겨내는 방법이 있다.

선명성과 불타협의 철저함을 발휘하여 마치 주인인 것처럼 자기기만을 해낸다.

목에 힘줄을 세우고, 눈에 핏발을 감추지 않으며, 팔뚝을 휘젓고 목소리를 높인다.

타협이 없는 선명성을 내세워 진실한 주체로 드러나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자신이 얼마나 충성스런 종인가만을 드러낼 뿐이다.

이는 눈 어두운 사람들끼리는 알 수 없다.

눈 밝은 사람만 안다.

p.11


우리나라가 한 단계 더 진보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가장 시급한 일은

이러한 극단적인 이념 대립에 빠지는 지적 단순함에서 빠져나와

각자 자신의 벽을 넘어서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이념 대립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대립을 품어 안는 내적 공력을 키워 지속적으로 변증법적 상승을 해야 한다.

여기서 내적 공력이란 자처럼 대립된 해와 달을 동시에 품는 공력,

다시 말해 대립의 공존을 장악하는 힘이다.

우리가 이 대립의 공존을 장악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아름답고 좋기 때문이 아니라

우선 그것이 실용적이고 미래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대립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비로소 우리의 수준을 한 단계 상승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꿈쩍 않고 정체되어 있는 우리 사회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을 갖게 된다.

p.29

 

지금과는 전혀 다르면서 한 단계 높은 차원의 그 시선이

인문적 시선이고 철학적 시선이고 문화적 시선이며 예술적 시선이다.

이 높이에서는 기능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가치를 추구하는 삶에 도전할 수 있다.

이 차원의 시선을 우리의 것으로 가져야만 따라하기가 선도하기로 바뀌고,

훈고의 습관이 창의의 기풍으로 바뀔 수 있다.

p.35

 

이 복수의 결기도 없이 무조건적인 화해나 평화를 들먹인다면, 이는 나약함의 표시일 뿐이다.

복수는 극복이고 자기 회복의 필수 과정이다.

복수의 결기가 없는 민족은 피해를 가한 상대를 저주하거나 등오하는 것으로만 세월을 보낸다.

이러다 보면, 가해자의 장점을 배워서 자신의 힘을 기르려 하거나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노력은 시작되지 못한다.

반면에 살아 있는 민족은 저주나 원망에만 머물지 않고 패배의 근원을 탐색하고

조용히 힘을 기르며 최소한 다시는 굴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친다.

이런 자세에서라야 진정한 용서와 평화도 가능하다.

p.47


일본도 페리 제독에 의해 강제 개항을 당한 후 철저히 서양을 배우는 길로 들어선다.

이것도 복수의 일환이라 말할 수 있다.

복수의 정신을 발휘해 가해자들에게 되갚아줄 요량으로 똘똘 뭉쳐

역량을 결집시킨 민족은 번영하고,

그렇지 못한 민족은 항상 종속적인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평화와 용서도 이 극복과 복수의 정신 위에서 행해져야 의미가 있다.

이런 정신도 없이 평화를 주장하는 것은 사실 평화를 구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p.49

 

(중국은 1860년 베이징 조약 이후 복수심을 가졌다.

1861 양무운동[과학, 기술], 사이장기이제이[오랑캐들의 좋은 기술을 배워서 오랑캐들을 제압하자], 

1898 변법자강운동[정치, 제도], 문화운동[윤리, 사상, 문화 즉, 철학]

중국의 민주화 바람은 위안스카이에 의해 3개월만에 실패.

그리고 1917년 신문화운동 지속)

 

천두슈는 그의 글 우리의 궁극적 자각에서

각종 개혁이 통용되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윤리사상에 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p.64

 

내 것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은 내게 필요한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효율적이고 핵심적인 방법이다.

서양의 월등한 과학기술 문명의 출처가 어디인지 파고들었더니

그것은 그들의 월등한 정치제도에서 왔고,

그들의 월등한 정치제도는 또한 그들의 월등한 사상, 문화, 철학에서 왔다고 하니,

구국구망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궁극적 지점인

그들의 사상, 문화, 철학을 철저하게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p.65

 

보통 어느 하나의 철학적 내용에 몰두해서 그것이 철학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에 빠지기 쉬운데,

우리에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철학적 차원의 시선이다.

그리고 철학적 차원의 시선에서 철학적으로 자각해서 자신의 운명을 끌고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철학이자 철학적 삶이다.

p.68

 

아베의 행동을 보고도 그는 나쁘다

그의 시도는 역사적 반성을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다

진실은 결국 승리한다와 같이 다분히 감정적이거나 도덕적인 판단 아래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것으로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침략을 당했던 일이나 지배를 당했던 일에 대해 이런식으로 반응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또 큰 목소리로 이런 식의 반응만 해놓고는 할 일을 다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매우 비굴한 대응일 뿐이다.

비굴한 대응이 습관화되면, 역사의 승리자가 될 수 없다.

오히려 패배자로 남기 십상이다.

p.84

 

김구 선생 백범일지나의 소원

나는 우리나라가 세게에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런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이라는 우리 국조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p.111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의 기능적인 관심에 빠져 있을 때,

거기에서 슬그머니 이탈해 흐름 자체에 궁금증을 가지면서 시작된다.

(중략)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이런 사람이 비로소 독립적 주체다.

독립적 주체들이 사회의 주도 세력이 되면 궁금증과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힘이 강해지고,

결국 그 사회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고 부단히 혁신하며 나아간다.

독립적 주체들은 대답하는 일에 빠지지 않고 질문을 시작한다.

대답은 주로 우리속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이다.

질문은 우리로부터 이탈한 독립적 주체들만이 할 수 있다.

대답이 진행되는 구조를 보자.

대답이란 이미 있는 지식이나 이론을 그대로 먹어서 누가 요구할 때 그대로 다시 뱉어내는 일이다.

(중략)

대답을 할 때 그 사람은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지식과 이론이 지나가는 통로 혹은 지식과 이론이 머물다 가는 중간 역으로만 존재한다.

(중략)

질문독립적 주체궁금증과 호기심상상력과 창의성시대에 대한 책임성관념적 포착장르선도력선진국은 이렇게 연결된다.

(중략)

선진 시민이란 독립적 주체성에 대한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고

자기 스스로 독립적 주체로 책임성 있게 존재하기를 갈망하는 사람이다.

p.116

 

선진국 사람들은 박물관이나 갤러리를 왜 자주 갈까?

두말할 것도 없이 재미있으니까 자주 간다.

그럼 우리는 박물관이나 갤러리를 왜 자주 가지 않을까?

재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 박물관이나 갤러리에서 재미를 느낀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곳에서 재미를 발견하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곳에서 재미를 발견할 시선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략)

보통은 유물들 하나하나를 보고 평가하거나 감탄한다.

그런데 박물관 자체가 갖는 높이를 포착하고 거기서 재미를 느낄 정도의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유물들 하나하나에 시선이 머무르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유물들 하나하나를 보고 감탄하면서,

종국에는 그 유물들 하나하나를 가능하게 한 그 시대 그 문화권 사람들의 동선을 읽는다.

그 사람들이 어ᄄᅠᇂ게 움직였는지, 그 움직임의 패턴을 찾아 읽는 것이다.

그것을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곳이 바로 인문이 자리하는 곳이며 인간의 동선, 인간이 그리는 무늬가 보이는 곳이다.

p.126

 

선진화는 목표 자체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어렵다.

그것이 문화적이고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시선을 구체화시키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것은 선도력을 형성하는 일이고 세계의 흐름을 관념의 높이에서 포착하는 일이다.

이 선진화라는 목표를 채우는 내용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고,

구체적이지도 않아서, 현실로부터 벗어나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누군가를 설득하기도, 힘을 모으기도 쉽지 않다.

p.138

 

건국의 틀도, 산업화의 틀도, 민주화의 틀도 이제는 모두 낡았다.

각자 자기 틀에 갇혀서 낡고 병든 것을 모르기 때문에 서로 핏대를 세우고 목소리를 높인다.

자기 틀로만 세계를 볼 줄 알지,

유동적 세계 안에서 미래를 향한 목표를 설정하는 지성적 능력을 보일 줄 모른다.

누구든 신념화된 자기 소리만 계속 해대는 사람은 일단 지적이지 않다.

이런 사람들에게 현혹되면 안 된다.

p.139

 

단재 신채호 선생

동아일보낭객의 신년만필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주의와 도덕은 없다. ,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p.147

 

선진국과 후진국은 세계 변화에 반응하는 예민함에서 차이가 난다.

일본과 한국의 국력 차이도 사실은 세계의 변화에 반응하는 예민함의 차이다.

근대화 물결이 시작되자마자 그 조짐을 읽고 빨리 대처한 일본과 느리게 반응한 조선의 차이다.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쓴 박훈 교수는 그 책 안에서

서양의 외압에 반응하는 일본의 태도를 과장된 위기의식이라고 표현한다.

강제 개항 등과 같은 일련의 압력에 대하여 일본이 실제 내용보다 훨씬 더 큰 위기의식을 가지고 과도하게 반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민함이 좀 떨어진 문화권의 사람들 눈에는 제국이나 선진국의 예민함이 좀 호들갑스럽게 보이거나 지나치게 보일 수 있다.

후진국은 세계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항상 사태가 발생해야만 그때부터 대응하기 시작하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후진국에서는 늑장대처’ ‘땜질처방’ ‘대증요법과 같은 한탄들이 자주 등장한다.

항상 선제적 대응에 실패하고 사태가 발생해야만 움직이는 습성 때문이다.

이는 주도적으로 역사를 전개해 본 경험이 없다 보니 당연히 예민함을 발휘해본 적이 없고,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형성된 습성이다.

p.174

 

익숙한 자기는 집단적인 관습이나 보편적인 이념을 공유하는,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차이가 없는 자기다. 종속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자기일 뿐이다.

집단 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자신은 단독자로 고립을 자초할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지 않으면 그 안에 매몰되어 세계의 진실을 포착할 수 없다.

고립을 자초한 후, 고독에 빠질 수 있어야 한다.

(중략)

피상적으로 보면 연결이나 연대에 독립은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는 매우 단편적인 시각이다.

독립적인 주체만이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연결연대를 할 수 있다.

독립적이고 고독 주체가 종속적 주체보다 훨씬 개방적이다.

독립적이지 않고 종속적인 주체는 이미 있는 이념에 빠져 그것을 지키는 데에만 힘을 쓰기 때문에,

그 이념으로 지탱하는 공동체를 정해진 모습 그대로 유지하려고만 하지

공동체의 질적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돌출적인 시도를 못한다.

p.179

 

우리나라는 지금껏 남의 것을 열심히 추종해서 모방하는 것으로 삶의 대부분을 채웠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이데올로기,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이데올로기,

건국(정부수립) 이후로는 미국의 이데올로기로 살았다.

주된 흐름은 대부분 이러했다. 이처럼 생각을 따라하다 보니 생각의 결과들도 대부분 따라서 한 것들로 남았다.

산업도 전반적으로 따라하기로 되어 있다. ‘따라하기를 잘해서 이른바 재빠른 추격자의 대표 주자가 되었다.

(중략)

지금부터가 문제라는 뜻이다. ‘따라하기로는 효율성을 더 이상 높일 수 없고그만큼 이익 창출이 어려워졌다.

이제는 우리 사회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 우리가 가는 길을 한 단계 더 높일 수밖에 없다.

p.209

 

새로 등장하는 신호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로 즉각 반응하는 일도 지적으로 게으르기 때문이다.

좋다거나 나쁘다라는 판단은 이미 내면화된 가치관을 근거로 해서 거기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만 따진다.

이때는 숙고가 필요하지 않다. 이미 있는 가치관이 등장하여 즉각적인 판단을 해주기 때문이다.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은 편한 길을 애써 피하고, 그 조짐의 의미와 방향에 대해서 부단히 숙고한다.

그렇기에 힘들고 불안하다. 힘들고 불안한 내면을 극복하고 계속 질문을 해대는 일은 지적으로 부지런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p.212

 

주인으로의 삶을 사는 자신은 이기적이거나 폐쇄적일 수 없다.

흔히들 쉽게 숭배하는 보편적 이념이나 사회적 신념 등과 같이 낡고 굳은 가치관을 벗어던지고 난 다음에 남는 존재 상태가

바로 참된 사람으로서의 자기 자신이다.

참된 사람은 폐쇄적으로 자신을 지배하던 믿음 체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개방적이다.

참된 자아의 존재를 지탱하는 것은 기존의 신념이나 이념이나 가치관이 아니라,

자신에게만 있는 궁금증이나 호기심과 같은 활동성일 뿐이다.

이 사람은 익숙한 이념이나 신념 등을 변화하는 세계에 억지로 강요하는 폐쇄적 활동을 하지 않는다.

굳어진 생각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에 유동적 전체성으로서의 세계를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p.224

 

나무 닭(장자』 「달생)

투계를 좋아하는 왕이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자기 닭을 가지고 기성자를 찾아간다.

기성자는 닭을 잘 훈련시키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기성자에게 왕은 자신이 가지고 간 닭을 백전백승의 싸움닭으로 만들어달라고 했다.

열흘 후에 왕은 기성자를 찾아간다. 닭이 잘 훈련되었는지를 묻자 기성자가 말한다.

아직 덜 되었습니다.”

이에 왕이 왜 아직 덜 되었다고 하느냐고 묻자 기성자가 말한다.

닭이 허세가 심하고 여전히 기세등등합니다. 그래서 아직 부족합니다. 열흘 후에 다시 오십시오.”

왕은 돌아갔다 열흘 만에 와서 다시 묻는다.

이제는 되었느냐? 이제 백전백승할 수 있는 닭으로 길러졌느냐?”

기성자가 아직도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 닭은 아직도 다른 닭의 울음소리나 다른 닭의 날갯짓하는 소리만 들어도 싸우려고 덤빕니다. 그러니 아직은 안 되겠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이 정도라면 투계로서 굉장히 잘 길러진 것으로 보이는데,

기성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튼 왕은 이번에도 그냥 돌아서고, 다시 열흘 후에 찾아온다. 그리고 묻는다.

이제 되었느냐?”

기성자가 그때서야 이제는 된 것 같다고 한다. 그러자 왕이 묻는다.

무엇을 가지고 지금은 되었다고 하느냐?”

그러자 기성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닭이 울고 날갯짓하는 소리를 내도 꿈쩍도 안 합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흡사 그 모습이 나무로 만들어놓은 닭 같습니다.

이제 덕이 온전해진 것입니다. 다른 닭들이 감히 덤비지도 못하고 도망가버립니다.”

태연자약.

p.228

 

절대적 높이를 가진 자는 외부에 반응하는 것을 자기 업으로 삼지 않는다.

자기를 이기려 하지 타인을 이기려 하지 않는다.

경쟁 구도 속으로 스스로를 끌고 가지 않는다.

경쟁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그 구도 자체를 지배하거나 장악한다.

자기 게임을 할 뿐이다. 태연자약한 태도다.

그래서 자기가 애써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자멸함으로써 승리자의 지위를 오래 유지한다.

p.232

 

이미 정해져 있는 이념이나 신념을 수행하거나 지키려는 것보다 자신의 덕을 활동시키려 애쓰는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능동적 주체다. 종속적 주체는 자신의 주인 자리를 신념이나 이념 혹은 가치관에 양보한 상태다.

그래서 진정한 자아와 자신을 이끄는 자아가 분리되어 있다.

이런 분리 상태에 있는 사람은 자발적이고 책임성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p.236

 

안전, 준비 그리고 훈련이라는 이 세 가지는 모두 아직 오지 않은 것들,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일들에 대하여 미리 에비하는 태도들이다.

보이고 만져지는 것에만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에 대한 대응력이 떨어진다.

현상 세계에만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구체적이지 않은 것에 접촉하려는 도전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이때 지성의 근원인 의 활동이 필요하다.

그런데 덕의 활동은 궁금증과 호기심을 근거로 한다.

궁금증과 호기심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향해 나아가려는 꿈틀거림 혹은 몸부림이지 않은가?

지성은 어떤 것에 대한 지적인 이해로 완성되지 않는다.

지성은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치는 힘이다.

지성은 이 발버둥으로 완성된다.

p.240

 

안전, 준비, 훈련, 선진, 상상, 창의, 선도, 관념의 포착, 장르의 창조, 지성, 문화, 에술, 철학적 시선, 시적 상상력, 독서 습관, 박물관이나 갤러리 가는 취미, 예민함 등등은 모두 같은 높이에 있다. 단어만 다를 뿐 이것들의 작동과 실행은 거의 동등한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p.243

 

1988년에 개최한 서울 올림픽은 세계에서 성공적으로 잘 개최된 대표적인 올림픽으로 평가받았다.

그렇다면 1988년과 2014(인천아시안게임), 2015(대구세계물포럼축제) 사이에 우리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민감성이 사라졌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몰입도가 사라진 것이다.

(중략)

우리 사회는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민감한 책임성은 사라지고 모두들 고착된 체제 위에 얹혀 있는 부표로만 존재한다.

p.244

 

대답을 잘하도록 훈련된 주체들은 분열되어 있다.

대답을 할 때, 주체는 이미 있는 이론과 지식이 머물다 가는 중간 역으로 존재하거나 지식과 이론이 지나가는 통로로만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주체가 진짜 주체와 중간 역으로서의 주체로 분열된다.

이때 사회적 역할은 중간 역으로서의 주체가 담당한다.

(중략)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한다.

을 갖는다. 그 사람은 그 을 행하며 산다.

여기서 살아간다는 말은 이라고 하는 하나의 역할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구현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그 은 자신의 이 된다. ‘은 자기가 맡은 역할이고, ‘은 사명 혹은 자아실현을 의미한다. 직업의 출현이다.

p.246

 

도덕경

탁월한 사람은 논변에 빠지지 않는다.

논변에 빠진 사람은 탁월하지 않다.

지식은 근본적으로 무한 분화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아는 것, 자신만의 제한된 개념을 가지고 얼마든지 자신을 꾸미거나 상대방을 괴롭힐 수 있다.

사회적으로 갈등이 있는 문제들을 보자.

찬성하는 이유도 수만 가지를 만들 수 있고, 반대하는 이유도 수만 가지를 만들 수 있다.

수만 가지의 양측 논변이 모두 다 논리적으로 치밀하다.

이처럼 대부분의 논변은 각자 자신의 관점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성적인 사람은 논변에 빠지지 않는다.

논변을 넘어서거나 논변을 압도하는 빛을 보여주려 노력한다.

p.256

 

순자』 「권학

흙을 쌓아 산을 이루면, 거기에 바람과 비가 일어나고

물을 쌓아 연못을 이루면, 거기에 물고기들이 생겨나고

선을 쌓아 덕을 이루면, 신명이 저절로 얻어져서 성인의 마음이 거기에 갖춰진다.

p.272

 

흔히 고전이나 경전들을 접하면서 진리에 대한 갈망을 갖는데,

그것은 고전이 가지고 있는 내용을 진리로 받아들여 내면화하는 일만으로는 완성되기 어렵다.

고전에 있는 진리적인 것들이 당시의 구체적인 세계와 어떤 유기적 연관성 속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한 후,

자기가 살고 있는 세게에서 유기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시대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세계에서 포착된 자기만의 문제가 자기에게서 먼저 진리로 드러나는 것이 관건이지,

경전에 있는 진리를 묵수하는 것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중략)

생각의 결과를 배우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철학이다.

정해진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진리를 대하는 태도일 수 없다.

자기만의 진리를 구성해보려는 능동적 확동성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다.

p.280


선진 시민으로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세상의 사건들을 독립적인 것으로 바라보았다. 어떤 하나의 꿰뚫는 원리가 존재하는지 찾지 못한채 각 사건을 다른 이유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원리(물론 단 한 마디로 꿰어 버리는 폭력성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를 알게 되고서 하나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겠다는 통쾌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찾게 된 것처럼 답답해졌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거대한 문제점을 직면하자, 우스갯 소리로 주변 사람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선진국으로 떠나야겠다"고 했다. 처음엔 우스갯 소리였는데 지금은 농반진반인 것 같다.

   미래에 가망이 있다면 조금은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지금의 10대는 가능성이 있을까? 앞으로는 아이들에게 프로그래밍 언어도 가르친다고 한다. 그것이 미래 시대에 필요한 지식이라고 한다. 아이들이 그런 세상의 규칙을 빠르게 공부하는 것이 중요할까? 세계 시대에서 필요한 것은 영어니까 영어에 몰두했던 것 처럼 프로그래밍 언어도 또 하나의 과업을 내려주는 것 같다. 이 책이 꾸준히 주장하는 솔루션과는 다른 차원의 대증요법인 것이다. 우리의 문화 교육은 언제 시작될까? 과연 교육계가 이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려면 어떤 사건이 일어나야 할까? 너무나도 괴롭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더욱 괴롭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은 하려고 한다. 중학생에게 수학을 가르칠 의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수학보다 근원적인 것, 인간적인 것이다는 사실을 계속 주입하고 있다. 내 주변의 학우들에겐 책을 같이 읽자고 하며, 학우들이 관심있는 주제 혹은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사안들을 좀 더 심층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것으로는 턱없이도 부족하다. 문화 교육으로의 전진은 이것으로는 턱도 없다. 역량을 더 키워야 한다. 나는 우리나라를 애증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더 깊다. 세상에 활력을 일으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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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선

경제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만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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